〈 82화 〉 내일은 슈퍼 스타 (16)
* * *
백화점의 위치는 게이트 내부에서도 제법 외곽 쪽이다. 백화점 후문에서부터 게이트 외곽 끝 선까지는 고작 1KM.
즉, 대부분의 대형 몬스터는 이지아가 막고 있는 정문으로 몰려들었고, 사실상 김현우가 맡은 대형 몬스터들의 숫자는 이지아와 비교하자면 10분의 1도 안 됐다.
대형 몬스터가 첫 출몰 하고부터 30분이 지났을 때.
김현우는 두 마리째를 처치하고 복귀했다.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채로.
워슈트는 외골격이 모두 벗겨져 뼈대만 간신히 남아있는 상태였다.
찢어진 옷 틈 사이로는 피가 질질 흘렀고, 부축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 걷기도 힘들어 보였다.
간이침대에 누운 김현우의 몸을 의사가 툭툭 건드렸다.
“아프십니까?”
“아뇨.”
“여긴요?”
“안 아픕니다.”
“……모르핀 얼마나 투여했습니까?”
김현우가 눈을 굴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사기 네 개? 다섯 개? 정확하게 기억 안 나네요.”
의사가 라이트로 김현우의 동공을 비췄다.
“구토 증상은요?”
“아까 몬스터 처치하고 복귀해서 네 다섯 번 했는데, 이게 맞아서 그런 건지 중독 증상 때문에 그런 건지 모르겠습니다.”
“중독입니다. 동공수축이 많이 진행됐네요. 더 투여하면 치사량까지 갈 수 있어요. 그만…….”
그가 말을 멈췄다. 환자의 몸 상태를 생각하면 다음 말을 이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대형 몬스터를 처치할 수 있는 건 이지아와 김현우뿐이었다. 그의 충고를 김현우가 따르면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죽는다.
그래서 의사는 평소대로 말하지 못했다.
그가 입을 우물거리고 있으니까 김현우가 주섬주섬 일어났다.
“응급치료만 하고 끝내죠.”
김현우가 배낭에서 약물 케이스를 꺼냈다.
주사기를 손에 쥔 그가 허벅지에 바늘을 찔러넣었다.
의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응급 치료를 이어갔다. 그가 스테이플러로 벌어진 상처들을 봉합했다.
딸칵! 딸칵!
“……붕대 다 감았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선생님.”
멀리서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대, 대형 떴습니다!”
김현우는 고갤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아직 게이트의 결계는 깨지지 않았다.
*
이번에도 2족 보행 거인이었다.
가만히 서서 몸 상태를 가늠해봤다.
첫 번째 대형 몬스터와 싸웠을 때.
왼쪽 다리가 박살 나고 등 뒤는 화상을 입었다. 귀에서는 이명이 계속 들렸다.
두 번째 대형몬스터와 싸웠을 때.
쇄골이 부러졌고, 반고리관에 이상이 생긴 건지 중심을 잡기 힘들어졌다. 모르핀 중독으로 구토가 시도 때도 없이 나왔고, 체력의 한계로 집중력은 떨어졌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해서 싸웠다. 아프다고 징징대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전력으로서 나를 냉정하게 분석해야만 했다.
전투는 정신력이 아닌 전략과 전술로 이뤄진다. 그릇된 선택으로 다른 사람들 모두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었다.
“웁.”
우에에엑.
빈속에 위액을 게워내며 머리를 식혔다.
과연 나는 네 번째, 다섯 번째까지 전투를 속행할 수 있을 것인가.
안된다.
쇄골이 부러지고, 다리 한쪽은 박살 나고, 모르핀에 중독되고, 워슈트도 한계에 다다랐다.
한탄이 나온다.
내게 더 좋은 기체가 있었으면….
민간에 떠도는 싸구려 모델로 여태까지 버틴 것도 기적이다.
잘해봐야 이번을 막는 게 마지막이었다.
결국 국군은 때를 맞추지 못했다.
하긴, 그들이 잘못한 건 아니다.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진행된 이번 게이트가 문제인 거지.
전략을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갔다. 소령이 뒤를 따라왔다.
나는 마른 입술을 뗐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소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뭐가 마지막인지는 알 거다.
말을 이었다.
“바리케이드는 포기하고 전략 바꾸겠습니다. 이지아가 대형 몬스터 위주로 처리할 거고 나머지는 백화점 내부에서 수성하죠.”
“괜찮겠습니까? 사망자가 제법 나올 텐데요.”
잘 안다.
성벽을 포기하고 적군에게 문을 열어줬다.
시가전에 민간 피해가 안 나올 수는 없다.
여태까지 내가 굳이 대형 몬스터를 직접 처리한 이유다.
국군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오지 않았다.
“……제가 대형 몬스터 막고, 지아 씨가 정문 막는 동안 내부에서 전투 준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따로 명령하실 거 있으십니까?”
명령이라.
혀로 입천장을 툭툭 두들기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 6층에 몰아넣은 다음에 에스컬레이터, 비상계단 싹 다 터트리세요.”
몇몇 몸놀림이 재빠르거나 점프력이 뛰어난 몬스터가 아니라면 상층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다.
다만 바리케이드가 없어 사방에서 쏟아지는 몬스터들을 막아야 한다. 한 마리라도 통과하면 이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있는 만큼 피해가 심할 거다.
물론, 완벽하게 막아낼 리는 절대 없다.
“엽총도 풀어서 피난민들 전부 재무장시키고, 여자나 노인들한테도 골프채든 야구방망이든 무기 하나씩 쥐여주시고요.”
예비군 동대장답게 민간인들 지휘하는 능력은 탁월했다. 방향을 정해줬으니 알아서 할 거다.
대답을 듣지 않고 거인에게 달려갔다.
내가 해야 할 건 하나다.
소령이 계단을 모두 터트리고 전투 준비를 마칠 때까지 버텨야만 한다. 중소형 몬스터는 외부 바리케이드가 일정 시간 막아줄 터다.
근처 빌딩 위로 올라간 나는 파일 드라이버를 옆구리에 꼈다. 문득 불어오는 바람이 시렸다.
워슈트의 외골격이 대부분 박살 나며 방어력을 기대하기 힘들어졌다. 긴장으로 굳은 한숨을 내뱉으며 힘껏 땅을 찼다.
*
거인은 쓰러졌다.
워슈트는 완파됐다.
나는 낙하산을 타고 백화점 후문에 내렸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고개부터 처박고 고꾸라졌다.
팔로 바닥을 짚었다.
무릎을 펴고, 허리를 세우고, 걸어야 한다.
그런데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위가 깜깜했다. 코앞에 무언가 있다. 괴물인 줄 알고 허리춤에서 대거를 꺼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루리였다.
나는 파리하게 질린 입술을 열었다.
“루리야, 게이트 끝났어?”
약간의 희망.
“게이트?”
“음, 군인들한테 구출돼서 밖에 나온 거야? 괴물들 이제 안 나와?”
“아니. 엄청 많아.”
그리고 절망.
몸 상태부터 점검했다.
완전히 전투 불능에 빠졌다.
충격으로부터 보호해줄 외골격은 두 번째 대형과의 전투에서 박살 난 지 오래였다. 세 번째 전투는 사실상 마석만 박아넣고 싸운 거였고, 고작 머리 크기만 한 돌멩이에 한 대만 맞아도 위험했었다.
그런 와중에 폭탄을 짊어지고 괴물의 귓속으로 또다시 기어들어 갔다.
모르긴 몰라도 내부가 완전 진탕 나 있을 터다. 아까부터 속에서 불편한 기침이 멈추지 않는 걸 보면 분명 그랬다.
“루리야, 여기 어디야?”
깜깜하고 답답했다.
어딘가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
루리가 허공에다가 손을 마구 휘저으며 설명한다.
“등 뒤에 달려있던 거 있잖아. 막막, 천 같은 거. 알록달록하고, 커다랗고.”
낙하산 아래에 덮여있나 보다.
그 덕분에 기절해있는 동안 몬스터들에게 안 들켰던 건가. 그러다가 문득 루리에게 생각이 미쳤다.
“넌 여기 왜 있어?”
“응?”
“사람들 백화점으로 다 피신 가 있을 텐데, 왜 밖으로 나온 거야? 아니, 몬스터들은 어떻게 피하고…….”
아이가 혼자 백화점 밖으로 나가는데 사람들은 뭘 하고 있던 거지?
루리가 활짝 웃는다.
“나 계속 여깄었는데!”
“뭐?”
“총소리 날 때부터 계속 여깄었는데. 저기, 저기 트럭 밑에 숨었어. 전투기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다가, 어, 아저씨가 떨어지는 거 봤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트럭 밑에 숨어있다가 내가 떨어지는 걸 발견하고 여기까지 왔다는 소리 같다.
아이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아얏!”
“너, 여기가 얼마나 위험한데….”
루리가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였다.
“난 스페셜 에이전트의 조수잖아.”
이래서 애들은.
대체 어디로 튈지 모른다.
치지직!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터졌다.
기둥 타고 올라잖아, 병신들아! 빨리 쳐 죽여!
매니저는 아직 안 왔어?
중형 올라온다! 폭탄 가져와!
현우야, 김현우!
이쪽 뚫렸… 끄아아아악!
비상계단 뚫렸습니다. 지원 보내주세요!!
뚝.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무전기를 꺼버렸다.
도저히 쉴 틈이 없었다.
상황은 급박했고, 무전기에서 들린 사람들의 목소리로는 백화점 내부도 언제 뚫릴지 모르는 모양이다.
가서 도와야 한다.
대물 저격총과 TNT 같은 군 전용 장비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소령은 장교였지만 특수병과와 거리가 멀었고, 다른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비록 워슈트가 없지만 내가 있는 것만으로 전력이 대폭 상승한다.
머릿속을 정리했다.
우리는 현재 백화점 외부에 고립돼있었다. 에스컬레이터와 비상계단은 내 입으로 먼저 무너트리라고 지시했었고, 사실상 위로 올라가는 길은 전부 막혔다.
주먹을 쥐락펴락했다.
얼마나 기절해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팔에 조금 힘이 돌았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 식료품 매장에 전부 멈춰있는 상태다. 그리고 내게는 낙하산 체인 고리와 대거가 있었다.
1층 엘리베이터 문을 연 뒤, 로프를 타고 올라간다.
“……좋아, 서루리 요원.”
“응?”
“기지로부터 임무가 내려왔어. 백화점 내부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협조가 필요해. 가능하겠어?”
“응! 당연하지.”
대거로 낙하산 천을 눈구멍 크기만큼 잘랐다. 시야가 확보됐다.
쿠콰아아앙──!!
아무래도 꽤 시간이 오래 지났나보다.
백화점 주위로 대형 괴수들이 제법 많이 밀집해 있었다. 이지아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전방위를 막아냈다.
그런데, 조금 많이 위태로워 보였다.
심호흡을 하며 루리에게 말했다.
“포복 전진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땅바닥을 기는 거야.”
루리가 고갤 끄덕였다.
우리는 낙하산 밑에 숨어서 땅바닥을 기었다. 시야에 몬스터가 보이면 숨을 죽이고 기다렸고, 주위에 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낮은 포복으로 전진했다.
5분은 움직인 거 같은데 백화점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다. 정신이 몽롱하다. 눈을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엔가 십수초인가 흘러있었다.
팔꿈치로 땅바닥을 쓸며 루리에게 물었다.
“부모님은 어디에 계셔?”
“모르겠어.”
아이의 옷을 살폈다.
난리 통에 더러워진 것도 있겠지만, 색까지 누렇게 바랜걸 보면 원래부터 상당히 헤져있던 것 같았다.
여섯 살짜리 어린애가 이런 상황에서 부모 이름 한번 안 부르고 묵묵히 있었다.
뻔했다.
“루리야.”
“응?”
“게이트 나가면 아저씨랑 같이 살래?”
“요구르트 많이 줄 거야?”
“밥 먹을 때마다 하나씩 줄게.”
루리가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갈래.”
철퍽!
괴물의 발소리.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철퍽, 철퍽…….
발걸음 소리가 멀어진다.
다시 전진하려는데 루리가 팔꿈치를 주물럭거리는 게 보였다. 셔츠 밑단을 잘라 감아줬다.
“가자.”
“응.”
쿠콰아아아앙──!!
이지아의 전투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우리가 백화점에 가까워진 탓이 아니다.
이지아의 몸은 하나고, 등장하는 대형 몬스터의 숫자는 늘어났다.
조금씩, 조금씩, 전선이 밀리고 있었다.
국군의 구조가 필요했다.
우리는 버틸 만큼 버텼다.
“있잖아, 전투기는 얼마나 세?”
루리의 질문에 바닥을 기며 대답했다.
“괴수들 몽땅 때려죽일 만큼 세.”
“진짜? 보고 싶다.”
“나도.”
전투기는 구조 신호나 마찬가지였다.
루리가 내 바지를 붙잡았다.
“진짜 전투기 보고 싶어?”
“응.”
“그러면 여기서 기다려야 하는데.”
팔꿈치를 움직이려다가, 고갤 돌려 루리를 쳐다봤다. 아이가 소중히 안고 있는 그림일기가 보였다.
아까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총소리 날 때부터 계속 여깄었는데. 저기, 저기 트럭 밑에 숨었어. 전투기 구경하고 싶어서. 그러다가, 어, 아저씨가 떨어지는 거 봤어.
전투기 구경하고 싶어서 숨어있었단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얘는 전투기가 뜰 걸 어떻게 알고?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루리야, 전투기 보려면 왜 여깄어야 해?”
“전투기가 이쪽으로 와서!”
“…일기 보여줄래?”
루리가 일기장을 활짝 펼친다.
시간은 안 적혀있었다. 백화점 상태는 썩 좋지 않아 보였지만, 어쨌든 국군이 제시간에 도착하나 보다.
몸에 활력이 돌았다. 내가 노력한 게 아무런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백화점으로 돌아가서 합류하고, 사람들을 구하면…….
그때였다.
──────!!
괴성이 들렸다.
낙하산 사이로 멍하니 전방을 바라봤다.
거인이 백화점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지아는? 이지아는 어딨지?
눈을 돌렸다.
수십 미터 밖에서 대형 괴수들과 싸우고 있었다. 아직 눈치 못 챈 모양이다. 눈치채고 달려온다 해도 늦었다.
거인의 손이 백화점으로 간다.
그 모든 게 느릿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모르핀의 부작용 탓인지, 위기 상황에서의 각성인지 모르겠다.
대거를 휘둘렀다.
낙하산을 찢고 밖으로 튀어 나가 앉아 쏴 자세를 취했다.
대물 저격총의 총구를 녀석의 머리에 겨냥했다.
루리가 그렸던 그림에는 분명 백화점이 박살 나 있었다. 2,000명을 한 층에 몰아넣었다. 생존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뻔했다.
예언으로 그려진 그림이 확정된 미래인지, 아니면 가변적인 미래인지 모르겠다.
백화점이 반파된 게 폭탄의 영향일 수도 있고, 거인에게 습격 당해서 일 수도 있다.
만약 루리의 일기가 확정된 사실만을 그린다면.
내가 여기서 녀석을 막는다고 백화점의 상태가 바뀌지 않을 거다. 이후에 나타난 대형 몬스터가 저 백화점을 무너트릴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의 내 행동은 헛짓거리가 되겠지.
좆까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지아아아아아아───!! 거인 처리해!!”
콰앙─!
강한 반동에 몸이 뒤로 밀려났다.
콰앙─! 콰앙─!
계속 방아쇠를 당겼다. 으드득. 어깨뼈가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계속해서 밀려나던 나는 바리케이드에 등을 부딪쳤다.
잘됐다.
조준하기 편해졌다.
콰앙─! 콰앙─! 콰앙─!
그렇게 십수 발을 녀석에게 먹였을 때.
괴물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이제 난 죽겠지.
멀리서 이상을 눈치챈 이지아가 땅을 박차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늦었다.
이미 손아귀에 잡히기 직전이었다.
아마 그녀가 도착할 때쯤이면 난 찌그러진 만두피처럼 돼 있을 거다.
하지만 백화점이 박살나는 건 막았다.
머리가 식으니까 여러 생각이 든다.
지아는 이제 어떡하지?
내가 없으면 우울증으로 많이 힘들어할 텐데.
그래도 최근 이지아에 대한 여론이 많이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청문회 때부터 SNS, 보복 행정으로 이미지가 많이 좋아졌으니까. 촬영 전에 나눴던 대화처럼, 이제 그녀에 대한 악플은 보기 힘들어졌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힘들지만 적응할 거다.
유정이는.
쎄에에에에에에에엑!
파공음이 들린다.
수백 수천 번이나 들어본 익숙한 소리였다.
천천히 고갤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웃음이 나왔다.
“존나게 늦네, 씨발놈들.”
게이트의 결계가 깨졌다.
쿠콰아아아아아앙──!!!
거인의 대가리가 폭발했다.
* * *
“괜찮아요?”
“죽을 거 같아요.”
김현우가 이지아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엄살은 아닌지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도로 건너편을 쳐다봤다.
군인과 헌터들이 트럭을 타고 백화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달려드는 소형 몬스터들은 빗발치는 총알에 쓰러졌고, 중형은 헌터들이 나서서 막았다.
쿠콰아아아앙─!
연달아 터지는 폭음.
난동부리던 대형들도 바닥에 쓰러지고 있었다. 전투기들이 활공하며 대형 몬스터들을 처리했다.
푸른색의 수송기 한 대가 백화점에 위에 떠 있었다. 보통 군용 수송기들이 위장을 위해 어두운색을 고집한다는 걸 생각하면, 많이 특이했다.
그들이 어느 소속인지 알아보는 건 쉬웠다.
전장에서 푸른색을 쓰는 건 한 군데밖에 없다.
수송기 하부에 적힌 푸른색 마크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UN…? 피스 메이커잖아.”
이지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녀도 TV에서나 봤던 워슈트 부대다.
피스 메이커.
워슈트가 개발되고부터는 사실상 강대국들의 워슈트 테스트장이 돼버린, 전 세계 규모의 PMC 단체.
그런 UN에서도 가장 유명한 부대였다.
수송기에서 워슈트를 입은 군인들이 낙하산도 없이 뛰어내렸다. 하늘 위에서 수십 대의 기체가 땅으로 추락했고,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군인들의 워슈트 외관에는 낡고 더러운 스티커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마치 킬 마크처럼. 가장 앞서 걸어오던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가 버럭 외쳤다.
“거기 민간인 아저씨! 여기서 뭐 해. 뒤지려고 환장했어?”
“현우 씨, 제 뒤로…….”
명백한 시비조에 이지아가 김현우의 앞을 막아서려는 때였다.
남자가 불이 붙은 담배를 김현우의 입에 물려주며 머리를 툭 쳤다.
“오랜만이다, 새꺄.”
뒤에 있던 부대원들도 지나가며 그의 머리와 가슴을 한대씩 두들겼다.
“이 새끼 헌터한다고 전역하더니 빌빌거리고 있네. 왜 매니저나 하고 있냐? 월급 여기보다 많이 줘?”
“그래도 이지아 매니저잖아. 방금 보니까 존나 예쁘던데, 그 정도면 할만하지. 야, 나중에 소개해줘라.”
“김현우 쟤 담당하는 헌터 이지아가 아니라 고삐리야.”
“엥? 진짜?”
“씨발아, 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아프리카에서 바로 왔어.”
“고생하셨습니다, 중사님.”
군인들이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곧 괴물들의 비명이 들렸다.
멍하니 있던 이지아가 충격받은 얼굴로 물었다.
“……현우 씨, 담배를 피웠었어요?”
김현우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거부터 묻는 거예요?”
“네.”
“폈었어요.”
“언제부터요?”
“레드 게이트 때부터요. 가족들도 다 죽었거든요. 사장님이 커피에 담배 냄새 밴다고 하도 잔소리해서, 그때 끊었어요.”
학교에서 수업받던 학생들이 몬스터들에게 찢겨져 죽는 기괴한 시대였다.
그렇기에 게이트가 발생하고부터는 감정을 죽여야만 했다.
발걸음을 한순간이라도 멈추면,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수십 명씩 더 줄어들었을 테니까.
이지아의 평판을 위해 움직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그의 개인적인 의무감을 그녀의 탓으로 돌린 것에 불과했다.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서 이지아라는 강력한 무력이 필요했기에.
김현우는 담배를 꼬나물고 하늘을 바라봤다. 전투기와 수송기가 두 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빼곡했다.
곳곳에서 들리는 포격음, 괴물의 괴성, 시민들을 구조하기 위해 사지로 들어가는 헌터들의 기도 소리까지.
모든 게 익숙하고 좆같았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시민들이 얼마나 살아남아 있을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아파트들 창틈 사이로 희끗희끗 무리하게 보이던 검은 머리카락들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만족스러운 작전은 아니었다. 아쉽지 않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거다. 여러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만약 그때 내게 군에서 쓰던 워슈트가 있었다면,
만약 그때 내게 지금보다 더 강한 능력과 재능이 있었다면,
만약 그때 내가 더 빠르게 주위 상황을 파악하고 움직였다면,
만약 그때 내가 다른 판단을 내렸다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물기 섞인 웃음을 와락 터트렸다.
이미 흘러간 시간이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최선을 다해 움직였고,
죽었을 사람들이 멀쩡하게 살아남았으면,
그걸로 된 거다.
게이트 발발 4시간 57분째.
국군의 진압 작전이 시작됐다.
*
“미쳤구만.”
게이트 비상 대응 본부의 인사들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군은 생존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빠르게 현장에 진압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수송기를 타고 온 UN 파병군은 게이트 발생 5시간째가 돼서였고, 진압 작전이 시작할 때쯤이면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설 때는 그저 일말의 기대와 조금의 생존자라도 구출해보자 하는 무력한 결정이었다.
내부의 인원이 전부 죽었을 거 같다고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저게 다 몇 명이야?”
그런데 생존자들이 백화점 외부로 줄줄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백, 이백, 삼백, 사백…….”
손가락으로 어림짐작 세던 국방부 차관이 포기했다.
생존자들이 바글바글했다.
“게이트 내부 피랍 추정 인원이 몇 명이었죠?”
“반경 13KM니까 전산상에 등록된 인구수가 대충 3천쯤 됩니다.”
“지금 나온 것만 봐도 천오백은 넘는데.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구조 작전은 한 적도 없는데…….”
이상했다.
철원읍 내부의 생존자들이 전부 백화점에 모여있었다.
일반 시민들이 자경대를 이뤄 몬스터를 막아냈고,
근처에는 바리케이드 목적으로 설치해놓은 트럭들이 한가득이었으며,
백화점 내부에는 통제실이 설치돼 군 편제가 끝마쳐진 상태였다.
“게이트에 S급 헌터 이지아가 있었다잖아요.”
“아니, 저게 고작 헌터 한 명 있는 거하고 뭔 상관입니까. 저건 꼭…….”
군대가 미리 움직인 거 같았다.
“사람들 살았으면 됐지. 조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움직이죠.”
게이트 비상 대응 본부의 인사들이 백화점으로 걸어갔다. 기왕 온 거 사진이라도 찍을 셈이다.
부협회장은 제자리에 서서 한예림을 찾았다. 동행한 소녀가 그녀를 안은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시선을 더 멀찍이 보내니까, 김현우와 이지아가 보였다. 그가 품속에서 사진을 꺼내 김현우의 얼굴과 대조했다.
현직 S급 헌터, 이지아.
가 끝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미래 S급 헌터가 될 초신성, 한유정.
이 끝인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설마 거기서 한 명 더 튀어나올 줄 몰랐다.
국방부 차관이 개인적으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김현우는 피스 메이커에서 스나이퍼를 담당했었다고 한다.
안전 문제로 거부했던 부대장이 움직인 이유다.
전직 부소대장이 게이트 내부에 갇혀있다니까 변명을 철회하고 달려온 거다.
협회에서 모를 만도 했다.
스나이퍼 임무 특성상 신분이 감춰져 있었으니까.
그래도 내부 서류는 존재했고, 거기에는 김현우에 대한 평가 항목들이 매겨져 있었다.
주특기, 워슈트 운용력, 군 기준 신체 능력 등은 다른 대원들하고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평가 항목에서 대부분 B등급, C등급 등을 받았는데,
그중 특이한 이력이 유일하게 하나 있었다.
임무 수행 능력이 S등급이란다.
“……복마전이 따로 없구만.”
부협회장이 한예림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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