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나의 아저씨 (1)
* * *
애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재빨리 고갤 들어 이지아와 한예림부터 살폈다. 그녀들이 고양이 눈을 뜨고 날 쳐다본다.
얼굴이 따가워지는 시선이다.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루리야, 방금 유정이한테 뭐라, 뭐라 그랬어?”
“응?”
루리가 한유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지아랑 예림이는 TV에 나오는데 엄마는 왜 안 나오냐고…….”
엄마?
유정이가?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는데 한유정이 팔을 뻗는다. 그녀가 루리를 양손으로 안아 들고 웃었다.
“나도 나올 거야.”
훈련장에서 한유정이 훈련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거 몇 컷 내보내기로 약속돼 있었다. 다음 주에 조금 나오기는 할 거다.
아무래도 예고편에 넣을 만큼의 화제성은 부족해서 생략된 모양이다. 반색한 루리가 와아, 팔다리를 허우적댄다.
“엄마, 나도 TV 나갈 수 있어?”
“TV에 나오고 싶어?”
“응.”
“저건 이미 찍어놓은 거라 안될 거 같은데.”
아이가 시무룩해 하자 한유정이 핸드폰을 꺼냈다.
“동영상 찍어서 우리끼리 볼까?”
“그럴래.”
뭐지?
나보다 애를 더 잘 다루는 거 같은데. 저거 지금 즉석에서 나온 애드리브 맞나?
요즘 루리와 한유정이 착 달라붙어 다니던 게 떠올랐다.
괴팍하고 겁 없어 보여도 결국 6살짜리 애다. 원래 살던 곳보다 집은 당연히 더 비싸고 좋았지만,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다.
한예림은 따로 살고 있어서 루리랑 얼굴 마주치는 건 이번이 고작 두 번째고, 이지아랑 나도 일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다.
게이트가 끝난 뒤에 혼자 살아남기 스튜디오 촬영이 있었고, 나는 처음 맡게 된 프로젝트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바빴으니까.
결국 애들한테 흔히 하는 변명일 뿐이었다.
집에 성인이 두 명이나 있는데, 오직 한유정만 틈틈이 루리를 돌봐줬다.
잘 때는 같은 침대에서 함께 누웠고, 강아지처럼 날뛰는 루리를 붙잡고 한 시간씩 씻겼으며, 방에서 뭔가를 항상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루리가 한유정을 따르는 게 썩 어색하진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엄마라고 부르는 것도.
애한테는 나나, 한유정이나, 이지아나, 한예림이나 똑같은 어른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7살짜리 애한테 지금….
괴상한 춤을 추며 달려 나가는 루리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루리야.”
“응?”
“유정이한테 엄마라 부르면 안 돼. 언니라고 해야지.”
나야 밖에서 아빠라 불리면 수습 가능했다.
어차피 매니저고, 나이 차를 생각하면 고작 해봐야 일찍 사고 쳤다 정도로 받아들일 테니까.
그것도 아니라고 오해를 풀면 가벼운 헤프닝으로 끝난다.
그런데 한유정은 조금 쑥스러운 오해를 받는 정도가 아니다.
여자인 점도 있고, 거기에 나이까지 생각하면 이건 뭐 걸어 다니는 루머 제조기였다.
여기에 나랑 한유정이 같이 다닐 때가 제일 문제다.
스물여섯과 열일곱이라는 나이 차이. 거기에 매니저와 헌터라는 직함이 추가되면…….
진짜 뒷감당 안 된다.
루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지아랑 예림이도 언니인데, 엄마도 언니야?”
고갤 끄덕였다.
“어.”
“아잇, 그런 게 어딨어? 그리고 엄마가 분명….”
루리가 칭얼거린다. 한유정이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루리가 엄마라고 부르고 싶다길래 제가 그러라고 했어요.”
“루리가?”
단호한 목소리가 대답한다.
“네, 루리가 먼저 물었어요. 그치, 루리야?”
루리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퍼덕퍼덕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정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까, 애가 애정이 많이 고픈듯했다. 한유정도 비슷한 처지라서 둘이 공감대 느끼기도 쉬웠을 거고.
머리를 긁적이며 경고했다.
“그래도 밖에서는 조심해. 유정이한테 괜히 이상한 소문 꼬인다. 알겠지?”
루리가 힐끔 한유정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고갤 끄덕였다.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괜히 이상한 입버릇 붙어서 밖에서까지 그러면 큰일 날 텐데.
헛기침하며 일어났다. 시선이 따라붙는다. 삐걱대는 다리를 움직였다.
“들었지? 이상한 거 아니야.”
이지아와 한예림이 고갤 끄덕인다. 얘네도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
머리가 멍했다.
시큼한 눈가를 주무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방송이 성황리에 끝나고 어제는 우리들끼리 간단한 축하를 나눴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썩 재밌는 자리는 아니었을 거다. 나나 한예림이야 필요할 때만 술 마시는 거지 좋아하는 건 아니었고, 이지아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한유정이나 루리야 말할 것도 없다. 둘이 익숙하게 술잔에 손을 뻗으면 기분이 좀 싱숭생숭할 거다.
콜라 네 캔과 요구르트 한 병이 오간 회식은 밤이 늦기도 전에 끝났다.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지난 밤의 뉴스부터 확인했다.
[‘혼자 살아남기’ 평균 시청률 15% 돌파! S급 헌터 이지아의 반전 매력!]
뉴스 기사 반응은 좋았다.
이지아야 지금 게이트 건으로 한창 주가를 갱신 중이었다. 기자들이 쓸데없는 기사로 어그로 끄는 일은 없었다.
프로그램 시청률도 제법 선방한 모양이고, 기존 시청자들에게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커뮤니티나 기사 댓글 반응들도 전부 호의적이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 것들이 있었다.
이지아가 10년간의 신비주의를 깨고 예능에 나왔고, 기자의 말처럼 평소 이미지와 다른 반전 매력을 제대로 보여줬으며, 최근 연예인들의 가식적인 ‘꾸미기 방송’과 정반대였던 모습들이 원인으로 꼽혔다.
재미야 개그맨들이 나와서 떠드는 것보다 재밌을 수는 없겠지만, 화제성과 이미지는 제대로 챙긴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존재했다.
바로 나였다.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던 방송이 나랑 엮이면서 색채가 더해졌다고.
물론 방송이 끝난뒤 내 이름도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살아남기는 평균 시청률 10%짜리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거기에 30분을 넘게 출연했는데 당연했다.
최 작가에게 방송 출연할 의사 없냐고 들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결심한 바였다.
그런데 공중파 예능의 여파가 이 정도일 줄 상상도 못 했다. 어제 시도 때도 없이 울리길래 꺼놓은 핸드폰을 다시 켰다.
우웅! 우우웅!
까톡! 까톡!
진동과 함께 메시지가 미친 듯이 도착했다.
[창식이형: 야, 인마! 뭐야 인마! 방송 나온다는 말 없었잖아!]
[박지영: 오빠, 혹시 촬영장에서 김서준 만났어요? 촬영 또 있으면 저 싸인 좀 받아주면 안 돼요?]
[조정빈 기자: 현우 씨! 다음 주 방송 떡밥 좀 주세요!! 제발!!]
알림창에 빨간색 숫자들이 어지럽게 떠 있었다.
온갖 안부 인사들이 왔었다.
얼굴을 쓸어내리며 핸드폰을 다시 꺼버렸다.
저거 일일이 답장해줄 생각 하면 속만 쓰리다. 나중에 핸드폰 꺼놔서 미안하다고 한꺼번에 보내야지.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6시. 출근 준비해야 한다.
치약 짠 칫솔을 입에 물고 거실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갔다. 오늘 아침에 카레 만들려고 해동시켜놓은 고기 먼저 확인하고, 유정이 반찬 차려줘야 한다.
일단 찬거리들부터 먼저 꺼내놓자.
칫솔로 이를 구석구석 닦으며 테이블에 도착했을 때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냉장고 문이 열려있었다.
뭐지?
입에서 칫솔을 떼고 물었다.
“거기 누구…….”
그리고 당황해서 말을 멈췄다.
쪼그려 앉아있던 이지아랑 한예림과 눈을 마주쳤다. 놀란 그녀들이 원래 있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에 각자 초콜릿을 하나씩 쥐고는 루리의 입에 물려주고 있었다.
가운데에 앉은 루리가 얼큰하게 취한 상태로 양쪽 초콜릿들을 번갈아 가며 쪽쪽 빤다.
마시고 남은 요구르트병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그러니까, 여러모로 개판인 상황이었다.
날 뒤늦게 발견한 루리가 초콜릿이 찐득하게 붙은 볼로 활짝 웃었다. 아이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아빠, 언니들이 나 초콜릿 줬어.”
*
한유정과 함께 차에서 내려 회사로 걸어가는데, 불어오는 바람에 눈이 시리다.
어쩐지 올해는 유난히도 여름이 길더라니 하룻밤 사이에 겨울로 넘어갔다. 옷깃을 여미다가 문득 오늘 팀장 회의가 있던 게 떠올랐다.
서로 안면 트라고 마련한 자리다.
회사 밖으로 워낙 싸돌아다녀 아직 인사 한번 제대로 못 나눴다. 나는 말만 팀장이지 실상은 로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회사도 점점 구색을 갖춰가고 있었다.
홍보팀, 운영팀, 분석팀 등 길드 운영에 필수적인 팀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잡았고, 한예림과 송 팀장이 몽땅 맡아서 하던 업무들도 각 팀에 분담됐다.
그래봤자 아직 헌터들이 부족해서 홍보팀은 손가락만 빠는 입장이었고, 외부에서 헌터들 빼 온다고 분석팀이랑 운영팀만 미치도록 구를 뿐이었다.
잠깐 문고리를 잡고 고민했다.
그래도 팀장 중 내가 제일 막낸데, 알아서 커피 챙겨가는 게 낫겠지?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한유정이 멈춰서서 날 쳐다보고 있다.
“유정아, 먼저 올라가 있어.”
“네? 아저씨는 어디 가세요?”
“커피 좀 사 가려고.”
“손 안 모자라세요?”
어디 보자.
한예림, 나, 송 팀장, 홍보팀장, 운영팀장, 분석팀장.
이렇게만 챙겨가면 정 없으니까 이지아, 한유정 마실 것도 주문하고.
나예정, 이지혜… 탕비실 커피나 알아서 챙겨 먹으라 하고.
총 8개니까 상자에 4개씩 끼우면 양손으로 딱 맞춰서 들 수 있다.
“손 안 모자라겠는데? 괜찮아.”
한유정이 옆으로 붙는다.
“저도 갈래요.”
“어, 그래? 그럼 디저트도 사줄까?”
“네.”
핸드폰을 꺼내 메신저에 들어갔다.
커피 사 갈 테니까 마시고 싶은 것 좀 물어봐달라는 내용을 공손하게 작성해서 송 팀장에게 전송했다.
카페에서 주문까지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시계를 확인했다. 8시 20분이다.
근처에 회사 건물이 많아서 그런지, 목에 사원증 걸고 있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한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싱긋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음, 또 거북한 시선이 쏠린다.
주위에 사옥들이 워낙 많아 이쪽 길가를 걷는 사람은 대부분 양복 입은 성인들뿐이다. 그런 곳에 아직 17살인 한유정이 앉아있으니까 눈에 띄는 거다.
그것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성인 남자하고 나란히 앉아서 하하호호 떠들면 시선이 갈만하지.
오늘도 오해가 차곡차곡 쌓인다.
이젠 익숙해져서 낯간지럽지도 않다. 한유정이랑 같이 다니면 맨날 이런다. 어느 정도 단련됐나보다.
주위 눈치 때문에 다급히 자리 피하던 게 엊그제 일 같은데, 두껍던 낯짝이 더 두꺼워졌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
뭐지?
분명 쏠리는 시선들이 평소와 같은데, 평소와는 다르다.
사람들이 긴가민가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고, 나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핸드폰을 쳐다보고, 내 얼굴 또 보고.
나는 이게 한유정과 함께 있어서 구경거리가 된 게 아니란 사실을 슬슬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들의 눈에 깃든건 명백히 호기심이었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 사람, 혼자 살아남기에 출연한 매니저 같은데. 맞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