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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93화 (93/112)

〈 93화 〉 나의 아저씨 (6)

* * *

바스타드 길드의 훈련장은 제법 훌륭한 편이었다. 이제 막 출범한 소규모 길드에서 준비할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어지간한 규모의 길드에서도 엄두도 못 내는 게 확장 공사였고, 경영인 입장에서 보자면 전력 유출을 신경 쓸 정도나 되야 겨우 써먹는, 그야말로 돈 지랄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원래 사옥을 쓰던 길드가 투자 실패로 쫄딱 망했기에 차지한 꿀 매물이었다.

그래서 이지혜는 바스타드 길드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규모는 전에 유망주로 있던 길드보다 한참 아래였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악산 길드에도 없었던 사옥 훈련장.

S급 헌터 이지아.

대표는 무려 에이스 길드에서 팀장까지 하다 온 사람이란다. 젊은 나이에 맞지 않게 능력이 좋았다.

가끔 복도에서 마주칠 때면 정장 입은 모습이 그렇게나 멋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송 팀장은 인간적인 매력은 부족해도 업무 파트너로 괜찮은 편이었다.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모든 걸 그저 업무의 일환으로만 여겼다. 뒤끝이 없다는 건 큰 장점이다.

계약 조건도 괜찮았다.

유망주는 나름의 거름망을 통과하고 재능이 입증된 영재였다. 1년간 길드에서 지원을 받고 성장하기에 다른 헌터 지망생들과 차이가 컸다.

그래서 이미 한 차례 헌터 시험에 떨어졌고, 악산 길드에서 내쫓긴 그녀는 길드들에게 전혀 흥미를 끌어낼 수 없는 불량품이었다.

헌터를 꿈꾸는 사람들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 이미 한차례 실패한 인간을 굳이 재활용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던 그녀에게 송 팀장이 찾아와 전부 이해한다는 듯 계약서를 내밀었다.

기존에 있던 길드만큼이나 좋은 조건으로.

김현우, 이지아, 한유정처럼 개국공신 라인까지는 아니어도 아직 한창 성장 중인 초창기였다. 후려치기는커녕 원래의 값어치보다 올려 쳐서 데려가 줬다.

사람 좋고, 계약 조건 좋고, 환경 좋고, 미래에 얼마큼이나 발전할지 모르는 우량 길드였다.

이지혜가 바스타드라는 길드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단 하나만 빼고.

그녀가 땀을 닦으며 한유정을 힐끔거렸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한유정이 구석에서 러닝을 뛰고 있었다. 중량 조끼를 얼마나 무거운 거로 입은 건지, 뛸 때마다 발자국 소리가 쿵쿵 울렸다.

계약서에 혹해 바스타드에 들어왔지만, 한유정이 꺼림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팀은 달라서 업무적으로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일상에서의 이야기다.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헌터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훈련.

한유정도 당연히 훈련장을 찾았다. 사실상 회사에 있는 동안 계속 얼굴을 마주 쳐야 했다.

삐빅! 삐빅!

알람이 울렸다. 이지혜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7:00]

저녁 시간이었다.

엉거주춤 일어나던 이지혜가 한유정과 눈을 마주쳤다. 한유정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저녁 먹으러 가?”

“어? 어어.”

“같이 가자.”

이지혜가 떨떠름히 고갤 끄덕였다.

아마 가장 오래 한유정과 마주친 사람은 이지혜 그녀일 거다. 썩 좋지 않은 인연이었어도 나름 중학교 3년을 같은 학교에서 다녔으니까.

한유정이 새끼오리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김현우는 만난 지 고작 1년 안팎인 모양이고, 이지아랑은 서먹서먹하게 지내는 거 같았다.

그러니까, 한유정의 현재 모습이 미치도록 이질적인 걸 이지혜만 알았다. 1년 만에 만난 그녀는 사람이 어딘가 확 변해 있었다.

이지혜와 한유정은 회사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지혜가 입술을 우물거렸다.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계속 따지고 싶은 게 있었다. 여태까지는 함부로 말 걸기도 무서워서 참고 있었지만, 사람이란 게 시간이 지나면 감정이 희석되는 구석이 있었다. 공포, 좌절, 질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녀가 물었다.

“야, 한유정. 너 왜 자꾸 나한테 친한 척 해?”

어휘와 문장이 나이에 맞지 않게 유치한 건 그녀도 알았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험 칠 때는 사람 죽일 듯이 쫓아다니며 방해하더니. 같이 밥 먹자는 거 좀 우습지 않아? 예정 언니가 너 때문에 맨날 나랑 밥 안 먹고 도망가잖아!”

서로 굳이 말은 안 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알아봤다.

나예정도 한유정한테 크게 한 번 데인 게 분명했다.

한유정이 대답했다.

“친하게 지내려고.”

“대체 나랑 왜?”

“친하게 지내라고 하셔서.”

“뭐?”

이지혜가 한유정을 노려봤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대화가 평행선을 달렸다.

편의점에 들어간 이지혜는 이것저것 골랐다. 이제 10명이 갓 넘은 회사라 단체 급식은 머나먼 일이었다. 통장에 꽂히는 식비로 끼니를 해결했다.

계산을 하고 편의점 테이블에 앉은 이지혜가 도시락을 깠다. 그녀가 막 젓가락질을 하려던 찰나였다. 한유정이 삼각김밥 하나만 딸랑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이지혜가 깔아놓은 도시락과 라면, 음료수들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대비되는 밥상이었다.

이지혜는 한유정이 하나도, 정말 진심으로 하나도 걱정이 안 됐지만, 그것과 궁금한 건 별개였다.

“……너 돈 많이 벌지 않아?”

“응?”

“헌터 시험 1위잖아. 그 정도 위치면은 회사에서 챙겨주는 것도 많을 텐데.”

일례로 이지아가 그랬다.

대부분의 S급들이 헌터 시험 때부터 두각을 드러냈고,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유망주 시절의 이지아에 비해 한유정의 급이 딸리지는 않았다. 3차 시험 기록을 갈아엎은 걸 언급하자면 더 대단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스타드 소드라는 길드의 규모를 생각하면 한유정은 슈퍼 을이었다.

사실 어딜 가더라도 마찬가지였다.

한유정은 자기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아직 계약서 안 썼어.”

“아직도? 1차 시험이 몇 달 전이었는데 무슨…….”

말끝을 흐리던 이지혜가 작게 미소지었다.

좋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소위 말하는 ‘공갈’을 치기 위해 혓바닥에 기름칠부터 했다.

“미래 S급 헌터가 될 인재가, 먹는 게 이게 뭐야? 너무 부실하네. 잠깐만 있어 봐.”

편의점에 들어간 이지혜가 도시락과 음료수, 과자와 라면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

테이블에 올려놓자 시야를 가릴 정도로 산처럼 쌓였다. 한유정이 멍하니 꼭대기를 바라봤다. 데굴데굴 굴러떨어진 김밥이 손으로 쏙 들어왔다.

이지혜가 간신배처럼 손을 비비며 물었다.

“회사에서 푸대접받는데 굳이 바스타드 길드를 고집할 이유가 있어?”

“응.”

“어? 있다고?”

바스타드에 혹할만한 게 있나?

“있어.”

“뭔데?”

“아저… 팀장님이랑 있어야 해.”

“팀장님? 누구? 아, 2팀장?”

매니지먼트 2팀장 김현우.

처음 만났을 때는 햇병아리였지만 이제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혼자 살아남기 방송도 물론 영향이 있지만, 그 전부터 업계에서 이미 인장이 찍혀있었다.

협회에 들이박는 꼴통으로.

이지아와 협회가 부딪힌 싸움에서 그가 몇 번이나 선봉장에 선 건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문이었다.

“나이 차이가 몇인데 너 혹시 2팀장 좋아하는…….”

한유정의 이맛살이 찌푸려지자 이지혜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능력 때문인데.”

“신체 강화 능력하고 2팀장하고 뭔 상관인데?”

“그런 게 있어.”

볼멘소리에 이지혜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튼, 뭔가가 있긴 한가보다. 알려주기 싫은 모양이지만.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한유정에게 내밀었다.

“됐고, 이거 봐봐.”

대형 길드들의 홈페이지였다.

홈페이지 대문에 이지아 얼굴 박아넣은 바스타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살면 얼굴 한번 봤을 유명 헌터들이 멋진 포즈를 잡고 있었다.

규모는 바스타드에서 비비는 게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 너 처지에 이런 대우가 말이 돼? 밥 사 먹을 돈 없어서 삼각김밥 먹는다고? 헌터 시험 1등이?”

당장 표준 계약서만 작성하면 일류 헌터들 못지않은 계약금을 받을 수 있었다.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투자다.

“벌써 대우 이런데 나중에 가서 어쩌려고 그래? 계약서 작성하고 나면 무르기도 힘들어.”

“식비는 받고 있는데.”

“근데 저녁을 꼴랑 삼각김밥 하나로 때워?”

“그냥, 저축하고 있어서.”

“저축? 저녁도 굶는 처지에 무슨 저축을 해?”

이지혜가 한유정의 미래를 위해 설득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한 회사였다. 그래서 눈에 걸리적거리는 존재를 어서 치우고 싶었다.

이지혜나 나예정이나, 솔직히 따지자면 바스타드 길드에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둘 다 한유정이랑 엮여서 된통 당한 거지, 1차 시험에서 이지혜는 10위 안쪽까지 노리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규모 큰 회사에서도 제법 꺼드럭댈 수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한유정이 회사에 있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절대 첫 번째가 될 수 없었다. 영원한 두 번째다. 항상 한유정의 그늘이 될 터다. 개인적인 원한 관계야 둘째치고 그녀는 그런 위치에 머물길 원치 않았다.

그러니까, 한유정이 다른 회사로만 옮긴다면 모든 게 완벽했다.

“계약 해지하면은 선수금으로 받은 계약금만 내뱉고 끝이 아니야. 만약…….”

“알아.”

“응? 안다고?”

“위약금까지 두 배로 물어줘야 하잖아.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알면은 계약서 작성하기 전에 다른데 알아봐야지! 쓰고 나면 너 늦어.”

한유정은 산처럼 쌓인 과자를 하나씩 까먹었다. 저 조그만 입술로 어떻게 다 먹은 건지, 어느새 절반이나 사라졌다.

“팀장님이 여깄으면 나도 안 옮겨. 팀장님이 가면 나도 갈 거고. 나한테 헛바람 넣어도 소용없어.”

“아, 그래?”

‘눈치챘었으면 미리 말을 하던가’, 이지혜가 짧게 혀를 차며 다리를 꼬았다.

과자를 향해 뻗는 한유정의 손이 현저히 느려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한 양은 다 못 먹는 모양이었다.

이지혜가 심드렁히 음료수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래서, 돈을 얼마나 모으려고 하길래 밥도 못 먹는데?”

한유정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글쎄.”

“……말을 말자.”

이지혜가 구시렁거리며 일어났다. 한유정이랑은 도저히 못 친해질 거 같았다. 옛날부터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이지혜는 한유정에게 어딘가 음습한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마치 똬리를 튼 뱀처럼.

이지혜는 조금 뒤처져서 따라오는 한유정을 데리고 회사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건너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S급 헌터 이지아였다.

이지혜가 팔꿈치로 한유정의 옆구리를 툭툭 쳤다.

“야야, 선배님 온다.”

그녀가 허리를 곱게 접으며 인사를 하려던 찰나였다. 한유정이 먼저 치고 나가 이지아에게 물었다.

“아줌마, 잠깐 물어볼 거 있는데 괜찮아요?”

이지혜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지아한테 아줌마… 시발.’

그녀가 뒷걸음질 치며 모르는 척 빠져나가려는데, 이지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뭔데?”

친근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화난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지혜가 발걸음을 다시 제자리에 돌렸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2팀장님 있잖아요.”

“아, 현우?”

“네. 2팀장님이 지금 아줌마한테 월급으로 얼마 받고 있어요?”

“예전에 현우랑 나랑 계약서 쓴 거 말하는 거야?”

한유정이 고갤 끄덕였다. 이지아가 슬쩍 미소지으며 말했다.

“15억.”

“계약 기간은 몇 년이에요?”

“십 년.”

“업계 표준 계약서죠?”

“응, 내가 아는 게 그거밖에 없어서. 그런데 오늘따라 질문이 많네. 더 물어볼 거 있니?”

“아뇨, 없어요.”

이지혜와 눈을 마주친 이지아가 빙긋 미소짓더니 지나쳐갔다. 그녀는 멍하니 이지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헌터들의 우상이 저깄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지혜가 기겁했다.

“아니, 근데 2팀장이 뭐라고 월급으로 15억을…….”

비현실적인 금액에 어리둥절해 하는데, 한유정이 다가왔다.

“아까 얼마 모아야 하냐고 물었잖아.”

“응? 아, 어.”

그녀가 먼저 걸어가며 말했다.

“3,600억.”

*

‘3,600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훈련장으로 돌아온 이지혜가 한유정을 쳐다봤다. 미련 곰탱이처럼 처먹더니, 러닝을 뛰는데 폼이 계속 흐트러졌다.

코웃음 친 그녀가 벤치 프레스에 누우려던 때였다.

훈련장의 문을 열고 양복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2팀장 김현우였다.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곧장 한유정에게 걸어갔다.

김현우가 물었다.

“유정아, 밥 먹었어?”

한유정이 냉큼 대답했다.

“아뇨, 아직 안 먹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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