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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99화 (99/112)

〈 99화 〉 오늘은 슈퍼 스타 (5)

* * *

커피를 마시며 혀를 입안에서 작게 굴렸다. 이재혁 본부장의 말은 알겠다. 저 말대로라면 협회의 입장에서는 모든 게 완벽했다.

던전 브레이크가 나라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는 동안은 아무도 협회를 건들지 못한다.

협회의 앞길을 막으려고 하면 ‘지금 국민들 죽이려는 거냐’ 라는 프레임을 씌우면 끝난다.

그리고 여론을 등에 업고 휘두른 칼날은, 불길이 꺼지는 순간 역풍을 맞기 마련이다.

실패한다면 당연히 꼭대기에 앉은 사람이 책임지는 게 맞았다. 부협회장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고 협회장은 다시 왕좌를 찬탈한다.

그래, 내가 봐도 완벽해 보였다.

흐릿한 눈가를 양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협회에서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네?”

“어비스 던전 공략에 실패하면 모든 게 협회장과 이사회 뜻대로 갈 겁니다. 이재혁 본부장님 말씀대로요.”

부협회장과 본부장을 빗자루 삼아서 깔끔하게 닦아 놓았다. 그걸 협회장이 그대로 물려 받을 수 있었다. 고생 하나 안 하고.

하지만,

“공략을 성공시키면 협회장의 의도는 실패하는 거 아닙니까?”

본부장이 공략을 성공시키면 될 뿐인 이야기다. 전제 하나만 틀어져도 협회장의 의도는 무너진다.

대한민국에 골칫거리던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한다. 그 업적 하나로 순식간에 관계는 역전될 거다.

‘인선이 없다’, ‘자숙해야 한다’, 라는 이사회의 변명은 더이상 나올 수가 없다. 부협회장은 협회장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권력을 이양받을 거다.

이재혁 본부장이 가방에서 서류들을 척척 꺼내 테이블 위에 깔았다.

“한국에서 어비스 던전의 공략을 실패하고 벌써 일 년이 지났죠. 그동안 네 개국에서 추가로 비슷한 종류의 던전이 발견됐습니다.”

캄보디아, 일본, 영국, 미국.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공략에 실패했다.

“전부 1선 헌터들을 투입했었습니다. 한국이 실패하는 걸 보고 나름 배운 게 있을 테니까요. 자료만 봐도 지랄맞은 곳입니다. 이거 한 번 보시죠.”

그가 종이를 사락사락 넘기며 내게 보여줬다. 그래프와 표, 영어들이 어지럽게 쓰여있었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있었다. 이재혁 본부장이 흠칫 놀라서 물었다.

“혹시 영어 할 줄 모르시나…?”

“네.”

“그으, 젠장, 생각을 미처 못 했네요. 유엔에서 근무하셔서 당연히 하실 줄 알았는데… 그럼 그냥 말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어비스 던전의 공략 난이도도 난이도지만, 내부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증폭시킨다고 한다.

아티팩트로 어느 정도 완화하지만 완벽하게 차단하는 건 아니었다. 전투에 집중하기 힘든 환경이다.

단순 전투력뿐만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과 자기 절제까지 뛰어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인선 자체가 제법 까다롭다는 의미다.

“협회에서는 현재 내부적으로 어비스 던전에 ‘공략 불가’ 판정을 내렸습니다. 기존 랭크를 도입하는 게 의미 없는 수준입니다.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줘야 할 이사회는 공략 실패를 바라고 있고요.

그런 상황에서 헌터들 모아서 공략하라는데, 2차 공략대가 1차 공략대보다 때깔 좋게 나올 리가 없잖습니까?”

“그래서 지아를 지명한 겁니까? S급 헌터 한 명이라도 공략대에 더 집어넣으려고… 그것도 기습적으로요?”

이재혁 본부장은 협회 내부의 정치에 대해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똑같은 새끼들이었다.

협회장은 공략이 실패하길 바란다.

부협회장과 본부장은 공략을 성공시키길 바란다.

당연히 공략을 성공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이지아를 데려가려는 것까지 내가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내 입장에서는 협회장이 아니라 부협회장이 적이지 않은가. 기습적으로 인선을 발표한 건 눈앞의 남자였다.

이재혁 본부장이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변명했다.

“아뇨, 이지아 씨는 능력이 강하긴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훌륭한 인선은 아닙니다. 자기 억제가 중요한 던전인데 정신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을 데려갈 순 없죠.”

그가 검지 손가락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전부 이사회 측 지시입니다. 2차 공략대가 실패하는 김에 눈엣가시인 이지아 씨도 함께 처리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덤으로 공략대 멤버의 구색도 맞추고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1년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결국 꼬장 부리는 거였다.

*

이재혁이 잘게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커피를 마셨다. 그가 눈앞의 청년을 힐끔 훔쳐봤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민에 빠져있었다.

김현우, 26세, 카페 알바 경력 1년, 현재 한유정의 매니저로 활동 중.

보잘것없어 보이는 이력들이지만 여기에 과거를 보태면 화려해진다.

4년간의 특수부대 복무, 레드 게이트 생존자, 협회와 싸운 경력 다수.

그리고 임무 수행 능력 S급.

관료제 엘리트들과 전문직 화이트칼라들에게는 헌터를 무시하는 풍조가 깊게 박혀 있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힘만 센 사람은 항상 머리 쓰는 사람들의 도구밖에 안 됐다.

치안과 정부가 안정적인 국가에서 개인의 무력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양복쟁이 이재혁 본부장은 S급 헌터 이지아가 썩 두렵지 않았다.

물론, 눈깔 돌아가서 모가지 따겠다고 달려오면 당연히 무서울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하고 있었다.

여긴 한국이었으니까.

뒤처리 못하고 걸리면 감방 가는 건 헌터나 일반인이나 똑같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기자들이 옛날부터 쓰던 격언이지만 지금 와서는 관료들도 흔하게 썼다.

당장 협회가 이지아를 어떻게 처리했던가.

어비스 던전에서의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웠다. 보복 행정으로 길드 설립을 방해했다. 지금은 여론을 움직여 2차 공략대에 참석시키려 하고 있었다.

펜대 굴리는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헌터 하나 엿 먹이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즉, 한국에서 무서운 건 헌터처럼 주먹만 강한 인간들이 아니라,

“그런데, 본부장님께서 이걸 왜 굳이 저한테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눈앞의 남자처럼 행동력과 눈치를 겸비한 인간이었다. 거기에 약간의 정치 감각과 능력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김현우가 검지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겼다. 그가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며 물었다.

“결국 협회 내부의 일 아닙니까?”

이재혁은 습관처럼 넥타이의 끈을 풀려다가 정장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대한민국이, 국가가, 국민이…! 고작 협회 내부의 정치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협회의 설립 이념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맡지 않는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하기 위해 민간단체를 설립했던 게──!”

UN은 각국의 워슈트 데이터 수집처로 바뀐 지 오래였고, 그 말은 곧 세계단위의 PMC라는 의미였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강한 평화기구였다.

강대국들이 기왕 데이터 얻는 김에 제3세계와 빈곤국에 꺼드럭대고, 우리는 세계 평화를 위해 비싼 워슈트를 대여해준다고 국격도 높인다.

당연히 각국에서 파견 보내는 군인들은 엄선하고 엄선한 최고들뿐이었다.

피스 메이커의 일원이었다는 직함 하나만으로, 이미 김현우는 이지아나 한유정에 비해 꿇릴 게 전혀 없었다.

아니, 반대로 이재혁과 부협회장은 김현우를 그 둘보다 훨씬 높게 평가했다.

UN군에서 김현우에게 내린 평가지.

임무 수행 능력 S급.

즉, 일단 작전을 시작하면 아무리 불리한 조건에서라도 성공시킨다는 뜻이었고,

“협회장을 위시한 이사회 9인이 협회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입맛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부협회장 라인은 고작 6인이고요. 협회장 라인이 과반석을 차지한 이상 독주를 막는 방법은 요원합니다.”

그건 지금 이재혁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능력이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며 강렬한 어조로 말했다.

“던전 브레이크는 현재 총체적 난국입니다!”

가만히 놔두면 협회의 힘이 강해지는데, 그걸 처리할 권한이 협회에 있었다.

이건 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겨놓은 격이었다. 그런데 협회의 힘이 강해지는 건 어차피 협회장과 그쪽 라인만 좋은 일이었고, 똥 무더기 뒤집어쓰는 건 결국 부협회장과 본부장뿐이었다.

게이트 재난 대응 본부장.

협회에서 어비스 던전 공략과 재난 대처 권한에 대해 전권을 위임해줬다. 당연히 막강한 권한만큼이나 책임도 비례해서 커진다.

그리고 어비스 던전은 공략 불가 판정을 받았다.

남들은 그를 부러워할지도 몰랐다.

망나니 칼춤 추듯 길드고 헌터들이고 싹둑싹둑 모가지를 썰 수 있는 자리였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부협회장 라인인 그를 사형시키기 위해 협회에서 준비한 전기의자다.

실패하면 옷 벗고 나가야 한다. 언론에 얼굴 팔려서 어디 가지도 못하고 동네 걸을 때마다 날계란 처맞는 광경이 눈앞에서 생생했다.

화이트칼라의 권력이란 무릇 소속된 단체에서 나온다. 일신의 무력이 전부인 헌터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양복 벗으면, 속된 말로 좆도 아무것도 없었다.

이재혁 본부장이 격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게이트 재난 대응 본부가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문제를 처리하려는 이때, 협회는 대체 무엇을 하는 겁니까! 쓸데없는 자존심만 세우기 위해 이지아 씨를 걸고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사내 정치로 싸우는 게 아니었다.

이건,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김현우가 다리를 꼬며 물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김현우 씨는 벌써 협회와 몇 차례나 싸우지 않았습니까? 불리한 와중에 크게 서너 방 먹였고요! 과거 전장에서 저격수로 활동하며 여러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훌륭한 퇴역 군인이죠!”

그런데, 그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협회장 라인을 박멸시켜버려야 했다. 그게 안 된다면 최소한 파벌을 세 갈래로 쪼개야 한다.

천하삼분지계.

솥을 지지하는 다리가 세 개라면, 하나의 강력한 군벌이 득세할 때 다른 약소 군벌들이 합쳐서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협회에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미 이사회 과반수가 협회장의 손에 쥐어져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외세의 개입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현재 과반수의 이사를 소유한 협회장은 계속 독주할 겁니다. 사람들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하며 권력 놀이에 심취하겠죠.”

협회는 정부 부처나 기업과 다르게 감시기구가 미흡했다.

현재 파벌은 두 개뿐이고, 감사위원까지 먹어놓으면 그대로 끝이다. 고인물이 계속 고인다.

기업처럼 주주 총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정부 기관처럼 대통령이 서류 하나로 모가지 자르는 것도 아니다.

김현우가 턱을 괴며 물었다.

“그래서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자리를 잡아 말씀드리는 거는, 현재 협회 상황에 대해 현우 씨에게 샅샅이 알려드리고….

그으, 뭐냐, 이지아 씨를 지명한 건 저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으며, 거, 씨벌, 개인적인 원한은 협회장에게 가지시는 게, 아니, 어비스 던전이라는 위협을 앞둔 지금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우 씨가 다시 한번 협회를 엿먹일 필요가!”

“그래서요?”

“그러니까…!”

나 좀 살려주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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