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저승에서 계약한 성좌를 만났다 (1)
‘모두 대피하라고 말해야 하는데…….’
[‘탑의 주인’에게 경배하라.]
베카와 눈을 마주한 순간, 시우는 무릎이 후들거렸으나 간신히 버티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은 베카의 위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보다 몸집이 한참 작은 데도 이렇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시우는 형용할 수 없는 힘의 크기를 느꼈다.
존재의 깊이부터가 다른 느낌.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이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뜻 모를 눈빛으로 시우를 보던 베카는 그의 얼굴에서 수온을 찾아냈다.
눈매와 코, 입매까지 그녀와 닮은 얼굴이었다.
‘수온은 가족이 다치는 것을 슬퍼하는 것 같았지.’
탑에서 수온을 처음 만났던 날, 실종된 부모님에 관해 말하던 그녀의 쓸쓸해 보이던 옆얼굴을 떠올렸다.
그의 눈동자에 일던 섬광이 잦아들었다.
“베카 님, 어째서 멈추시는 겁니까?”
베카의 폭주에 홀로 신이 났던 검은 박쥐가 아쉬워하며 물어왔다.
베카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분노와 좌절감에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수온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해서 힘을 조절할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그도 처음이었다.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던 수온을 떠올린 베카의 얼굴 위로 짙은 죄책감이 떠올랐다.
“오늘 던전 안에 있던 자들은 모두 탑 밖으로 옮겨놔라.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게.”
“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괴수들의 밥으로 주어도 모자랄 판에!”
날카로운 베카의 눈빛이 궁시렁거리던 검은 박쥐를 매섭게 관통했다.
간담이 서늘해진 검은 박쥐는 날개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수온이 더는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안함과 공허감, 초조함이 물밀듯이 베카를 집어삼켰다.
수온의 빈자리가 만든 상실감은 이제 다양한 감정의 호수가 되어 자신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되찾아와야지. 나의 수온을.’
멍하니 제자리에 머물고 있던 베카가 이윽고 걸음을 뗐다.
탑의 바깥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베카 님, 어디에 가시려고요?”
“저승으로 간다.”
“예? 갑자기 어디로 가신다고요? 베카 님!”
그 말 한마디를 끝으로 공중으로 떠올라 자취를 감추는 베카의 뒤를 검은 박쥐가 허둥대며 따랐다.
탑의 주인인 베카가 가지 못할 곳은 없었다.
그곳이 설령 산 자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지옥일지언정.
* * *
난 안개가 자욱한 저승의 길을 사자의 등불과 꼬리에 의지한 채 계속해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생사재판에서 이기려면 두 판관이 모두 인정할 만큼의 숭고한 업적이 있어야 한다는 거네요?”
“목소리를 낮춰라!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원래는 알려주면 안 되는 정보란 말이다! 도시락만 아니었어도! 크릉!”
“대답하기 싫으시면 도시락 도로 뱉어내시든가요?”
“누가 대답하기 싫다고 했냐? 크릉! 작게 말하자고 한 거지.”
내가 준 뇌물을 꿀꺽한 저승사자는 재판장으로 가는 동안, 울며 겨자 먹기로 생사재판에서 승소할 확률을 높여주는 조건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어째 들을수록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인데?
이제 스물셋,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바로 삶을 연명하며 살아갔던 백수나 다름없던 나한테 숭고한 업적이랄 게 뭐가 있겠어?
이제야 저승사자가 빠르게 포기를 외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대가 어떻게 온천표 돈가스 도시락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내가 알기로 그 온천은 명성이 드높으신 소수의 성좌님들만 손님으로 모시는 곳이라고 들었는데.”
명성이 드높은 성좌라고?
난 해순이 연기를 하기 위해 콧소리를 내는 해령과 어르신의 안경을 훔치고 혼나던 샤레니안, 내 삶을 재미난 구경거리로 여기는 운수를 떠올렸다.
명성은 잘 모르겠는데요…….
그나마 염라가 적합한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염라대왕이 내 성좌잖아?
어쩌면 이게 재판의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가 될지도 몰랐다.
솔직히 염라는 온천 사장이 누구여도 상관없어 보이긴 했지만, 새로운 온천 사장을 구하는 걸 귀찮아할뿐더러 온천이 닫혀 있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으니까 희망을 걸어볼 만할지도?
하지만 재판의 결과는 염라 혼자의 뜻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두 판관을 비롯해 재판을 보는 망자들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타당해야 한다고 했지.
그 말은 염라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불가능한 건가?
착찹한 현실에 마음이 저절로 심란해졌다.
“제가 그 온천 사장이거든요.”
아니다. 지금은 망자인 상태니까 이제 전(前) 온천 사장인 건가?
“크르르릉? 네가 그 위대한 온천의 사장이라고?”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에 저승사자는 대단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입을 쩍 벌리며 경악했다.
왜 이렇게까지 놀라는 건데?
무려 ‘EX급’ 온천이니까 위대하긴 하다만.
저승사자가 놀랄 정도로의 명성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온천 할아범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문을 듣긴 했지. 그후로 쭉 온천은 닫혀 있다고 들었는데, 왜 하필 새로운 사장으로 널 뽑은 거지?”
내가 온천 사장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사자가 나의 기록을 재차 살폈다.
“서류상으로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간 같은데…….”
“예,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라서 죄송하게 됐네요. 이래서는 확실히 생사재판에서 승산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퀘스트창 때문에 되살아났던 기운도 막막한 현실 앞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온천의 사장이라면 승산이 있을지도…….”
“드디어 도시락값을 주시려는 건가요?”
“그대의 말대로 이미 소화된 도시락을 뱉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해주도록 하지.”
내 능글맞음에 저승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종종 과로로 쓰러진 저승사자들이 그 온천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그대도 알다시피 염라대왕님께서 노고를 푸시는 공간이기도 하니까. 그대가 온천 사장으로서 공헌한 것이 있다면 재판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없나?”
저승사자가 처음으로 희망적인 얼굴을 했다.
내가 온천 사장으로서 공헌한 게 있나?
“메마른 온천에 온천수를 채웠죠?”
“그건 성좌님의 힘으로도 가능하다. 굳이 네가 온천 사장이어야만 하는 수긍할 만한 사건이어야 해.”
이제까지 온천에서 한 건 부엌에서 똥손으로 무시당하고 초록 괴물 쑥 라테를 만들어서 성좌들에게 먹였다가 배탈이 나게 한 것뿐인데.
이걸 말했다가는 고민할 것도 없이 패소하겠지.
아니야. 좀 더 정상적인 걸 생각해보자.
문제를 일으켰던 일들을 싹 빼고 나니 온천에서 해령이 해준 돈가스를 먹은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망자여,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 저승에서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아. 이승만큼은 아니더라도 복지도 잘되어 있고.”
오랫동안 침묵을 유지한 채 어두운 표정을 짓는 나를 지켜보던 저승사자가 큼직한 손으로 내 등을 다독였다.
다른 사자면 몰라도 재판도 전부터 과로사를 면하기 힘들 지경이라며 앓는 소리부터 내던 저승사자가 이렇게 말하니 전혀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체념하지 말라고요!”
“이제 다 왔군. 저곳이 그대가 재판을 치를 곳이다.”
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내 말을 한 귀로 흘린 저승사자가 등잔에 담겨 있던 등불을 높이 띄우자 주변이 환해지며 개미 떼처럼 줄지어 늘어선 망자들과 저승사자가 보였다.
“이게 다 재판을 보려고 기다리는 망자들이란 말이에요? 다 기다렸다간 이승에 있는 제 몸이 먼저 해골이 되어버리겠는데요?”
“걱정하지 마라. 이승의 시간은 저승에 비해 훨씬 더디게 흐르기도 하고, 판결이 나기 전에 육체가 손상되면 재판에서 승소하더라도 돌아갈 육신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생사재판은 우선권을 갖는다.”
“우선권을 가지면 뭐가 좋은데요?”
저승사자가 사건 번호를 내어 보이자 그곳에 있던 검은 갓을 쓴 또 다른 사자가 번호표를 내줬다.
“지금 당장 재판이 가능하지.”
“예? 당장이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는데?
이건 너무 빠르잖아!
줄 안 서는 건 좋은데 여긴 놀이 동산이 아니잖아!
말릴 새도 없이 저승사자가 번호표를 찢었다.
그러자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찰나의 순간에 나와 사자는 재판장으로 순간 이동 했다.
시끌벅적했던 방금 전과 달리 주변이 갑자기 고요해졌다.
저승사자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등불이 곳곳을 밝히고 있는 재판장은 어딘가 스산한 데다가 활기조차 없어 보였다.
“저 목이 긴 새와 검은 고양이가 판관들이다.”
사자의 귓속말에 내 눈은 갓을 쓰고 있는 흑두루미와 흑호에게로 향했다.
흑두루미를 목이 긴 새라고 한 건 그렇다고 쳐도 저건 누가 봐도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잖아.
이승에서는 보기 힘든 구경거리에 주변을 살피던 난 마침내 재판장의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 위엄 있게 앉아 있는 염라를 발견했다.
여기서 보니까 포스가 남다른데?
진짜 염라는 염라대왕이었구나.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는데 곰방대를 물고 있던 염라가 내 편을 내려다봤다.
날 발견하자 고고한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며 입에 물고 있던 곰방대가 아래로 떨어졌다.
“네가 어째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