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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급 온천 사장은 파업 중입니다 (128)화 (128/190)

128화

좋은 꼬리였다

편의점에서 일회용 우비와 우산을 사 들고 온천으로 돌아오는데 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또라이 xxx-xxxx-xxxx

발신자는 다름 아닌 박시우였다.

‘박시우가 웬일이지?’

익명 헌터 게시판에 올라온 정보에 의하면 그는 PC방에서 내 온천표 돈가스 판매 글이 올라오길 기다리며 열심히 새로 고침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귀찮아서 받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문득 지호가 입원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또 무슨 일 생기기라도 한 거 아냐?’

계속 찜찜한 기분으로 있을 바에는 귀찮아도 받는 게 나았다.

난 긴 한숨을 뱉어내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갔다.

―박수온, 너 지금 어디야?

평소와 다르게 심각한 박시우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본능이 말했다.

그냥 무시할걸 그랬다고.

“나 지금 해순이 집이지, 갑자기 그건 왜?”

―친구 집이 우리 집이랑 가깝냐?

집 위치는 왜 묻는 거지?

박시우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그 말은 저 질문을 던진 의도가 있다는 거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멀지?”

난 최대한 애매하게 답했다.

언제든지 박시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갈 수 있게.

―어정쩡하게 답해도 소용없어. 내가 방금 널 봤거든.

날 봤다고?

‘아…… 설마…….’

버릇처럼 자주 가는 편의점을 이용하긴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그 건물 2층에 PC방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박시우가 있다는 PC방이 거기였어? 왜 하필이면 내가 갔을 때 그 편의점에 있는 건데?’

피는 못 속인다더니 단골 편의점도 같은 모양이었다.

‘빨리 운수한테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을 나와서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마스터키를 썼는데, 혹시 그걸 봤나?’

박시우의 목소리가 확신에 차 있다는 걸 느낄수록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각성했다는 걸 들키게 되면 내가 온천 사장이라는 걸 박시우가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게 뻔했다.

박시우가 눈치가 빠른 편이기도 했고 우리 집 베란다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것도 그렇고 우나 사건도 그렇고 엮인 게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아, 그 편의점이랑은 멀지 않은 편이지. 거기 있었어?”

아직 박시우가 마스터키를 쓰는 걸 봤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태연하게 답했다.

―어, 볼일이 있어서 바로 위에 PC방에 있었거든. 근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젠장, 다른 말로 돌리려고 했는데 실패했다.

“나 지금 해순이랑 놀기로 해서 바빠. 용건만 간단히 하자.”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박시우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이 느껴졌다.

나는 해순이 핑계를 대며 어영부영 통화를 끝낼 생각이었다.

―잘됐네. 안 그래도 인증샷을 찍어 보내라고 할 참이었는데.

그런데 상황이 더 위태로워졌다.

“갑자기 무슨 인증샷이야? 네가 내 남친이라도 되냐?”

―돈돈아, 내가 지금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래. 그러니까 해순 씨랑 같이 찍은 따끈따끈한 인증샷 하나만 부탁하자.

“미, 믿고 싶지 않은 생각이라는 게 뭔데?”

―네가 온…… 아악! 내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을 만큼 끔찍한 일이야. 그러니까 묻지 말고 지금 있는 장소랑 같이 인증샷 보내.

해순이는 실존하지만 사람이 아니다.

튀는 외모야 코스프레라고 둘러댈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남자란 거였다.

내가 남자와 한 지붕 아래 지낸다는 걸 알게 되면 박시우와 나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지호가 그걸 알면 가만있겠어? 평소에 순하고 얌전한 애가 한 번 화나면 더 무섭다고!’

지호는 유독 나의 남자 관계에 예민했다.

‘박지호 누나 또라이’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거지.

세간의 소문에 의하면 한창희가 나에게 찝쩍거렸을 적에 제일 무서웠던 건 지호라고 했다.

오죽하면 지호와 한 살 터울로 같은 학교에 다니던 한창희가 그 일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아래 학년 층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 돌았을까?

카메라 필터를 잘 활용하면 여자라고 믿게 할 만큼 해령이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배경도 문제였다.

여기는 누가 봐도 온천이잖아!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 보내면 내가 온천 사장이라고 자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더는 달아날 곳이 없어.

“좋아, 지금 해순이한테 부탁해볼 테니까 기다려. 해순이 사진 찍는 거 싫어해서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어.”

―사진 보낼 때까지 통화 끊지 마라.

내 호적 메이트지만 참 끈질겼다.

‘하긴 보통 근성으로는 랭킹 1위 길드장은 못하겠지.’

“좋아.”

나는 통화를 끊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직 한 발 남았다.’

난 휴대폰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내가 켠 건 카메라가 아니라 익명 헌터 게시판이었다.

‘됐다! 언제쯤 반응이 오려나?’

휴대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은 나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길드장 형님! 떴어요! 떴다고요!

‘왔구나!’

휴대폰 너머로 박시우네 길드원으로 추측되는 다급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뭐가…… 떴어? 진짜 떴다고?

―방금 떴어요! 지금 서버 터지고 난리가 났다니까요! 빨리 올라오세요!

“박시우, 해순이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느긋하게 해순이 이야기를 꺼냈다.

―야, 나 급똥.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듯한 박시우의 거친 숨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효과 좋네.”

내가 익명 헌터 게시판에 올린 건 온천표 돈가스 판매 글이었다.

‘하여간 하나에 꽂히면 다른 건 못 본다니까, 박시우.’

서버가 터질 줄은 몰랐지만 나로서는 박시우의 주의를 오래 끌수록 좋았다.

‘박시우, 너한테도 모르는 게 약이야.’

내가 온천 사장이라는 걸 알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비극이었다.

“아, 맞다! 운수! 하여튼 박시우, 도움이 안 된다니까!”

황급히 마스터키를 꺼내든 나는 운수가 있는 꽃밭으로 향했다.

* * *

“자, 어때?”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우비를 운수에게 입혔다.

모자를 씌워주니 그의 여우 귀가 비에 젖을 염려도 없었다.

“뭐, 꽤 쓸 만한 것 같기도 하고.”

말은 그렇게 해도 운수는 우비가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귀를 쫑긋 세웠다.

‘기분이 좋아지면 귀를 쫑긋 세우는 게 버릇인가 봐.’

비를 맞으면서까지 편의점에 다녀온 보람이 있었다.

“그럼 이제 우산을 펼치고…….”

난 운수와 같은 우비를 걸치고 커다란 일회용 우산을 나무 아래에 펼치고 앉았다.

“운수야, 이리 와서 앉아.”

“우산까지는 필요 없다. 그리고 너도 돌아가.”

“돌아갔다가 또 천둥이 치면 그때는 어쩌려고? 또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으려고?”

“누가 떨었다는 거냐? 그건 그냥 추워서 몸을 웅크렸을 뿐이다. 그리고 난 강아지가 아니라 여우야!”

“그래, 알았어. 여우야, 이리 와. 각인한 기념으로 비가 그칠 때까지 같이 있어줄게.”

“……하긴 내 각인을 얻은 건 영광스럽게 여길 일이긴 하지.”

내 옆자리를 손으로 두드리자 쭈뼛거리던 운수가 괜스레 몇 마디 말을 덧붙이며 우산 밑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수는 괜찮을까? 내가 같은 일을 겪었다면 천둥 번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비조차도 싫을 텐데…….’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우산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게 신호탄이 된 것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운수야, 빗방울이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꼭 음악 같지 않아?”

“글쎄.”

호기롭게 말을 꺼냈건만 운수는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까 어렸을 때 박시우랑 지호랑 같이 빗물을 다른 크기의 그릇에 받아봤는데 진짜 꼭 노랫소리처럼 들렸어. 다음에 또 비가 오면 온천에서 같이 들어볼까?”

“……그러든가.”

대답하는 운수의 귀가 다시 한 번 쫑긋 올라갔다.

‘좋아한다!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로 좋아하고 있어!’

소리 없이 웃고 있는데 갑자기 코가 간질거렸다.

“에취!”

젖은 옷을 입고 돌아다닌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하여간 인간의 몸은 병약하군.”

운수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입김을 불어 넣자 황금색 불꽃이 공중에 떠올랐다.

작은 불꽃인데도 제법 열기가 있었다.

“따뜻하긴 한데, 이러다 꽃밭에 불나는 거 아니야?”

“여우불은 보통 불과 다르다. 내가 의도하지 않으면 옮겨붙지 않아.”

“그렇구나! 예쁘다. 반짝반짝 빛나는 게 꼭 운수 머리카락 같네.”

불꽃의 온기에 나른해지는 걸 느끼며 헤실헤실하자 운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불이나 쬐도록 해라. 입술이 새파랗잖아.”

“비를 맞아서 그런가 봐.”

입술을 만지작거려도 봤지만 손도 차가워진 상태라 온도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내 새파래진 손을 보고 있던 운수가 내게 어깨를 붙이고 앉았다.

그의 푹신한 꼬리가 나의 몸을 감았다.

“내 꼬리는 여우불보다 따뜻하니까.”

확실히 운수의 꼬리는 솜이불보다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꼬리, 안아봐도 되냐고 물어볼까?’

고민하다 무심결에 닿은 시선 끝에는 먼 곳을 바라보는 운수가 있었다.

잘 익은 자두가 된 운수가.

* * *

맑게 갠 하늘을 보고 나서야 나는 온천으로 돌아왔다.

운수는 쉴 틈도 없이 자신의 꽃밭으로 돌아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도 피고 지는 꽃들이 많다고 했지.’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운수가 맡은 일 또한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것 같았다.

기지개를 켜며 2층으로 올라가는데 복도에 서 있는 염라가 보였다.

그의 뒤로 높이 쌓인 서류를 손님방으로 옮기고 있는 강림차사가 보였다.

“안 그래도 찾으려던 참이었는데 잘 왔군.”

인기척을 느낀 건지 내게로 고개를 돌린 염라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염라, 쉬러 왔는데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손님방에 쌓이고 있는 어마어마한 서류의 양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쉬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 온천에는 무슨 일로……?”

그때였다.

[성좌 ‘저승의 염라’가 온천 장기 숙박 이용권(30일)을 구매합니다. 6,000만 골드를 획득합니다.]

온천에 장기 숙박 이용권도 있었어……?

미처 인지하지 못한 이용권의 등장에 당황하고 있는데 염라가 2층의 난간에 팔을 기댄 채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마른 장미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집무실을 옮길 생각이다. 온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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