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90화 (90/112)

〈 90화 〉 나의 아저씨 (3)

* * *

교양국 CP에게 와락 안긴 채로 생각했다.

이 양반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당황한 내가 CP의 실수를 지적했다.

“아직 기획안도 확인 안 하셨는데요.”

이제 막 기획안을 보여주려는 찰나였다.

“굳이 기획안 보고 오케이 외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CP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내 등을 마구 두들겼다.

나이에 맞지 않게 팔심이 장난 아니다. 잔기침을 쿨럭이며 따라 웃었다.

내 성취감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복잡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기획안을 펼쳤다. 일단 교양국 CP 입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온 것과 별개로, 구체적인 촬영 기획을 짜야 하니까.

여러 가지로 상의할 것들이 많았다.

이만한 소재를 거절할 거라고는 당연히 상상도 안 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들은, 그거였다.

몇 가지 조건들을 욱여넣어야 한다.

나는 지금 협상 자리에 앉은 거다.

최대한 판돈을 끌어올리고, 우리 길드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방송국 생활을 시작한 사람 상대로.

속이 쓰려온다.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바스타드 쪽에서 원하는 건 게이트 내부의 진실을 밝히는 역사적 소명, 그런 게 아닙니다. S급 헌터 이지아와 바스타드 길드의 이미지를 챙기는 방향으로 가길 원합니다.”

“음.”

CP의 얼굴이 살짝 애매해진다.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즉, 화제성을 우선시해야 되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흥미와 시청률을 높이는 쪽으로…….”

CP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린다.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거, 마음에 드네. 좋습니다!!”

응?

아, 시청률.

피디들이 시청률에 환장한다더니, 방금 한 말이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혼자 살아남기 팀에 최수정 작가라는 분이 계십니다. 게이트 내부를 촬영할 때 협조를 받았는데, 그 조건으로 메인 작가에 꽂아주기로 했습니다.”

“예능 작가?”

CP의 미소가 더욱더 깊어진다. 그가 흥분해서 책상을 내려쳤다.

“거, 좋소! 자극적으로 방송 잘하겠네.”

이거 시발 진짜 괜찮은 건가.

피디들 입장에서는 자기한테 잘 맞는 작가들이 이미 한 명씩 있을 터다.

그런데 교양국에서 구르던 것도 아닌 예능국.

그것도 4년 차 짜리 보조 작가를 메인 작가로 꽂아 넣어 달란다.

여기서 당연히 한 번 크게 부딪힐 거라 생각했다.

게이트에서 나랑 이지아뿐이라면 이번 기획은 시작도 못 했다. 마지막에 나선 최 작가의 도움이 컸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조금 포기하더라도 이것만큼은 어떻게든 넣어주려고 했는데.

걱정한 게 무색했다.

상황이 자꾸만 편의주의적으로 흘러갔다.

CP가 기획안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그래서, 바스타드 쪽에서 생각하는 프로그램 편성이나 컨셉은 어때요?”

“현재 게이트가 터진 지 고작 일주일 지났습니다. 천 명이라는 인명피해가 있던 만큼 화제성이 빠르게 묻히지는…….”

말하다가 갑자기 목구멍에 말문이 턱 막혔다.

사람 목숨을 두고 화제성 운운하는 게 꼭 장사꾼이 된 거 같았다.

아니, 그게 맞았다.

CP가 의아하게 묻는다.

“말씀하다 말고 왜 그러세요?”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잠깐 가스 불이 생각나서.”

난 이제 헌터 지망생이 아니라 매니저다.

늘 그렇듯, 감정적인 문제는 일단 덮어놨다. 자아 성찰은 뒤늦게 해도 때늦지 않는 법이다.

흐트러진 정장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4회 편성으로 2주 봤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인 기획이야 방송국 PD 역할이지만, 홍보 목적에 맞췄으면 좋겠네요.”

CP가 인상을 찡그리며 엉겨 붙은 머리를 긁적인다.

“4회 방영으로 2주요?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화제성은 떨어진다. 당연했다. 거기에 4회 방영분을 내놓는 건 제법 기간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CP랑 피디가 방송 기획 짜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마치고, 그걸 전부 편집해서 내보내고, 방영하는 시간도 포함해야 하니까.

간단했다.

“촬영이랑 방영을 동시에 진행하시죠. 쪽대본으로 가면 제법 시간은 촉박해도 때는 맞추지 않겠습니까?”

“거, 좋습니다.”

제작비.

협찬이 필요한 범위는 전부 우리가 부담하기로 했다.

시간.

촬영이랑 방영 동시 진행한다.

시청률과 화제성.

이거보다 더 좋은 조건을 찾을 수가 없다.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하나만 빼면.

CP가 턱을 괴고 테이블을 톡톡 두들긴다. 그의 눈이 핸드폰 속 영상에 고정됐다. 고민하듯 찌푸려진 미간이 보기 괴로웠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눈치챈 거 같다.

“팀장님, 이거 영상 말입니다. 제가 아까부터 계속 거슬리는 게 있는데.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죠?”

“말씀하시죠.”

“게이트 내부에서 찍은 거. 혼자 살아남기 촬영 중에 들어간 거죠?”

“네.”

“그럼 촬영은 최수정 작가라는 사람이 했고, 카메라도 방송국 장비 쓰신 거네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전투태세를 가다듬었다.

이게 진짜 난관이었다.

회사원의 업무 결과는 당연하지만 회사에 귀속된다.

방송국도 다를 건 없었다.

최 작가야 프리랜서지만 엄연히 혼자 살아남기 촬영 중이었고, 카메라도 방송국 장비였다.

당연히 이 영상도 방송국 것이 맞았다.

저쪽에서 우리 쳐내고 혼자 작업하고 싶다면 맞불 놓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찍힌 건 결국 나랑 이지아였고, 방송 자료로 쓰고 싶으면 우리랑 제작해야 한다. 안되면 자료 싹 다 폐기할 거다.

그렇게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CP가 한참동안 고민하더니, 느슨한 입꼬리를 열었다.

“어차피 같이 작업할 건데 서로 힘 빼지 말죠.”

“네?”

“이번에 교양국 폐지될 예정이거든요. 이것저것 뭐 복잡한데, 저희가 예능국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 엄청.”

그리고 혼자 살아남기 팀은 예능국 소속이었고, 이 동영상의 출처가 알려지면 득 보는 쪽이 어딘지는 명확했다.

CP가 피식 웃었다.

“그냥 묻어두고 넘어갑시다. 이쪽에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다큐멘터리 제작이 결정 났다.

뒤끝 없이 깔끔하게.

*

회의실 문을 닫고 나가는데 구석탱이에서 빼꼼 튀어나온 머리카락이 보인다.

최 작가였다.

그녀가 주위 눈치를 살피더니 사사삭 바퀴벌레처럼 기어 왔다.

“팀장님, 안에서 이야기 잘 됐어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뭐 하세요?”

“주변에 혼자 살아남기 제작진들 있나 확인하는 거예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거든요. 피디님한테 배신자 취급 받을 거 뻔해서.”

하긴, 교양국 CP 말 들어보니까 서로 불구대천지원수던데.

말하기 부담스러울 거다.

계속 주변 눈치를 살피는 최 작가를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올라가는 입가를 엄지로 꾹 누르며 말했다.

“그럼 안 되는데.”

“네?”

“그쪽 분들한테도 미리 말씀해놓으셔야죠.”

최 작가가 작은 목소리로 성을 냈다.

“그러다가 만약 프로젝트 엎어지면 저 밉보이고 끈 떨어진 연 신세…….”

“이제 다큐멘터리 메인 작가신데.”

“…네?”

화면이 멈췄나?

굳어있는 최 작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 정신 못 차리는 모양이다.

“축하해요, 작가님. 다큐멘터리 제작 결정 났어요. 오늘부터 CP님하고 바로 기획 들어갈 겁니다. 연락처 드렸으니까 전화 곧 올 거예요.”

띠리링!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말이 끝나자마자 최 작가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그녀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꺄악! 고마워요, 팀장님!”

어째 오늘따라 안기는 일이 많다.

*

다큐멘터리 제작 건은 이제 시위를 떠났다. 나머지는 CP와 최 작가가 맡아서 할 일이고,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 며칠의 여유가 생겼다.

다행이다. 처리할 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다가 익숙한 등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췄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포장마차.

그 앞에 한유정이 입김을 호호 불며 오뎅 꼬치를 먹고 있었다.

“유정아, 거기서 뭐 해?”

한유정이 반가운 얼굴을 한다.

“훈련 끝나고 점심 먹고 있었어요.”

“점심?”

빈 꼬치가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거 하나밖에 없는데? 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빈약했다. 눈을 게슴츠레 뜨며 추궁했다.

“너 또 용돈 다 떨어졌지?”

“어, 네.”

한유정이 어색하게 웃는다.

진짜 모르겠네. 씀씀이가 헤픈 애도 아닌데, 대체 내가 주는 용돈들은 다 어디 가는 거지?

혹시 모자라나 싶어서 벌써 몇 번이나 금액을 올려줬다. 나중에 돈 벌면 그때 갚으라는 말과 함께.

17살짜리 여자애가 흥청망청 쓴다고 해봤자다. 떡볶이나 튀김까지는 충분히 먹을만할 텐데.

“사장님, 여기 떡볶이 1인분… 잠깐만요. 유정아, 얼마나 먹을래?”

“……이, 이인분이요.”

“2인분 주세요.”

“아저씨는 안 드세요?”

“정장 입어서. 조금 이따가 사람 만나러 가야 하거든.”

떡볶이 먹다가 소맷자락에 빨간 국물이라도 튀면은….

으, 끔찍해.

색깔 있는 건 안 먹는 게 속 편하다.

한유정이랑 어깨를 붙이고 나란히 서 있는데, 찬바람에 다리가 시렸다.

떡볶이 대신에 오뎅 꼬치나 몇 개 빼서 입에 물었다.

둘 다 말없이 오뎅이랑 떡볶이만 주워 먹었다. 남들이 보면 좀 서먹서먹하게 보일 정도로 건조했다.

그런데 그냥, 한유정하고는 이게 편했다. 굳이 애써서 열심히 떠들지 않아도 어색하지가 않았다.

꼬치를 내려놓으며 옆을 봤다. 그릇이 빈걸 보니까 한유정도 다 먹은 것 같다.

먼저 계산하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입김이 길쭉하게 뻗어 나가는 게 이젠 완연한 겨울이다. 찬 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는데 한유정이 조금 뒤늦게 종이컵을 쥐고 밖으로 나온다.

뭔가 했더니 오뎅 국물이다.

소중하게 양손으로 꽈악 쥐고 한 모금씩 후루룩 마신다. 그대로 우리는 걸었다.

“유정아, 예림이가 건넨 계약서는 충분히 읽어봤어?”

“네.”

“전에 소개해준 박 변호사한테 검토도 받았지?”

“변호사님이 신인한테는 엄청 좋은 조건이래요.”

“불공정 조항은?”

“몇 가지 있긴 한데 업계 관행이라 어쩔 수 없대요.”

“계약을 해지하려면?”

“남은 계약 기간까지의 계약금을 전부 위약금으로 물어야 해요.”

한예림이 설마 계약서로 장난질 치고 그러진 않았겠지만, 하나씩 짚어주며 한유정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려줬다.

그러니까, 혼자 똑바로 서기 위한 교육이다.

이런 건 직접 해봐야 아는 거니까.

다행히 전부 똑 부러지게 잘 처리해놨다.

웃으며 한유정의 머리를 정리해줬다. 훈련하다 와서인지 조금 뻗쳐있었다.

“계약서는 내가 다시 확인해볼게.”

“아저씨만 믿을게요.”

“너무 덮어놓고 믿진 말고.”

한유정이 회사에 올라가는 걸 지켜보다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띠리링!

안주머니에서 전화를 꺼내 번호를 확인했다.

조 기자였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조 기자님.”

­현우 씨, 전에 부탁하신 거 처리해드렸는데요. 서류는 팩스로 보내드릴까요?

“아뇨, 핸드폰으로 보내주세요. 따로 하시는 일도 있는데 고생 많으셨어요.”

­어우, 뭘요. 혹시 저한테 미안하세요?

“음, 살짝요?”

­그럼 인터뷰나 한 번 해주세요. 요즘 인기 많으시던데. 이지아 씨도 넣어주시면 더 좋고.

아하하, 웃었다.

이젠 나도 나름 유명하긴 하지.

선글라스를 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그래도 거절했다.

“인터뷰는 거절할게요.”

­저희가, 예? 그래도, 예? 이지아 씨 SNS나 2차 시험 폭로한 거나, 예? 그런 끈끈한 혈맹으로…….

조 기자가 섭섭한지 다다다 말한다.

자동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뭔가 오해하는 거 같아서 일단 말부터 끊었다.

“아직 전부 끝난 게 아니어서요.”

혼자 살아남기는 그러니까, 가벼운 잽 같은 거다.

뎀프시롤이 남았다.

이해하지 못 한 조 기자가 되묻는다.

­네?

“2주 정도 뒤에 더 큰 거 나갈 거예요. 그때 인터뷰해드릴게요.”

­더 큰 거요? 그게 뭐…….

“바빠서 먼저 끊습니다. 서류는 핸드폰으로 보내주세요.”

뚝.

한유정, 삼촌, 계약서, 천살성, 후견인, 부모님.

머리가 복잡했다.

핸드폰이 진동으로 울렸다.

메신저로 꽤 큰 용량의 서류들이 도착해있었다.

탁탁, 검지로 허벅지를 두들기며 하나씩 살폈다. 헝클어진 실타래들이 올곧게 풀어진다.

그래.

그럼 그렇지.

피식 웃으며 백미러를 조정하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내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제 사람 만나러 가야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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