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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95)화 (95/190)

95화

보고 싶어서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에 송골송골 맺힌 이슬 때문인지 염라는 다른 때보다 유난히 청초해 보였다.

나와 눈을 맞추는 순간 그의 선홍빛 입술이 삐뚜름히 올라갔다.

또 얄밉게 웃네? 그렇게 날 놀리는 게 재미있는 건가?

세상 모든 것에 관심도 없을 것처럼 무심하게 생겨서는, 유치원생처럼 토마토라고 놀리기나 하고 말이야.

완전 안 어울려.

“이제는 아예 날 토마토라고 부르기로 정한 거야?”

“아직은 토마토보다는 박수온에 가까운 것 같군.”

토마토라는 말에 면역에 생긴 내가 전처럼 얼굴이 붉어지지 않자 염라는 내심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원래 장난에 반응해주지 않으면 놀리는 것도 금세 시들해지는 법이거든.

내가 유치원 때 돈가스 괴물이라는 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박시우가 돈돈이라고 부르는 건 여전히 열 받지만…….

난 문득 뱀처럼 쉴 틈 없이 혀를 날름거리며 날 놀려대던 박시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생각만 해도 주먹이 마렵네.

그에 비하면 염라는 양반이지.

평생 박시우의 놀림을 받던 내게 염라는 충분히 감당 가능한 범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리거나 말거나 오더만 제대로 수행하고 돌아가면 되는 거 아니겠어?

“지금 토마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오더 내용을 떠올린 나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염라의 앞에 쑥 라테가 놓인 쟁반을 내려놓았다.

“너 진짜 쑥 라테 주문한 거 맞지?”

“그렇다.”

염라는 어렵지 않게 고개를 까딱이며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너한테는 큰 문제가 아닐지 몰라도 난 달라!

괜히 염라에게 쑥 라테를 먹였다가 저승에 있는 판관들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단 말이야!

특히 흑대머리 아니, 흑두루미한테 말이야!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몰랐으면 모를까.

알아버린 이상 판관들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게 없었다.

쑥 라테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싶지는 않아!

“쑥 라테, 위험한 거 알지? 독에 면역이 있는 샤레니안도 이건 못 버텼어.”

“그래서?”

담담한 염라의 반응을 보니 쑥 라테의 위험성에 대해 모르고 오더를 넣은 것 같지는 않았다.

“각서를 쓰거나 그게 아니면 구두로라도 약속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원해서 주문한 쑥 라테니까 이걸 마셨다가 어떤 문제가 생겨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그러지.”

이렇게 쉽게 동의한다고?

대답을 끝낸 염라는 겁도 없이 쑥 라테가 든 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당황한 나는 반사적으로 쟁반을 뒤로 치워버렸다.

“아직 하나 더 남았어. 내가 저승에 갔을 때 이 일로 어떤 불이익도 당하지 않게 한다고 약속해줘.”

“벌써 잊은 건가?”

불안해하는 나를 바라보던 염라가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슬며시 내 손등 위에 포갰다.

염라의 나비 문양 각인이 나타났던 자리였다.

“여기에 내 각인이 있는 한 네가 걱정할 일은 없다. 이승에서도 저승에서도.”

각인한 자리를 바라보는 염라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확고했다.

그 검붉은 눈동자 위로 검고 짙은 속눈썹이 내려앉았다.

하긴, 각인이 있는 동안에 내게 문제가 생기면 염라도 타격을 입으니까 판관들도 내가 위험해질 일을 하진 않겠지.

염라의 각인은 내게 각서보다도 큰 믿음을 줬다.

“난 분명히 말렸어.”

“괜찮다. 난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편이고 온천에 올 때마다 쑥 라테를 마실 정도로 좋아하니까.”

이건 까다롭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니까.

염라는 전혀 위기감이 없어 보였다.

백번 말해서 뭐해? 한 번 당해보는 게 낫겠지.

마지못한 내가 염라에게 쑥 라테가 담긴 쟁반을 내어줬다.

잔을 든 염라가 쑥 라테의 향을 음미했다.

“향은 나쁘지 않군.”

그렇겠지. 쑥을 잔뜩 넣어서 쑥 향밖에 안 나니까.

향에 문제가 없는 것에 안심한 건지 염라는 주저 없이 잔을 들이켰다.

으앗, 난 몰라!

염라의 목울대가 출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쑥 라테를 시음한 염라는 예상과 달리 큰 표정 변화가 없었다.

걱정과 달리 이번 쑥 라테는 괜찮았던 걸까?

염라의 침묵이 길어지자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쑥 라테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또한 커져만 갔다.

……쿨럭!

잠자코 있던 염라가 갑자기 거친 기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염라, 갑자기 왜 그래? 사레라도 들었어? 물 가져다줘?”

“그대는…….”

내가 팔을 잡아 부축하자 기침을 간신히 멈춘 염라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가까운 곳에서 본 염라의 눈동자는 타오르는 불꽃처럼 아름다웠다.

“……암살자인가?”

비록 염라의 말은 아름답지 못했지만.

또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말할 건 뭐람?

“그러게 내가 뭐랬어? 마시지 말랬잖아!”

잠시나마 기대감을 품은 탓에 더 민망해진 난 염라에게서 잔을 뺏어 들었다.

“이제야 주문한 대로 왔군.”

쑥 라테의 맛을 봤으니 다른 성좌들처럼 큰 충격을 받거나 공포에 치를 떨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염라는 전보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염라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띠링!

[4번 오더를 성공적으로 완료합니다.]

[4번 오더 완료 보상으로 근무 태만 면제권(7일)을 획득합니다.]

[4번 오더 완료 보상으로 5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오더 완료를 알리는 나무판이 떠올랐다.

오더가 완료됐다고?

순간 내 머릿속으로 염라가 시킨 오더의 내용이 스치고 지나갔다.

[오더 내용 : 쑥 라테 한 잔과 박토마토]

아, 설마…….

나는 두 손을 내 얼굴에 가져가 댔다.

양 볼이 따끈했다.

어쩐지 열감이 느껴진다 했더니 얼굴이 빨개진 모양이었다.

“그대가 토마토가 됐으니까.”

날 바라보는 염라는 마치 그걸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너 설마 나한테 쑥 라테를 시킨 이유가…….”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자 염라는 굳이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염라, 이 녀석! 평소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굴면서 은근히 계략남이잖아?

황당해서 할 말을 잃은 나를 염라가 지그시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하면 왠지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얼굴을.”

날 놀리는 게 그렇게 좋은 거냐? 이 암살 쑥 라테를 들이킬 만큼?

“너 그거 악취미야.”

“취미라……. 처음이군. 그런 게 생긴 것도.”

그건 좀 의외인데.

염라면 나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을 텐데 취미도 하나 없어?

“좋아하는 것도 없어?”

“없다.”

염라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답했다.

“거짓말, 너 좋아하는 거 있잖아. 담뱃대. 손에서 놓지를 않더만.”

“좋아한 적 없다. 저승초는 담배가 아니라 감각을 무디게 하는 진통제니까.”

저승초가 진통제라고?

“담배도 아닌데 왜 담뱃대로 펴?”

“저승초의 약효는 태우는 형태로밖에는 들지 않는다. 이래 봬도 엄연히 약 항아리가 처방해준 약이지.”

어르신이 처방해줬다는 걸 보면 진짜 약이긴 한 것 같은데…….

얼굴에 통 핏기가 없어 보이던 건 저승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아파서였던 건가?

그렇다기에는 비실거리는 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몸은 오히려 좋은 편이지.

“어디가 아픈 거야?”

“별거 아니다. 그저 두통 같은 거지. 쉬지 않고 일을 하다 보면 찾아오는.”

어쩐지 매번 볼 때마다 일에 파묻혀 있는 것 같더라니.

“그렇게 무리해서 일하니까 병이 찾아오는 게 당연하지.”

“그게 내가 맡은 소임이다.”

쉴 틈 없이 일하는 염라가 안쓰러웠지만 정작 그는 단 한 번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그마저도 염라는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언뜻 들은 바로는 저승초는 독한 약초라고 했다.

나 같은 인간은 향을 맡는 것만으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런 독한 약으로 고통을 잊으면서까지 일을 해야 하다니, 염라대왕으로 사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다음부터 피로해지면 저승초 피우지 말고 온천으로 와. 내가 해령한테 피로를 푸는 향료를 만드는 법을 배워둘 테니까.”

염라는 쉬는 법을 모르는 것 같으니까. 억지로라도 휴식을 취하게 하지 않으면 무리하다가 몸이 망가지고 말겠지.

실종되기 전 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물론 향료 값은 따로 받을 거야.”

내가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자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염라가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러지.”

아주 잠깐이지만 염라가 당황하는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인가?

슬쩍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살피려던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들렸다.

띠링!

[4번 오더 완료 특수 보상(오더 의뢰자 : 저승의 염라)을 획득합니다.]

[!!저승의 눈 2단계 스킬 개방 자음 힌트를 획득합니다!!]

[2단계 스킬을 개방할 때까지 필요한 염라의 ‘ㅅㅈㅎ’ 기억 : 0/3]

하다 하다 이제는 초성 퀴즈까지?

물론 나야 힌트가 있는 편이 유리하긴 하다만.

이왕이면 다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시스템의 쪼잔함을 탓하고 있는 그때, 전보다 조금 더 진해진 보랏빛의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2단계 스킬을 개방할 때까지 필요한 염라의 ‘ㅅㅈㅎ’ 기억 : 1/3]

[특수 스탯 ‘저승의 염라’의 XX이 1000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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