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파스스……
찰칵!
등 뒤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사우나 통으로 얼굴을 가렸다.
누가 날 찍은 거지?
설마 박시우인가?
“저기 혹시…… 온천 사장님 아니세요?”
어깨 너머로 미성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박시우 목소리는 아니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사진이 찍혔으니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닌데요?”
“그럼 사우나 통은 왜 들고 계세요? 이건 온천 사장님이 문지기 영감한테 주고 간 거라고 들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발뺌을 해봤지만, 남자가 이번에는 사우나 통을 물고 늘어졌다.
젠장, 들켰다.
“영감님, 잠시만 귀 좀 막아보실래요?”
“자네는 매번 볼 때마다 내게 귀를 막으라고 하는군.”
“역시 온천 사장님이 맞으신 거죠?”
흰 수염 영감과 내 대화를 듣던 남자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얼굴을 확인하려는 남자를 피해 요리조리 몸을 돌렸다.
서둘러야 하는데.
그렇다고 영감님 앞에서 욕을 할 수도 없고.
“시우 형! 빨리 와요! 여기 온천 사장님이 계신다고요!”
설마, 저 남자가 부르는 ‘시우 형’이 내가 아는 그 박시우가 맞나……?
남자는 뒤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가 전보다 많아졌다.
“진짜 온천 사장님이 계신다고? 아이고~ 사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뭐야, 진짜 박시우 목소리잖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저것보다 더 간사할 수 있는 목소리는 없다.
“영감님, 어서요!”
“거참, 알겠다. 이제 됐는가?”
재촉에 못 이긴 영감이 두 귀를 막았다.
“시X!”
난 다급하게 암호를 내뱉었다.
[‘온천 마스터키(EX)’의 암호와 일치합니다.]
[히든 필드 ‘온천(EX)’으로 이동합니다.]
온천에 도착한 나의 머릿속이 급속도로 복잡해졌다.
어떡하지? 카메라를 등지고 서 있었으니까 얼굴은 나오지 않았겠지만, 박시우 눈썰미 정도면 뒷모습으로도 단번에 알아볼 텐데.
이러다 다 들통나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섰지만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혹시라도 박시우나 지호가 집으로 돌아올 경우,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전에 사우나 통을 가져다 놓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는 온천의 문을 열고 거실로 돌아왔다.
다행히 아직 둘은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아악! 이놈의 사우나 통 때문에!”
아니지. 정확히는 ‘우나에 대한 박시우의 집착’ 때문에 내 존재가 세상에 들통날 위기에 놓였다.
사우나 통을 거실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던진 나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곧장 익명 헌터 게시판에 접속했다.
내 사진이 퍼진다면 가장 먼저 이곳에 올라오겠지.
일단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46층 온천 사장 출몰! (사진o)>
역시 빠르네.
그새 게시글이 올라왔다.
불안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게시글을 눌렀다.
[사진]
* * *
사우나 통 수거하러 오신 온천 사장님 발견했음. 언뜻 봤는데도 핵존예 여신임. ༼;´༎ຶ ༎ຶ༽ (오열) 반짝반짝 빛나는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가 딱 맑은 날에 햇살 비추는 바닷가의 사파이어색이었음. 완전 내 취향 저격당함. 여기가 내가 누울 자리인가? ●▅▇█▇▆▅▄▇ 사장님, 갑자기 사라지셔서 미처 전하지 못한 말이 있는데. 욕하는 목소리도 완전 섹시하십니다. ༼;´༎ຶ ༎ຶ༽ (오열) 제발 저한테 한 번만 더 욕해주세요.
* * *
└익명1 : 헐? 온천 사장이 여자였어?
└쓰니 : 심지어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해도 20대 초반이셨음.
└익명1 : 솔직히 온천 사장이래서 50대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색안경 쓰고 있었다는 걸 깨달음. 반성합니다.
└익명2 : 근데 온천 사장이 욕했다는 이야기는 뭐임? 둘이 초면 아님?
└쓰니 : 거침없는 성격 오히려 좋아!♡♥ 욕하기 전에 문지기 영감한테 귀 막으라고 함. 어른 공경하는 동방예의지국의 스윗함에 두 번 반함. ༼;´༎ຶ ༎ຶ༽ (오열) 사장님!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더 저한테 욕 박아주세요!
└익명3 : ㅋㅋㅋㅋㅋㅋ아니, 욕을 얼마나 찰지게 하길래 욕 구걸까지 하는 거임? 나도 한번 들어보고 싶네.
└익명4 : 저도요. ㅋㅋㅋㅋㅋㅋ
└익명5 : 얘들아. 46층 좌표 찍고 가자!
└쓰니 : 응. 이미 집필이 선점했쥬? ^^
그새 46층에 진을 치고 앉은 건가?
그래,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이 사진 속 여자는 도대체 누구야?
게시글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사진 속 뒷모습의 여자는 은발을 하고 있었다.
사우나 통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걸 봐선 내가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왜 머리카락이 은빛이지?
카메라 필터를 과하게 썼나?
하지만 글쓴이 역시 게시물에 은발에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직접 목격했다고 적어놓았다.
눈까지 필터를 씌운 건 아닐 거 아냐?
아무 생각 없이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내 머리카락을 내려다봤다.
그럴 리 없는데 설산처럼 새하얀 은발이 보였다.
새끼발가락을 부딪친 충격이 너무 컸나 보다.
이제 헛것이 다 보이네.
소리 없이 웃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실의 전신 거울 앞으로 걸어가 섰다.
거울 속에는 글쓴이가 묘사한 글처럼 신비로운 은발에 보석 같은 물색 눈동자를 가진 미녀가 나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반쯤 넋을 놓은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급기야 내 뺨을 소리 나게 쳤다.
짝!
그러자 거울 속 미녀가 나와 동시에 제 뺨을 쳤다.
이거…… 진짜 나잖아?
어떻게 이게 나일 수가 있지?
[‘온천 사장’이 성좌 ‘온천의 지배자’의 각인이 발현된 걸 자각합니다.]
[성물 ‘온천 지배자의 귀걸이’를 획득합니다.]
[성물 ‘온천 지배자의 부채’를 획득합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각인이라니?
온천 지배자면, 해령을 말하는 거잖아?
어느새 거울 속의 내게는 해령처럼 밝은 바다색 천으로 장식된 귀걸이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그의 부채가 들려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얼떨떨하기만 한 그때, 내 앞으로 창이 떠올랐다.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해령이 계약자에게 각인을 새기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며 놀라워합니다.]
‘각인이 뭐길래 그렇게 놀라는 건데? 갑자기 난 왜 이렇게 변한 거고?’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상황을 구경하다가 “각인을 새기고 발현되면 해당 성좌와 영혼을 공유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영혼을 공유해? 그러면 해령과 영혼이 바뀌거나 내 몸에 해령의 영혼이 들어오거나 뭐 그러는 거야?’
그게 사실이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그 말대로만 됐다면 재미있는 구경거리였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운수가 실망하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은 착각일 거다.
내 심신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건데? 제대로 설명해봐.’
난 운수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불안해할 것 없다”며 “각인이 발현되면 해당 성좌의 능력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거니까 네게는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해령이 가진 힘만큼 강해질 수 있다는 거야?’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생각했던 것만큼 바보는 아니었다”며 빠르게 이해하는 것에 놀라워합니다.]
왜 같은 말을 해도 운수가 하면 재수 없지?
이가 바드득 갈리긴 했지만, 수확이 있으니 한 귀로 흘리기로 했다.
그렇다면 영혼을 공유하게 되어서 외형도 해령처럼 변한 건가?
귀걸이랑 부채를 얻은 것도 그렇고.
[성좌 ‘불사의 살인귀’가 고개를 끄덕이며 “게다가 계약자가 수명대로 살지 못하면 각인을 새긴 성좌도 타격을 받아서 목숨 걸고 지키는 수밖에 없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요약해서 말하자면 갑과 을이 바뀌는 건데, 해령이 왜 각인을 새겼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의문스러워합니다.]
그러고 보니 온천수에 휩쓸렸을 때, 해령이 내게 숨을 불어 넣어주며 각인을 새긴다는 문구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때는 본인이 잠시 미쳤었던 것 같다며 “각인을 무르는 게 어떻냐”고 묻습니다.]
‘기껏 갑이 됐는데, 내가 왜?’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해령이 제대로 덜미를 잡혔다”며 배를 잡고 뒹굽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운수를 믿으십니까?’의 창을 싫어합니다.]
‘근데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다시 각인의 힘을 사용하고 싶을 때는?’
정체를 숨길 수 있어 편할 것 같지만, 혹시 못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된다면 역효과가 났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각인을 사용하는 방법은 알려주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각인 해제’라고 외치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고, 각인의 힘을 불러올 때는 해당 성좌를 연상하고 ‘부채’처럼 대표적인 성물을 외치면 된다”고 아주 자세히 설명합니다.]
[성좌 ‘온천의 지배자’가 “그걸 왜 말하냐”고 발광합니다.]
각인의 사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일단 내가 갑이니까 해령의 힘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알겠는데,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나는 은빛 용의 몽환적인 자태가 그려진 부채를 활짝 폈다.
부채가 움직일 때마다 화려한 은구슬 장식이 맑은 소리를 내며 빛났다.
샤레니안의 불사검보다는 예쁘긴 한데, 부채로 할 수 있는 게 있긴 해?
해봤자 부채질 아니야?
별다른 생각 없이 베란다 쪽으로 부채를 펄럭인 순간.
[성좌의 부채가 ‘잔잔한 바람’을 일으킵니다.]
콰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센 돌풍이 일며 집의 한 부분이 통째로 뜯겨나가고.
파스스…….
베란다는 순식간에 공중분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