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들이 내게 집착한다-100화 (100/112)

〈 100화 〉 오늘은 슈퍼 스타(6)

* * *

“바로 대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이재혁 본부장이 강렬한 눈빛으로 김현우를 쳐다봤다. 바라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안 바랄 리가 없었다.

협회에, 그러니까, 속된 말로 ‘개기는’ 업계인은 극히 적었다. 당연했다. 협회는 그들을 관리하는 집단이다.

헌터들에게는 등급을 부여하고 길드의 여러 행정적인 문제를 담당하는데, 거기다 대고 모가지 빳빳이 세우며 멱살 잡는 경우는 보통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재혁 본부장이 하는 말은 김현우에게 같이 협회 한 번 엎어버리자는 뜻이었다.

그것도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당연히 싫다고 외친다. 다만 김현우라면 조금 경우가 달랐다.

이미 협회에 밉보일 대로 밉보였다. 본인도 여러 번 싸웠다. 그나마 손잡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고작 매니저 하나.

남들이 보면 접선을 대체 왜 한예림이 아닌 김현우에게 하나 의문일 터다. 김현우가 아무리 날고 긴다 쳐도 결국 회사 사장은 한예림이었으니까.

사실 김현우의 업계 영향력이 큰 편도 아니었다. 팀장이지만 이제 고작 1년 차다. 유명하긴 했지만, 관찰 예능으로 얼굴 알린 게 대부분이다.

이렇게 협회 눈 피해서 몰래 만나는 부담을 가질 필요가 있나, 실제로 이곳에 오기 전에 수행원에게 들은 말이었다.

하지만 바스타드 소드 길드의 내막을 살펴보면 제법 말이 달라진다.

회사의 주요 인물들은 이지아, 한유정, 한예림, 김현우 등.

이지아랑 김현우의 관계야 말할 것도 없었다. 청문회 때부터 김현우가 이지아 문제마다 열 받아서 들이박았으니까.

그런데 한예림과 한유정도 사실 별반 다를 건 없었다.

한예림은 김현우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고, 한유정은 후견인으로 김현우를 지명할 만큼 신뢰했다.

사실상 회사 주요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전부 김현우에게로 통해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제가 현우 씨께 드리는 선물입니다만....”

이재혁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누군가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현우 씨 기록을 말소시켰습니다.”

“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현우 씨는 지금 무능력자란 겁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죠?”

김현우의 당초 계획은 이랬다.

이지아의 우울증과 게이트 내부에서의 업적으로 협회의 지명을 빠져나간다.

우울증은 핑계였고, 업적은 여론을 악화시키지 않기 위한 방패막이였다.

다만, 우울증과 함께 예고편이 나가며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다.

‘어떻게 싸운 거냐’, ‘저렇게 잘 싸울 거면 던전에 들어가도 되는 거 아니냐’ 등.

전부 김현우의 능력으로 설명 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능력이 데이터베이스에서 말소됐다는 의미는 곧, 우울증이라는 기사가 자칫 거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여론의 반전을 노린 이사회의 함정이었다.

*

테이블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이재혁 본부장이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본 건 많은지 첩보 영화 흉내도 수준급이다. 옷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엄폐물에 몸을 슬쩍슬쩍 숨긴다.

저러면 더 눈에 띌 텐데.

나는 삼십 분 뒤에 나갈 거다. 같이 있는 모습이 들키면 괜히 곤란해진다. 협회나, 언론에나.

공사다망한 몸이신데 먼저 보내줘야지.

주머니에서 이재혁에게 받은 명함을 꺼냈다. 결국, 같이 손잡고 난관을 헤쳐나가자는 의미였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공동의 적이 있고, 서로의 목적이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협회장, 삼촌, 한유정, 천살성, 이지아, 어비스 던전.

마른 숨길을 토했다.

적은 처음부터 달라지지 않았다.

안개 낀 머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눈앞에 꾸불꾸불한 가시덤불 길과 평탄하게 뻗은 길이 나왔다.

선택하는 건 결국 내 의지다.

갈림길에 멈춰서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이미 답을 정해놓은 질문이었다.

가시덤불을 모조리 불태워버릴 거다.

이지아와 한유정이 그 길을 편하게 걸을 수 있게.

* * *

철원군 게이트 다큐 첫 방일.

“……뭐 하세요?”

임 피디가 어이없다는 듯 물으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교양국 CP가 눈썹을 찡그리며 문자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입력하고 있었다. 요즘 노안이 와서 그런가 잘 안 보였다.

그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현우 씨한테 문자 보내고 있다.”

“문자요?”

임 피디가 어깨 너머로 화면을 훔쳐봤다.

[안녕하십니까, 바스타드 소드 매니지먼트 2팀장 김현우 씨. 저는 교양국 CP 유현석 부장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나간 방송 반응이 뜨거워서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일개 매니저한테 보내기에는 지나치게 격식을 차렸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이건 순 무릎 꿇고 발바닥 핥을 준비까지 돼 있어 보였다.

“……국장님한테 보내는 건 아니고요?”

“난 국장님이 아니라 사장 새끼한테도 이렇게 안 보내.”

“그런데 현우 씨한테는 왜 그리 예의를 차리세요?”

“우리들의 구원자니까. 개새끼도 자기 구한 사람은 알아보는 법인데. 물 빠진 거 구해줬으면 대가리 박아야지.”

교양국은 시청률이 부진하다는 사유로 폐지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걸 저지한 게 때마침 철원군에 열린 게이트였다.

잠깐의 유예 기간.

시청률이 부족해서 폐지한다는 사유를 정면으로 반박할 실적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찾아온 김현우라는 젊은 매니저.

핸드폰에 저장된 동영상 파일은 그야말로 조커 카드였다.

CP와 국장, 임 피디를 비롯한 교양국 일동은 김현우의 발밑에 기라면 길 수도 있었다.

김현우가 그들을 멱살 잡고 살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쵸, 염병, 우리 잡아먹으려고 안달 난 새끼들보다 현우 씨가 백배, 천배, 아니, 수억 배는 낫지.”

“그치. 방송 전부 끝나면은 내가, 어? 현우 씨 데리고 리조또 데려가서, 어?”

“리조트요?”

“그거나, 그거나. 우리 시청률 몇 퍼센트 나왔지?”

알면서 하는 질문이었다.

임 피디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22퍼요.”

“22퍼.”

“네, 22퍼요.”

“22퍼. 미쳤네, 그냥. 요즘 예능도 10퍼는 잘 안 나오는데. 으흐흫.”

CP가 괴상한 웃음소리를 내며 임 피디의 어깨를 주먹으로 마구 때렸다. 임 피디도 비슷하게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비극적인 사고와는 별개로 자기 밥줄 유지됐는데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아까 국장님이 사장실 들어가는 거 봤는데 무슨 개선장군인 줄 알았어. 어깨가 위풍당당한 게, 이야.”

“그런데 부장님.”

“왜?”

“1편은 밑밥 까는 편이었잖아요.”

원래 대부분의 방송이 1편에 화력을 집중한다. 관심 집중시켜서 이목 끌어야 하니까. 그런데 ‘철원군 게이트­ 진실 속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뉴스 틀면 나오는 게 철원군 게이트 이야기고, 예고편 나가자마자 온갖 관심이 쏠렸다.

당시 생존자들 인터뷰랑 현장 영상 엮어서 내보냈는데 시청률이 22퍼 나왔다.

본방은 아직이었다.

“이거, 이지아 씨 본격적으로 나오면 시청률 얼마까지 오를 거 같으세요?”

임 피디의 질문에 CP가 팔짱을 꼈다. 시청률이야 항상 까볼 때까지 모르는 법이었다. 이건 교양국, 예능국, 드라마국을 가리지 않고 통용되는 말이었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방송한다는 게 그랬다. 항상 성공할 거라 믿고 최선을 다하지만 죽 쑤는 게 이쪽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 건 조금 다르다.

“떡밥 예열시켜놨으니까 아무래도 더 나오겠지. 이지아 없이 일반인들만 출연시켜서 22퍼였으니까.”

먹자판 깔아놨는데 주워 먹기만 하면 됐다. 솔직히 이걸로 시청률 못 뽑을 거면 일한 경력이 아까웠다. 옷 벗고 나가야 한다.

“프로그램과는 별개로 이지아 이름 자체에도 화제성이 있으니까. 몬스터랑 싸우는 장면 넣어서 지루할 틈도 없을 거고….”

“그래서요?”

CP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20대 후반? 그렇지 않을까?”

“20대 후반이요? 너무 짜지 않나?”

“다큐 최고 기록이 30%다, 인마. 생명의 기적 넘기가 가능할 거 같아? 저것도 2000년대 업적이야. 지금이 몇 년도인데… 20대 후반도 분에 겨운 거지.”

놀 거리가 다양해지고 인터넷에 시청자들을 뺏긴 지금, 과거의 성벽을 넘기란 불가능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히 CP의 기준도 다큐멘터리 최고 시청률인 30%에 머물러 있었다.

그 이상은 솔직히 상상이 안 갔다.

“그러면요.”

임 피디가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김현우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현우 씨가 방송에 나오면요?”

“…음.”

교양국 CP와 임 피디의 기준에서 탐나는 건 이지아가 아닌 김현우였다.

첫 번째, 화제성.

단발성이긴 하지만 혼자 살아남기에 등장하며 대중들에게 얼굴을 제대로 알렸다. 당연히 이지아보다는 못해도 현재 나름 유명한 인물이었다.

두 번째, 장르.

이지아가 분명 흥행 보증 수표는 맞았다. 하지만 다큐에 등장하기에는 뭐랄까, 장르가 조금 달랐다. 대부분 활약하는 게 몬스터들을 때려잡는 거에 맞춰져 있었으니까.

다큐보다는 액션 영화 같았다. 임 피디는 편집을 하면서 그런 느낌을 최대한 지우려고 했지만, 김현우를 배제하고 이지아가 나오는 장면들 대부분이 전투뿐이라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김현우는 조금 다르다.

호쾌한 액션보다는 생존극 드라마에 가까웠다. 빠른 판단을 내려 백화점 내부를 외부와 고립시켰고, 이지아와 함께 시민들을 구출했다.

죽음을 각오하고 거인을 향해 뛰어갔다.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폭탄을 짊어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인간으로서 존경심마저 들 정도였다.

마지막에 워슈트 부대와 짧게 인사하는 장면, 공포에 떠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장면, 버스 위에서 연설하던 장면.

단순 전투뿐인 이지아와는 콘텐츠의 차이가 컸다.

가진 능력이 이미 뛰어난 영웅과 부족한 능력을 순간의 기지로 해결하는 소시민적인 영웅.

뭐가 다큐에 더 어울리고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할지는 뻔했다.

“어디보자, 현우 씨가 나오면 시청률이….”

“시청률이?”

“이십대 후반…?”

임 피디가 맥빠진 한숨을 내쉬며 불평했다.

“그게 뭡니까. 좋은 거는 다 말해놓고. 고작 20대 후반이에요?”

“그래도 이지아 이름이 있지. 현우 씨는 워슈트 부대인 거 못 밝힌다면서?”

“그럼 워슈트 부대인 거 밝히면요?”

CP가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때는 신기록 갈아치우는 거지.”

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CP의 핸드폰이 진동으로 떨렸다. 그가 반색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임 피디가 물었다.

“사모님 몰래 사귀는 애인이에요?”

“이 새끼는 말을 해도. 현우 씨다.”

“아, 현우 씨.”

“우리 현우 씨는 예의도 참 바르다니까. 지금 이지아 문제 때문에 바쁠 텐데 꼬박꼬박 답장도 보내주고….”

말을 하던 그가 멈췄다. 문자의 내용 때문이었다.

[방송 기획 처음부터 다시 짜죠]

[제 위주로]

그가 다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어, 현우 씨, 방송 기획을 다시 짜다뇨? 현우 씨 위주로요? 무슨 일이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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