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저승행 직행열차
호감도 퀘스트를 다 클리어 했다고?
해령과 샤레니안의 퀘스트는 진작에 완료된 상태였다고 하지만, 운수랑 염라에게는 언제 호감을 얻은 거지?
그러고 보니까 운수는 내내 약 올리다가도 내가 위기를 맞을 때면 꼬박꼬박 힌트를 주곤 했었지.
어쩌면 생각보다 정이 많은 인물일지도 몰랐다.
운수는 그렇다 치고, 염라는?
운수는 짚이는 데라도 있었지, 염라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
지난밤엔 내가 탕에서 쓰러져버린 데다 아침까지 나한테 잡혀 있느라 온천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호감보다는 민폐에 가까운 거 아닌가?
의문이 구름처럼 한가득 피어났지만, 어떻게 내가 그들의 심중을 다 알겠어.
그래,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까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어?
중요한 건 내가 호감도 퀘스트를 다 완료했다는 거지!
이번 히든 스탯은 뭐려나?
나는 한껏 부푼 기대감을 안고 시스템창을 켰다.
[히든 스탯 : ????]
물음표 네 개 뭔데?
히든 스탯에 걸려 있던 자물쇠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물음표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히든 스탯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히든 스탯 개방됐다며.
그럼 뭔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누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의문만 가득해지자 뒷골이 뻐근해지는 걸 느끼며 나는 시스템창으로 눈을 돌렸다.
[히든 퀘스트(EX)가 열립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히든 스탯이 개방되면서 함께 열리는 퀘스트인 걸 보니 서로 관련이 있는 것 같긴 한데 EX급 퀘스트라니 왠지 받아들이기 망설여졌다.
SS급 던전 브레이크에서도 개고생했던 기억이…….
EX급 퀘스트면 또 얼마나 굴러야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난 온천 사장만으로도 잘 먹고 잘살 수 있는데 굳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을 필요가 있을까?
내 오해에서 비롯된 망상이었지만, 황천길 간접 체험까지 하고 보니 안전한 곳에서 큰 욕심 없이 소소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최고였다.
당장에 해야 할 온천 일들도 꽤 쌓였으니 이번 퀘스트는 수행하지 않고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결정을 내린 그 순간, 시스템창이 어딘가 허전해 보였다.
……뭐 때문에 거절 버튼이 없는 거죠?
버튼을 찾지 못한 손이 허공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자 눈앞에 새로운 알림 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EX)를 수락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진행합니다.]
퀘스트 너 혹시 답정너야?
혼자 묻고 답할 거면 왜 물어봤어?
물어볼 거면 선택지를 주든가, 선택지도 안 줄 거면 차라리 물어보지를 말든가!
그때, 꼭 내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시스템창이 선택지 창을 열었다.
[다음 중 히든 퀘스트(EX)를 진행할 성좌를 선택해주세요.]
[1. 해령 2. 운수 3. 샤레니안 4. 염라]
선택지가 네 개라는 건, 네 명 모두 퀘스트가 있다는 건가?
여기서 중요한 건 이번에도 거절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 중에서 누구 하나를 꼭 골라야 한다는 건데.
해령? 앞서 2단계 스킬 개방 퀘스트를 해봐서 알지만, 수월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일단 패스.
운수? 살가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묘하게 벽이 있는 느낌이랄까?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렇고.
운수는 일단 보류!
다음은 샤레니안인데, 사실 이 선택지가 제일 만만했다.
탑에서 내가 베카에게 위협당했을 때 모두가 외면했지만 그만큼은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다.
놀아달라고 꼬리치는 순종적인 대형견 같은 느낌도 있고 말이야.
그래, 이번엔 너다!
사실상 결정이 난 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예의상 마지막 선택지로 눈을 옮겼다.
염라, 이 중에서 제일 아는 게 없는 인물이었다.
어제만 해도 그래, 누가 온천에 갓을 쓰고 오냐고.
시도 때도 없이 명부 이야기를 하는 것도 그렇고.
알고 보니 진짜 저승사자인 거 아냐?
잠시 심각해졌지만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내가 말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때 염라가 앉아 있던 자리에 떨어져 있는 종이 한 장을 발견했다.
이거, 오늘 아침에 염라가 보고 있던 서류인 것 같은데.
무심결에 종이를 집어 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종이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사망 일자, 시간, 그리고 죽는 장소와 사인이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이거 꼭 진짜 명부 같잖아.
게다가 그곳에 쓰인 사람들의 사망 일자는 전부 오늘이었다.
박태훈/ 20XX.X.X / **동에서 일어난 D급 던전 브레이크에 휩쓸려 D등급 슬라임의 공격으로 즉사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난 탁상에 올려뒀던 폰을 집어 들어 명부에 있는 이름을 검색했다.
검색 결과 가장 위에 연관 뉴스가 떠 있었다.
**동에서 땅이 꺼지더니 돌연 D급 던전 브레이크 발생해 1명 사망…
…사망자 명단(1명) 박태훈
종이에 적힌 내용과 뉴스 기사는 틀린 것 없이 완벽하게 맞아들어갔다.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른 이름들도 모두 검색해본 나는 그만 종이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맙소사, 전부 종이에 적힌 내용과 똑같은 이유로 죽었잖아?
‘이게 진짜 명부라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어쩐지 명부가 한 장이 비더니 그곳에 있냐”며 이마를 짚습니다.]
‘내가 아는 염라가 진짜 저승의 염라대왕이라는 거야?’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럼 이때까지는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냐”며 의문을 가집니다.]
‘……저승사자?’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대답을 망설였다며 “이걸로 염라를 미친X 취급한 게 분명해졌다”며 허를 찌릅니다.]
눈치 빠르긴.
[성좌 ‘저승의 염라’가 “원한다면 명이 다했을 때 직접 저승으로 데려가주겠다”고 합니다.]
‘아니요. 정중히 사양합니다.’
그런 약속을 해버리면 만날 때마다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인지를 의심하게 될 것 같아.
다른 건 몰라도 확실하게 4번만은 피해야만 했다.
염라가 진짜 염라대왕인 이상 저승행은 피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퀘스트 하나 깨자고 목숨까지 걸 순 없잖아.
왠지 염라의 퀘스트가 EX급인 이유는 목숨을 내놓아야 해서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성좌명부터 저승의 염라인데 그걸 왜 모르냐”고 합니다.]
‘난 그냥 별명 같은 건 줄 알았지.’
어느 각성자가 염라대왕하고 계약 맺을 생각을 하겠어?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어제 저승의 담배 때문에 탕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은 들었다”고 합니다.]
‘담배?’
정작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나는 운수의 말에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성좌 ‘운수를 믿으십니까?’가 “기억 못하는 거냐”며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쉽니다.]
유독 탕 안이 뿌옇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난 당연히 김이 피어오른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다 담배 연기였어?
“담배 연기로 사람이 쓰러질 수도 있어?”
“저승의 담배라면 가능하지. 독한 약초로 만드는 거니까.”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해령이 대신 대답했다.
“몸은 좀 괜찮아? 허약한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자주 쓰러지다가는 조만간 진짜 염라가 데리러 오는 거 아냐?”
뒤이어 샤레니안까지 나타나 내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를 시작으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해령이 일렬을 맞춰 나란히 앉았다.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방 안이 두 남자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샤레니안, 약속할게. 그때가 오면 염라에게 명부를 빌려서 꼭 네 이름을 쓰고 길동무로 데려가겠다고.”
“주인도 참, 농담을 참 재밌게 하네.”
[성좌 ‘저승의 염라’가 “그런 이유라면 수락하겠다”며 흔쾌히 명부를 내밉니다.]
“이걸 어쩌나? 이제 농담이 아니게 됐네?”
내 서늘한 미소에 실없이 웃던 샤레니안이 조용히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풀이 죽은 얼굴을 보니 꼭 축 처진 강아지 귀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당연히 걱정되니까 왔지!”
“딱히 걱정되어서 온 건 아니고.”
같은 질문에 두 남자의 대답은 제각각이었다.
처음이 샤레니안, 다음이 해령이었다.
이로써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됐다.
[히든 퀘스트(EX)를 진행할 성좌를 선택해주세요.]
[1. 해령 2. 운수 3. 샤레니안 4. 염라]
이 중에서 내가 누굴 선택해야 하는지.
역시 샤레니안이 제일 만만해.
마음을 굳힌 나는 샤레니안을 선택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해순 씨, 솔직하지 못하긴. 주인이 걱정되어서 온 거 맞잖아! 내가 오기 전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2층 복도 앞을 서성이고 있었으면서.”
붙임성 좋은 리트리버처럼 샤레니안이 긴 두 팔을 뻗어 해령을 덮치듯이 들러붙었다.
“헛소리 말고 징그러우니까 저리 꺼져!”
해령이 제게 닿는 손길에 질색하며 파리를 내쫓듯 부채로 샤레니안을 쳐냈다.
그때, 부채가 일으킨 잔바람에 덩치 큰 샤레니안이 나비처럼 날아올라 벌처럼 내게로 내려꽂혔다.
그가 덮쳐 온 탓에 나까지 중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짓……!”
화를 내려던 찰나, 내 손이 무슨 짓을 했는지 확인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4. 염라’를 선택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저승행 직행열차’가 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