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89화 (89/112)

〈 89화 〉 나의 아저씨 (2)

* * *

“저 사람, 혼자 살아남기에 출연한 매니저 같은데. 맞지?”

사람들이 왜 날 쳐다보는지 이제 알겠다.

혼자 살아남기 평균 시청률이 15%가 나왔다. 여기에 이지아가 처음 나온 예능이라 화제성이 어마무시했다.

벌써 인터넷에는 사진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좋은 일이다.

커뮤니티에 퍼지면 퍼질수록 이지아에 대한 기존 이미지가 많이 희석될 거다.

분명 좋은 일인데,

웅성웅성.

“맞다, 근처에 길드 사옥 있었지?”

“같이 있는 사람 누구야.”

“담당 헌터겠지.”

“이지아 매니저 아니었어?”

시선이 쏠려도 너무 쏠린다.

그 와중에 매니저라고 이상한 오해는 안 받는다.

직업이란 게 이래서 무시 못 한다.

팔짱을 끼고 커피만 나오길 기다렸다.

출근 시간대라 사람들도 많고, 한꺼번에 8잔이나 주문해서 그런지 아직 한참 남은 거 같다.

한유정은 그냥 평소랑 다른 게 없었다. 테이블에 팔을 걸친 채 핸드폰 게임을 한다.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럽지도 않나 보다.

우우웅!

진동벨이 울렸다. 재빨리 커피와 디저트를 받아 밖으로 나갔다. 당분간 선글라스라도 끼고 다니든가 해야지, 이거 안 되겠다.

한참 동안 말없이 길을 걷는데,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한유정이 촉촉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저씨, 저 라이센스 나왔어요.”

“라이센스?”

“네, 헌터 자격증이요.”

어?

그거 드디어 나왔구나.

합격이야 당연히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헌터 자격증이 나오지 않은 한유정은 여태껏 일반인 신분이었다.

하지만 자격증을 수령한 순간부터 헌터에 관련한 모든 행위가 합법적으로 변한다.

마석을 판매하는 거로 수익을 얻을 수 있고, 헌터 마켓을 이용할 수 있는 고객이 됐으며, 길드에도 드디어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즉, 이제 한유정은 진짜로 헌터가 된 거다.

그동안의 여정을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다 나온다.

나야 뭐, 고생한 건 없지만.

한유정이 고생한 거 옆에서 전부 지켜봤으니까.

“유정아, 나 자격증 좀 보여줘.”

부탁하니까 냉큼 건네준다.

프로필 사진도 예쁘게 잘 찍혔고, 카드도 어디 흠집 하나 없이 나온 게 마음에 쏙 들었다.

흐뭇하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한유정이 3층과 7층 버튼을 따닥 눌렀다.

그리고 날 빤히 쳐다본다.

“저도 이제 헌터 자격증 나왔어요.”

“응?”

“저는 헌터고, 아저씨는 제 매니저잖아요.”

“그치.”

“본격적으로 던전에 들어가고 하면 많이 바빠지는 거죠? 아저씨나 저나.”

아까부터 뭔 말하려고 이렇게 뜸 들이며 묻는 거지?

“전에 예림이 언니가 전작시 내보낸다고 한 거요.”

“아, 그거?”

방송 반응 좋으니까 전작시 피디한테 전화 와서 출연 요청했었다. 한예림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모양이고.

“앞으로 많이 바쁘신 거잖아요.”

한유정이 살짝 토라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젠 아줌마랑 방송 나가시면 안 돼요. 아셨죠?”

* * *

미치겠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한유정 한 명만 맡을 때는 몰랐다. 사실 담당했다고 말하기도 창피한 수준이었다.

아직 유망주 신분이라 본격적인 일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까. 거의 운전수 역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일주일 동안 이지아를 담당하니까 뭔 놈의 일이 이렇게 많은 건지, 이제야 매니저들이 왜 갈려 나간다고 표현하는지 알 거만 같았다.

기획안 준비해서 교양국 CP랑 미팅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야 한다. 여기에 한유정 일도 따로 준비할 것들이 넘쳐났다.

일, 일, 일.

일이 끝나지 않는다.

커피가 필요했다.

탕비실에서 종이컵을 휘휘 젓는데 한예림과 마주쳤다. 그녀가 내 얼굴을 보고는 마구 웃는다.

“김현우, 너도 이제 매니저 다 됐구나?”

“뭐가?”

“원래 정장 입은 게 엄청 안 어울렸거든. 사회 초년생들이 입으면 꼭 안 맞는 옷 억지로 입은 거 같잖아.”

“왜? 지금은 어울려?”

“응, 엄청.”

한예림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사진을 내게 보여준다.

다크서클이 언제 이렇게 내려왔었지?

웬 환자 하나가 커피를 휘휘 젓고 있었다.

한예림이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처음엔 힘들거든? 이게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서 효율적으로 처리하게 돼. 밑에 사람들도 하나둘씩 들어오고. 그럼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삶에 여유가 좀 생기나?”

그녀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내 기대를 무참히 짓밟는다.

“아니, 위에서 일감을 더 줘. 마른오징어 쥐어짜는 거지. 어떻게든 물기가 나오거든.”

“안 그럴 거지?”

“회사에서 거는 기대가 많습니다.”

아하하, 기계적으로 웃었다.

어서 하던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한예림이 불쑥 묻는다.

“유정이 문제는 어떻게 됐어?”

“응?”

“전에 말했잖아. 유정이 계약서 도장 찍어야 한다고. 이제 슬슬 헌터 자격증 나올 때 됐는데, 후견인이든 뭐든 끝내놔야지.”

벌써 마른오징어 쥐어짜는 건가.

“이야기 중이야.”

“그것도 빨리 부탁해. 남은 일이 많아.”

한예림이 내 등을 팡팡 두들기고는 떠났다. 종이컵을 입에 물고 컴퓨터 책상에 앉았다.

타닥, 타닥.

기획안을 작성하는데 머릿속에 자꾸 한유정의 문제가 맴돈다.

보호자의 동의가 없는 미성년자 사인은 아무런 법적 효력도 없다. 물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조금 치사하고 정 없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한유정이 보호자에게 동의를 받았다고 회사를 속이면 된다.

그러니까, ‘속이는 척’과 ‘속은 척’을 하면 된다.

­한유정이 회사를 속여서 계약했고, 회사는 이에 대해 몰랐다.

이런 내용을 우리 쪽에서 준비해놓으면 계약이 무효가 되진 않는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뭐 하는 짓이야?

굳이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한유정의 현재 나이는 17살이다. 앞으로 일하면서 도장 찍을 일은 수십번도 더 있었다.

그때마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호자의 동의든, 후견인을 나로 옮기든 간에 법적 준비를 끝내놔야만 한다.

한예림이 내게 어려운 부탁을 한 건 아니다.

한유정의 후견인은 현재 삼촌으로 돼 있었다.

쉬운 일이다.

삼촌을 찾아간다.

그리고 유정이가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사인해달라고하면 된다.

이지아의 뒤를 잇는 유망주다. 한유정에게 얼마만큼의 재능이 있고, 전망이 있는지 알려주면 흔쾌히 사인해줄 게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몇 가지 눈에 밟히는 것들이 계속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핸드폰을 꺼내 조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우 씨?

“아, 조 기자님. 통화되세요?

­어우, 현우 씨하고 통화하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데 없는 시간도 내야죠. 무슨 일 있어요? 혹시 게이트 인터뷰…?

은근한 기대감이 담긴 목소리였다.

이지아와 내가 친한 걸 알고 있어서 몇 번씩이나 기프티콘을 보내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드릴 거요?

“네.”

조 기자에게 몇 가지 큰 도움을 줬었다. 펑크날뻔한 잡지 기획에 한유정을 넣어줬고, 자길 엿먹인 송 팀장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헌터 시험 로비 건을 알려줬다.

그걸로 두 번까지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었다.

“파파라치가 특기라고 하셨죠? 사람 뒷조사 좀 해주세요.”

* * *

방송국 남자 화장실.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온 남자 둘이 양치질을 하고 있었다. 게이트 발발 일주일째. 방송국 일이야 항상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요즘은 유독 심했다.

이미 편성해놓은 예능, 드라마들 싹 다 갈아엎고 그 자리를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이 차지했다.

예능국, 드라마국이야 쉬게 됐지만 보도국과 교양국은 사람 갈려 나가기 딱 좋은 시기였다.

세수까지 마친 남자가 까슬까슬하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형, 이번에 교양국 해체한다는 거 진짜예요?”

“엥? 그건 어디서 들었어.”

“교양국에 동기 한 명 있는데 나가리됐다고 저한테 하소연하던데요? 예능국으로 합쳐진다면서.”

선배가 어깰 으쓱였다.

이전부터 귀 좀 밝은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 예상하던 결과였다.

“교양국 해체되는 거야 어쩔 수 없지.”

“네? 왜요.”

“별거 있냐? 경영진들이 시청률이 안 나온다 싶으니까 수순 밟는 거야. 저것도 오래 버텼어.”

“아무리 그래도 공영방송국인데 교양국을….”

후배의 혼잣말에 선배가 코웃음 쳤다.

“추세가 그래, 추세가. 요즘 누가 교양, 시사 프로그램 보고 다녀? 교양국 피디 안 뽑은 지 벌써 꽤 됐어.”

“위에서 지원을 줄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예능과 드라마의 시청률도 하향 곡선을 그리는 세상에 교양 프로그램이 설 자리는 없었다.

교양국에 신입사원을 안 뽑은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폐지는 예정된 수순이었고, 때가 다가왔을 뿐이다.

“성과 못 내면 꼽먹고, 실적 딸리고 제작비 본전 못 치면 뒤지는 거지.”

피디들이 시청률에 목숨 거는 이유였다.

후배가 뜸 들이며 물었다.

“교양국 CP 있잖아요.”

“CP가 한 명이냐? 누구?”

“유 부장이요.”

교양국 CP 유 부장.

성격 괴팍하고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인간이었다.

“아, 유 부장? 그 양반이 왜?”

“인사이동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전에 고발 프로그램으로 예능국 전임 국장 찔러서 옷 벗겼었잖아요. 신임 국장이 이 갈고 있을 텐데.”

“뭐 어쩌겠어? 낙동강 오리알 된 거고, 그동안 뿌린 씨앗 거두는 거지. 그 양반 이제 좆됐어.”

덜컹!

화장실 변기 칸이 열렸다.

중년 남자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왔다.

세면대에서 대화 나누던 선배와 후배가 조금 피로한 직장인 수준이었다면, 중년 남자는 순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낙동강 오리알은 니미 시발, 예능국 가서 너랑 따까리 짓 같이 하느니 쪽팔려서 옷 벗고 나갈 거다. 좆같은 새끼야.”

“누군데 일하는 곳에서 시발시발거려? 나는 욕 못하는 줄…….”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보던 선배가 말을 멈췄다. 그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딸꾹질을 했다.

“어, 부장님, 3층 화장실 안 쓰고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미팅 있어서. 씨발놈아. 네가 그렇게 욕을 잘해? 어디 한 번 계급장 떼고 내 면전에다가 욕 박아봐. 나도 시원하게 욕하게.”

선배가 눈을 쓱 내리깔았다.

유 부장이 어깨를 밀치며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가 세면대의 물을 틀고 손을 거칠게 닦았다.

선배의 말대로였다.

교양국은 해체될 예정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오늘 부서 이동을 하기로 돼 있었다. 다만 그게 잠시 보류된 건 철원군에 터진 게이트 때문이다.

교양국 피디들의 일거리가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잠깐의 유예 기간.

실적 얻기 좋은 소재.

국장이고, CP들이고 모두 방송국에서 살다시피 하며 막판 역전을 노리고 있었다.

막말로 이번 인사이동 명령은 그들에게 나가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좌천이 맞았다.

시청률.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오직 시청률뿐이었다.

­교양 프로그램에 시청률을 왜 챙겨? 메시지가 더 중요하지.

평소 교양국 PD라고 뻗대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시청률을 위해서 모든 할 수 있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유 부장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

아침에 일어난 나는 쓰린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에 넣었다. 오늘 교양국 CP와 미팅이 잡혀있었다.

처음 맡은 일인 만큼 긴장이 조금… 사실은 많이 됐다.

거울을 보며 정장을 입는데 여러 가지 걱정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스물여섯짜리 애송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닌가. 길드 규모가 작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건 아닌가.

한예림은 완전 손 놓고 맡긴 상태였다. 보다 못한 송 팀장이 기획안을 검토해주긴 했지만 첫 일이라 자신감이 살짝 부족했다.

정신 차리자.

양 볼을 손바닥으로 짝짝 때렸다.

찌질대는 건 잠깐으로 충분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스마일.

좋아.

미리 복사해놓은 기획안을 가방에 챙겨 넣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회의실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문을 열고 중년 남성이 들어왔다.

교양국 CP였다.

신경질적으로 떡진 머리, 판다처럼 거뭇한 눈가, 주머니에 넣은 두꺼비 같은 손.

젠장, 성질 더러워 보인다.

침을 꿀꺽 삼키는데 교양국 CP가 팔을 뻗었다.

“교양국 CP 유현석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바스타드 소드 매니지먼트 팀장 김현웁니다.”

우리는 가벼운 악수를 하고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기획안을 깔아두고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틀어줬다.

그리고 교양국 CP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제야 오셨어요, 선생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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