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폭풍을 부르는 영광의 요구르트 로드 (3)
* * *
허리에 손을 얹고 삐딱하게 섰다.
서늘한 기색을 느꼈나 보다. 루리가 눈치를 보며 어기적 일어난다. 녀석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날 쳐다본다.
“서루리.”
애들한테 아마 제일 무서운 상황일 거다.
낮은 목소리로 자기 이름 석 자 전부 부르는 거.
루리가 작은 어깨를 움츠린다.
“유정이는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응?”
“유정이가 너한테 요구르트를 꺼내줄 리가 없는데. 대체 어떻게 마신 거냐고.”
한유정도 만만찮게 단호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응급실에 실려 간 다음날이다. 이걸 오늘 바로 꺼내준 건 분명 뭔가가 있었다.
“그, 그게.”
루리가 어색하게 웃는다.
“엄마랑 비밀로 약속해서….”
얼씨구.
애들이 나 몰래 무슨 짓을 하는지 꼭꼭 숨기기로 작정했나 보다. 한유정도 가만 보면 참 비밀이 많았다.
뻘쭘하게 서 있던 우리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다. 녀석이 배를 움켜 붙잡고 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그리고 새우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덜덜 떤다.
전에 봤던 광경 그대로다.
“끄윽…! 아빠!”
“왜? 배 아파?”
“응, 배가 너무 아파…!”
한숨을 쉬며 루리를 안아 들었다. 하얗게 뜬 안색으로 식은땀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보나 마나 유산균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검사는 받아봐야지.
밖으로 나온 내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
간호사가 헛웃음을 짓는다.
“또 오셨네요?”
“…넵.”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지나가던 간호사들이 힐끔힐끔 날 쳐다본다.
“두 번 연속은 좀 그렇죠?”
머쓱하게 선글라스를 매만지니까 간호사가 고갤 끄덕였다.
“유산균 과다 복용으로 오는 게 몇 번 있긴 한데….”
몇 번 있긴 한데?
“아무래도 두 번이나 응급실에 들리는 건 처음이죠. 그것도 이틀 연속으로. 저희 수간호사님도 장하다고 사탕 하나 쥐여주셨어요.”
간호사가 고생이 많겠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는 떠났다.
“아빠, 의사 선생님이 주사 잘 맞는다고 나 칭찬해줬어. 장군감이래.”
다리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루리가 헤 웃는다. 알사탕을 오독오독 씹으면서.
그래. 신기록도 세우고, 주사도 잘 맞고, 장하네.
얄미워서 이마에 작게 딱밤을 때렸다.
“으햑!”
“이걸 진짜 어떡하냐. 구워삶을 수도 없고.”
초조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9시. 오늘은 토요일이었다. 세시간 뒤면 천살성 때문에 한유정과 신체 부위를 접촉하고 있어야만 한다.
당연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루리를 돌본다는 게 마음처럼 되지 않을 건 뻔하다.
차라리 집에 있는 요구르트를 전부 버릴까?
아니다. 애한테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보이겠어. 내가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거지. 7살짜리 애한테 난폭하게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대체 루리를 누구한테 맡기지?
지이잉!
응급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또각, 또각.
귀에 익은 하이힐 소리가 들린다. 한예림이 이지아와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구석에 쪼그려 앉은 루리에게 아는 척을 했다.
“서루리, 또 말썽부렸어? 현우한테 벌써 한 대 맞았구나?”
“아빠가 이마 때렸어. 호 해줘.”
루리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이마를 한예림한테 보여줬다. 한예림이 히죽 웃으며 루리를 안아 들었다.
“싫어. 호 안 해줄 거야.”
“호 해줘.”
“싫은데. 나도 유산균에 감염되면 어떡해?”
“아잇, 유산균이 전염병도 아니고 바람 부는 거로 어떻게 감염돼? 예림이는 사장이면서 그런 것도 몰라?”
“요놈 봐라?”
한예림이 루리의 이마를 한 대 더 때린다. 그녀가 루리를 이지아에게 넘기고 내게 다가왔다.
“슬슬 일요일로 넘어갈 시간 아니야? 집에 돌아가야지.”
말을 하던 한예림이 불안한 얼굴로 말끝을 흐린다.
“야, 김현우. 너 눈빛이 왜 그래?”
“뭐가? 내 눈빛이 어때서? 선글라스 끼고 있는데 눈이 보여?”
이거 설마 고장 났나?
싸구려긴 해도 나름 아티팩트인데. 요즘 사람들이 하도 알아보니까 정체 숨기려고 비싼 거로 끼고 있었다. 안면인식을 방해하는 기능까지는 없어도 쉽게 벗겨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시야도 안 가리고.
“우리가 하루 이틀 얼굴 보냐? 너 지금 표정이 딱 그렇잖아.”
“그러니까, 뭐가?”
한예림이 핸드폰 거울로 내 얼굴을 보여준다.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까 무슨 경호 요원 같다.
이게 뭐가 이상하다고 저리 호들갑이지?
“뭐기는? 지금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 만땅 같은데. 얼굴에 다 써져 있어.”
걸렸네.
* * *
저녁 11시.
2시간의 설전 끝에 김현우는 한예림에게 루리를 하루 동안 맡길 수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한유정은 시선을 계속 피하더니 그림자로 변해서 사라졌고, 한예림한테는 1시간 동안 빠르게 인수인계를 마쳐 야만 했다.
“혼자 자는 건 아직 무서워하니까 네가 오늘만 같이 자줘. 자면서 오줌은 싼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그리고 아직 일곱 살이라 뜨겁고 딱딱한 걸 잘 못 먹어.”
한예림이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았다. 그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분유 같은 거 먹이나?”
“일곱 살이 무슨 분유야? 너 유치원 다닐 때 분유 먹었어?”
“맥주 사탕 먹었지.”
“냉장고 용기에 루리 반찬이라고 매직으로 적어놨거든? 젓갈 양념을 좀 약하게 해놨으니까 밥에 물 말아서 반찬 챙겨주면 알아서 잘 먹을 거야. 젓가락질이 아직 서툴 텐데 교육 중이니까 반찬 대신 집어주지 말고.”
“얼씨구.”
한예림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한 달 만에 애 아빠가 다 됐네?”
“그러게 말이다.”
김현우가 몇 가지 주의사항들을 이야기해줬다. 한예림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에 메모해준 항목이 열 개 정도가 넘었을 때. 그녀의 끄덕거림이 조금씩 기계적으로 변해갔다.
김현우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듣고 있는 거 맞지?”
“당연히 듣고 있지. 걱정 마. 나도 일곱 살 때 엄마 손에 귀하게 자랐잖아. 우리 엄마 극성인 거 몰라?”
“너 아주머니한테 맨날 맞았잖아.”
삐빅! 삐빅!
김현우의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11시 50분.
이젠 진짜 시간이 없었다. 김현우가 찝찝한 감정을 뒤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리가 요구르트 먹지 않게 꼭 주의해줘. 벌써 응급실 두 번 갔으니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한예림이 손을 휘휘 저었다. 결국 시간에 쫓긴 김현우가 방으로 올라갔다. 혼자 남게 된 거실은 한적했다. 주위를 살피던 그녀가 가방에서 맥주와 오징어를 꺼냈다.
‘이게 어떻게 생긴 휴일인데.’
회사에서 가장 바쁜 인물은 당연히 한예림이었다. 김현우는 맡아봤자 한유정과 이지아뿐이지만, 한예림은 대표인 만큼 1팀과 2팀을 모두 신경 써야 했다.
아직 회사가 자리 잡지 못했다.
가만히 있으면 당연히 아무도 일감을 들고 오지 않는다.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투자사들과 여러 가지로 안면을 틀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중에 이쪽에서 관리하는 헌터들의 프로필이라도 넣어보지 않겠는가. 오가는 대화에서 우연히 얼굴을 떠올려줄 수도 있는 거고.
영업은 대표의 일이었다.
최근 이지아, 김현우, 한유정의 문제로 연달아 뻥뻥 터지면서 쉬었던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났다.
쉴 수 있을 때 쉬어야만 한다. 한예림의 지론이었다. 그녀가 IPTV를 켰다.
쭉 훑어보니까 안 본 사이에 신작이 많이 나왔다. 영화를 하나 선택한 한예림이 소파에 앉았다.
[타짜]
멍 때리면서 보기 딱 좋은 영화였다.
“예림이는 안 잘 거야?”
루리가 이불을 질질 끌며 계단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한예림이 맥주캔을 까며 물었다.
“엉. TV보다가 잘 건데. 안 자고 왜 나왔어?”
“엄마가 일요일이니까 예림이랑 같이 자래.”
“일로와.”
한예림이 루리를 끌어안고 소파에 누웠다. 루리에게 이불을 덮어준 그녀가 가슴을 토닥여줬다.
루리가 눈을 꿈뻑꿈뻑 감으며 한예림에게 애원했다.
“예림이가 나 요구르트 하나만 꺼내주면 안 돼?”
“안돼. 현우가 주지 말랬어.”
“다들 아빠 말만 들어.”
“요구르트 먹다가 쓰러졌으니까 그렇지. 그게 고작 얼마나 한다고. 설마 아까워서 안주겠어?”
“그래도…….”
노곤하던 목소리가 잠잠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한예림이 힐끔 루리를 살피고는 리모컨을 만졌다.
멈춰놨던 영화가 재생됐다.
그녀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영화에 집중했다.
이 바닥엔 영원한 친구도 원수도 없어.
늑대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갑니까.
난 딴 돈의 반만 가져가.
어이, 고광렬이. 너는 첫판부터 장난질이냐?
아수라발발타, 아수라발발타.
시나리오 쓰고 있네, 미친 새끼가!
영화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극 중 긴장감은 고조됐다.
그래서 한예림은 몰랐다.
자는 줄 알았던 루리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영화를 보고 있던 것을.
*
다음날 점심.
한예림이 퀭한 눈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처음 마주친 건 루리의 얼굴이었다.
“…뭐하냐?”
한예림이 당황한 투로 물었다.
루리가 김현우의 선글라스를 고쳐 쓰더니 공부할 때 쓰는 책상을 펼쳤다.
그리고 바닥을 손바닥으로 착착 때렸다.
“예림이, 여기 앉아봐!”
“뭐?”
“루리랑 내기 하나 하자.”
고민하던 한예림이 일단 테이블에 앉았다.
“무슨 내기?”
루리가 서랍장을 뒤져 찾은 화투패를 꺼냈다. 그리고 엉성한 스냅으로 패를 섞기 시작했다.
루리가 구슬 주머니를 넘기며 제안했다.
“루리는 10점에 요구르트 하나. 100점따면 엄마. 승부는 한 쪽이 전부 거덜날때까지. 어때?”
주머니에는 구슬이 50개가 들어있었다. 한예림이 어제 마시다 남은 맥주를 벌컥 들이켰다. 몽롱한 정신이 깨어났다. 그녀가 헛웃음을 삼키며 물었다.
“화투는 칠 줄이나 알고 그런 말 하는 거야?”
루리가 한예림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유튜브 동영상이 하나 켜져 있었다.
[어린이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화투]
조회 수가 상당히 높았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렇지 세상 말세다, 말세야. 어린애들한테 도박을 가르쳐?”
쯧쯧.
혀를 찬 한예림이 루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골똘히 고민하던 그녀가 히죽였다.
“내가 라스베이거스에 블랙 리스트로 올라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줬던가?”
“라스베이거스…?”
“미국의 강원 랜드, 아니다. 너한테 뭘 말하겠니.”
그녀가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루리를 쏘아봤다. 선글라스 때문에 루리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루리의 시선도 만만치 않을 건 분명했다.
쉬는 날에 맞춰서 들어온 육아 청탁. 거절하기에는 김현우에게 옛날부터 받아 먹은 게 많았다.
이지아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돼서 어디 놀러도 못 나갔다. 그나마 심심함을 달래줄 김현우는 한유정이랑 게임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예림 혼자서 루리를 돌봐야 했다. 스물일곱과 일곱 살. 재밌게 논다고 놀아봤자 소꿉놀이가 전부일 터.
따분한 일요일이다. 그녀가 루리에게 화투패를 빼앗아 능숙하게 섞었다.
결국 루리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이유는 별거 없었다.
7살짜리 애한테 화투를 질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냥, 재밌을 거 같았다.
“그 제안… 받아들이지.”
한예림이 패를 돌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