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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21화 (21/190)

21화

파스스……

찰칵!

등 뒤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우나 통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날 찍은 거지?

설마 박시우인가?

“저기 혹시…… 온천 사장님 아니세요?”

어깨 너머로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박시우 목소리는 아니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사진이 찍혔으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닌데요?”

“그럼 사우나 통은 왜 들고 계세요? 이건 온천 사장님이 문지기 영감한테 주고 간 거라고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발뺌을 해봤지만, 남자가 이번에는 사우나 통을 물고 늘어졌다.

젠장, 들켰다.

“영감님, 잠시만 귀 좀 막아보실래요?”

“자네는 매번 볼 때마다 내게 귀를 막으라고 하는군.”

“역시 온천 사장님이 맞으신 거죠?”

흰 수염 영감과 내 대화를 듣던 남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남자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돌렸다.

서둘러야 하는데.

그렇다고 영감님 앞에서 욕을 할 수도 없고.

“시우 형! 빨리 와요! 여기 온천 사장님이 계신다고요!”

설마, 저 남자가 부르는 ‘시우 형’이 내가 아는 그 박시우가 맞나……?

남자는 뒤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전보다 많아졌다.

“진짜 온천 사장님이 계신다고? 아이고~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뭐야, 진짜 박시우 목소리잖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것보다 더 간사할 수 있는 목소리는 없다.

“영감님, 어서요!”

“거참, 알겠다. 이제 됐는가?”

재촉에 못 이긴 영감이 두 귀를 막았다.

“시X!”

난 다급하게 암호를 내뱉었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

온천에 도착한 나의 머릿속이 급속도로 복잡해졌다.

어떡하지?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었으니까 얼굴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박시우 눈썰미 정도면 뒷모습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텐데.

이러다 다 들통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박시우나 지호가 집으로 돌아올 경우,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전에 사우나 통을 가져다 놓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온천의 문을 열고 거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직 둘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아악! 이놈의 사우나 통 때문에!”

아니지. 정확히는 ‘우나에 대한 박시우의 집착’ 때문에 내 존재가 세상에 들통날 위기에 놓였다.

사우나 통을 거실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진 나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곧장 익명 헌터 게시판에 접속했다.

내 사진이 퍼진다면 가장 먼저 이곳에 올라오겠지.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46층 온천 사장 출몰! (사진o)>

역시 빠르네.

그새 게시글이 올라왔다.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게시글을 눌렀다.

[사진]

* * *

사우나 통 수거하러 오신 온천 사장님 발견했음. 언뜻 봤는데도 핵존예 여신임. ༼;´༎ຶ ۝ ༎ຶ༽ (오열)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딱 맑은 날에 햇살 비추는 바닷가의 사파이어색이었음. 완전 내 취향 저격당함.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가? ●▅▇█▇▆▅▄▇ 사장님, 갑자기 사라지셔서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욕하는 목소리도 완전 섹시하십니다. ༼;´༎ຶ ۝ ༎ຶ༽ (오열) 제발 저한테 한 번만 더 욕해주세요.

* * *

└익명1 : 헐? 온천 사장이 여자였어?

└쓰니 : 심지어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해도 20대 초반이셨음.

└익명1 : 솔직히 온천 사장이래서 50대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색안경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음. 반성합니다.

└익명2 : 근데 온천 사장이 욕했다는 이야기는 뭐임? 둘이 초면 아님?

└쓰니 : 거침없는 성격 오히려 좋아!♡♥ 욕하기 전에 문지기 영감한테 귀 막으라고 함. 어른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스윗함에 두 번 반함. ༼;´༎ຶ ۝ ༎ຶ༽ (오열) 사장님!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더 저한테 욕 박아주세요!

└익명3 : ㅋㅋㅋㅋㅋㅋ아니, 욕을 얼마나 찰지게 하길래 욕 구걸까지 하는 거임? 나도 한번 들어보고 싶네.

└익명4 : 저도요. ㅋㅋㅋㅋㅋㅋ

└익명5 : 얘들아. 46층 좌표 찍고 가자!

└쓰니 : 응. 이미 집필이 선점했쥬? ^^

그새 46층에 진을 치고 앉은 건가?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이 사진 속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게시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사진 속 뒷모습의 여자는 은발을 하고 있었다.

사우나 통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봐선 내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왜 머리카락이 은빛이지?

카메라 필터를 과하게 썼나?

하지만 글쓴이 역시 게시물에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직접 목격했다고 적어놓았다.

눈까지 필터를 씌운 건 아닐 거 아냐?

아무 생각 없이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그럴 리 없는데 설산처럼 새하얀 은발이 보였다.

새끼발가락을 부딪친 충격이 너무 컸나 보다.

이제 헛것이 다 보이네.

소리 없이 웃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실의 전신 거울 앞으로 걸어가 섰다.

거울 속에는 글쓴이가 묘사한 글처럼 신비로운 은발에 보석 같은 물색 눈동자를 가진 미녀가 나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반쯤 넋을 놓은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급기야 내 뺨을 소리 나게 쳤다.

짝!

그러자 거울 속 미녀가 나와 동시에 제 뺨을 쳤다.

이거…… 진짜 나잖아?

어떻게 이게 나일 수가 있지?

[‘온천 사장’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각인이 발현된 걸 자각합니다.]

[성물 ‘온천 지배자의 귀걸이’를 획득합니다.]

[성물 ‘온천 지배자의 부채’를 획득합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각인이라니?

온천 지배자면, 해령을 말하는 거잖아?

어느새 거울 속의 내게는 해령처럼 밝은 바다색 천으로 장식된 귀걸이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그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한 그때, 내 앞으로 창이 떠올랐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해령이 계약자에게 각인을 새기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놀라워합니다.]

‘각인이 뭐길래 그렇게 놀라는 건데? 갑자기 난 왜 이렇게 변한 거고?’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상황을 구경하다가 “각인을 새기고 발현되면 해당 성좌와 영혼을 공유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영혼을 공유해? 그러면 해령과 영혼이 바뀌거나 내 몸에 해령의 영혼이 들어오거나 뭐 그러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말대로만 됐다면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운수가 실망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 거다.

내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제대로 설명해봐.’

난 운수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불안해할 것 없다”며 “각인이 발현되면 해당 성좌의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니까 네게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해령이 가진 힘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생각했던 것만큼 바보는 아니었다”며 빠르게 이해하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왜 같은 말을 해도 운수가 하면 재수 없지?

이가 바드득 갈리긴 했지만, 수확이 있으니 한 귀로 흘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영혼을 공유하게 되어서 외형도 해령처럼 변한 건가?

귀걸이랑 부채를 얻은 것도 그렇고.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게다가 계약자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면 각인을 새긴 성좌도 타격을 받아서 목숨 걸고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요약해서 말하자면 갑과 을이 바뀌는 건데, 해령이 왜 각인을 새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의문스러워합니다.]

그러고 보니 온천수에 휩쓸렸을 때, 해령이 내게 숨을 불어 넣어주며 각인을 새긴다는 문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때는 본인이 잠시 미쳤었던 것 같다며 “각인을 무르는 게 어떻냐”고 묻습니다.]

‘기껏 갑이 됐는데, 내가 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해령이 제대로 덜미를 잡혔다”며 배를 잡고 뒹굽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창을 싫어합니다.]

‘근데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다시 각인의 힘을 사용하고 싶을 때는?’

정체를 숨길 수 있어 편할 것 같지만, 혹시 못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된다면 역효과가 났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각인을 사용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각인 해제’라고 외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고, 각인의 힘을 불러올 때는 해당 성좌를 연상하고 ‘부채’처럼 대표적인 성물을 외치면 된다”고 아주 자세히 설명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걸 왜 말하냐”고 발광합니다.]

각인의 사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단 내가 갑이니까 해령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나는 은빛 용의 몽환적인 자태가 그려진 부채를 활짝 폈다.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은구슬 장식이 맑은 소리를 내며 빛났다.

샤레니안의 불사검보다는 예쁘긴 한데, 부채로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

해봤자 부채질 아니야?

별다른 생각 없이 베란다 쪽으로 부채를 펄럭인 순간.

[성좌의 부채가 ‘잔잔한 바람’을 일으킵니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돌풍이 일며 집의 한 부분이 통째로 뜯겨나가고.

파스스…….

베란다는 순식간에 공중분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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