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나쁜 짓
“잡았다, 박수온.”
나는 샤레니안에게 잡힌 손을 힘껏 들어 올려 그의 널따란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아악!”
짧고 굵직한 비명을 내지른 샤레니안이 맞은 부위를 매만지며 촉촉이 젖은 눈가로 나를 바라봤다.
“아프잖나?”
“그러게 맞을 짓을 왜 해? 쓰러진 줄 알고 놀랐잖아!”
나는 샤레니안의 눈물에 현혹되지 않고 꿋꿋이 목청을 높였다.
“네가 너무 늦게 와서 기다리다 지쳐서 쓰러진 거다.”
얼씨구,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마치 미리 준비해둔 것처럼 막힘없이 핑계를 늘어놓은 샤레니안이 두 팔을 겹쳐 턱을 괴고 엎드린 채로 강아지처럼 낑낑 앓는 소리를 냈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힌 줄 알겠네!
“불쌍한 척해도 안 통하니까 한 대 더 맞고 싶지 않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내 경고에 샤레니안은 자신의 수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샤레니안, 이제 보니까 아주 연기가 수준급이네.
불사신 성좌만 아니었으면 배우를 해도 됐겠어.
거대한 골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 가운을 걸치고 한 손으로 턱을 괸 그의 모습은 흡사 영화 포스터 같았다. 나 말고 누군가 보았다면 아마 그대로 매혹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이 정도면 성좌 외모가 EX급인 온천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군.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다.”
그때 잠자코 있던 샤레니안이 본인도 할 말이 있다는 듯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놀랄 일이 뭐 있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샤레니안이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네 손이 생각보다 더 매워서. 불사검도 들지 못하길래 힘이라고는 도통 없는 줄 알았는데 얕봤다가는 큰코다치겠어.”
샤레니안이 두렵다는 눈길로 자신의 등을 후려친 나의 손을 바라봤다.
그게 꼭 그렇게 심각하게 말해야 할 일이냐?
“우리 샤레니안이 아직 덜 맞았구나?”
환한 미소를 띤 내가 손가락을 쥐었다 펴며 회심의 일격을 준비하자 샤레니안이 말리듯 내 손을 움켜쥐었다.
“나 이래 보여도 명색이 환자인데 정말로 때릴 건가?”
그러더니 뺨에 난 상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저 상처가 무기지 그래.
다른 성좌들 사이에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가만 보면 샤레니안은 의외로 지능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나한테는 안 통하지!
“환자는 무슨? 딱지가 앉은 거 보니까 상처도 거의 나은 것 같은데?”
오래전에 생긴 거라 그런지 샤레니안의 뺨에 난 상처는 거의 아물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평범한 연고만 몇 번 발라도 완전히 나을 것 같은데, 엄살은!”
이 정도 엄살이면 박시우와 견줄 만했다.
박시우는 손에 거스러미만 떼도 아파 죽겠다며 마데X솔에 밴드까지 덕지덕지 붙이고 나야 잠잠해지던 인간이니까.
“어젯밤에도 전장에서 칼을 맞았는데…….”
내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이자 샤레니안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제서야 등에 칼을 맞았다던 시스템창 알림이 기억났다.
어제 칼을 맞은 것치고는 멀쩡해 보이지만 뭐, 괜찮은 척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
지난번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을 때도 자신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았으니까.
……어쨌든 환자는 환자인가?
“이번만 넘어가주는 거야. 알겠어?”
“응, 고맙다. 주인.”
넘어가주겠다는 말에 샤레니안은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빙긋이 웃었다.
두 손을 모으고 앉은 그의 뒤로 힘차게 움직이는 강아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대형견을 키우는 게 이런 느낌인가?
덩치가 이렇게 큰 데도 귀엽게 느껴질 수 있는 거구나.
……잠깐만, 나 지금 샤레니안이 귀엽다고 했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난 다급히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대체 왜 이러…….”
“어디가 안 좋은 건가?”
갑작스러운 나의 행동이 걱정스럽게 느껴졌는지 샤레니안이 인기척을 느낄 새도 없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다가오는 만큼 멀어지며 대놓고 그를 경계했다.
이거…… 샤레니안이 아니라 내가 환자인 걸지도…….
“뭐지? 갑자기.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네.”
고양이 앞에 선 쥐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에 샤레니안이 입가를 비스듬히 올려 웃었다.
“하긴 했지. 방금 네가 쓰러진 척하는 바람에 놀란 여운이 남아서 그래.”
“흐응……. 그렇군.”
샤레니안은 입으로만 수긍할 뿐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틀렸어.
빨리 약을 발라주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상책이었다.
“자, 약 발라 줄 테니까 뺨 이리 대.”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새살이 솔솔이 담긴 약통 뚜껑을 열며 샤레니안을 향해 손짓했다.
“자.”
그러자 샤레니안은 나에게 모든 걸 맡기듯 순순히 내게로 몸을 낮춰왔다.
큼직한 골격만큼이나 또렷한 이목구비가 가까워졌다.
“어디 봐.”
나는 새끼손가락에 약을 덜어내고 다른 손으로 샤레니안의 턱을 잡아 고정했다.
“혹시라도 아프면 말해.”
딱지가 앉아 있긴 했지만 살갗이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였기에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을 발랐다.
“몇 번을 봐도 이상하군.”
약을 바르는 나를 지켜보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샤레니안이 의문스럽다는 듯 혼잣말처럼 말을 흘렸다.
“또 무슨 말로 나를 열 받게 하려고?”
“열 받게 하다니 섭섭하게. 나는 언제나 쭉 주인의 편에 서 왔는데 말이야.”
찬찬히 생각해보니 샤레니안의 말이 맞았다.
처음 온천에 왔을 때도, 탑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도, 심지어 모두가 내 애착 잠옷을 부끄러워할 때도 샤레니안은 변하지 않고 내 편이 되어줬다.
샤레니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떠올려보기 전까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어.
그야 탑에서 도와달라고 했더니 자기가 애용하는 때수건을 주지를 않나, 지호 앞에서 잠옷 차림이 되어 들키기 직전이었는데 난데없이 같이 잠옷을 입고 서 있어주겠다고 하지를 않나.
워낙 황당했던 터라 도움을 받았다기보다는 골치가 아팠던 기억으로 남아 있었는데, 샤레니안 입장에서는 선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몰라줬던 걸지도 몰라.
사실은 온천의 성좌 중에서 제일 편하게 느껴져서 격 없이 대한 거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소꿉친구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그럼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샤레니안에게 도움을 받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가 했던 말로 화제를 돌렸다.
“……신기하다는 뜻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샤레니안이 내 물음에 담백하게 대답했다.
“내가 불사신이라는 걸 알고도 치료를 해준다는 게. 보통은 놔두면 알아서 나으니까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든. 나조차도 그랬고.”
치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평소보다 한껏 차가워진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의 대답에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감히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남들은 그렇다고 쳐, 그런데 뭐?
나는 약을 바르고 있던 손으로 샤레니안의 상처를 있는 힘껏 눌렀다.
“으헙!”
그러자 내가 등을 후려쳤을 때처럼 샤레니안이 신음을 흘렸다.
“느닷없이 왜 이러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했나?”
“그럼 잘못했지!”
내 격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억울해하는 샤레니안에게 나는 허리를 바르게 세워 앉으며 맞섰다.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건데?”
“너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은 거. 너도 다치거나 맞으면 아프잖아.”
상처 조금 난 것으로 엄살을 피울 만큼 아파했으면서.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내던지는 게 꼭 지호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치료를 받아야지! 고통을 느끼는 건 죽지 않는 것과는 별개잖아! 이 바보야!”
샤레니안을 향해 소리치는 그 순간, 머릿속으로 희미한 장면이 스치고 지나갔다.
“……잖아! 이 바보야!”
지금 이 장면, 전에도 봤던 것 같은데…….
내가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
동시에 내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내가 왜 우는 거지?’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얼떨떨해하는 내 뺨 위로 샤레니안의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이내 내 얼굴을 감싼 샤레니안의 손이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나의 눈물을 어루만졌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샤레니안의 입가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박수온.”
그때……?
언제를 말하는 거지?
이전에도 샤레니안을 만난 적이 있었나?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그때,
[성좌 ‘불사의 살인귀’의 XX가 2000 상승합니다.]
샤레니안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칠흑같이 짙은 까만색의 시스템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