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여행의 시작
얼굴 위로 떨어지는 햇빛에 엘로디는 천천히 눈을 떴다. 무겁고 서늘한 겨울 공기를 밀어 내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느리게 회복되는 의식에 엘로디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아…….”
“일어났어?”
“아드리안.”
서른이 되어가는 남자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깊어진 눈을 갖고 있었다. 엘로디가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뻗자 아드리안은 간단하게 안아 올렸다. 다리 사이로 액체가 흐르는 감각에 어깨가 말려들었다.
“아침 먹어야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어요?”
“길지 않았어. 사흘 정도.”
그가 간단한 마법으로 엘로디의 몸을 닦고 긴 소파에 앉혀주었다.
“금방 가져올게.”
남자는 목에 키스를 한 뒤, 음식을 가지러 사라졌다. 그의 자리를 보며 엘로디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기적으로 찾아오는 히트 사이클 때문에 며칠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양손에 무리가 가지 않는 수프와 샐러드를 들고 나타나 탁자 위에 세팅해 주는 그의 행동이 능숙했다. 엘로디는 묽은 수프를 조금 떴다. 추위에 자꾸 몸이 움츠러들었다.
“많이 추워?”
옆에 앉은 아드리안이 엘로디의 어깨와 팔을 손으로 문질렀다. 체온이 조금 높은 편인 그의 손길이 편안하게 느껴져서 그녀가 자꾸만 그의 품으로 파고든다. 결국 아드리안의 품에 안긴 채로 엘로디는 그가 떠주는 것을 조금씩 넘겼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운 것 같아요.”
“비슷한 거 같은데.”
아드리안이 엷게 웃으며 엘로디를 꽉 끌어안았다. 음식을 받아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볼과 목에 입을 맞추었다.
“우웅, 밥 먹는데.”
그녀는 귀찮은지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가 먹여주는 음식을 전부 받아먹고 나서는 결국 다시 한번 침대에 누워야만 했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엘로디는 밖을 내다보았다. 성에가 낀 창문 너머로 20년도 넘게 보아온 달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엘로디.”
뒤에서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의 아름다운 손가락이 볼을 문질렀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요.”
“울지 마.”
아드리안의 말을 듣고 나서야 엘로디는 제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툭 떨어진 눈물이 카펫에 동그란 자국을 남겼다.
“그리워?”
엘로디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생에 대해 알게 된 이후, 아드리안은 종종 엘로디에게 옛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지 묻곤 했다.
“가족은 못 본 지 너무 오래돼서 얼굴도 희미한걸요.”
“엘로디의 고향은 어떤 곳이야?”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 갔다. 넓은 바다가 보이고, 여름에는 친구들이랑 모래사장에 앉아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현대의 삶은 편리하고 즐거웠으나, 지금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어요.”
수도 알펜시아에 인접한 바다는 대부분 항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황후가 된 뒤에는 놀러 가기도 힘들었다.
“그렇구나.”
아드리안의 손이 천천히 어깨를 쓸어내렸다. 입술이 차갑게 식은 목을 타고 등 쪽으로 내려왔다.
“으응.”
목에 닿는 결 좋은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엘로디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웅크렸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
자그마한 인영(人影)이 아드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놀란 엘로디가 몸이 굳었다. 그녀를 보고는 아드리안이 아이를 안아 올렸다. 저를 닮은 보라색 눈이 반짝거렸다.
“엄마, 안녕!”
작은 손이 엘로디에게 닿기 위해 바둥거렸다. 엘로디는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다 다친다.”
“노아, 아빠가 방에 들어올 때 어떻게 하라고 했지?”
“우웅……. 기억 안 나요.”
아드리안의 어깨에 얼굴을 숨기는 노아를 보며 엘로디는 옅게 웃었다. 그를 꼭 닮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같이 자도 돼요?”
“음, 엄마한테 물어봐야겠는데.”
“같이 잘래! 무섭단 말이야!”
아드리안은 제가 받지 못한 부모의 사랑을 퍼붓듯 노아를 애지중지 키웠다. 엘로디는 처음 아이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울던 그를 떠올렸다.
“엄마, 같이 자면 안 돼요?”
“응? 아니야. 같이 자자. 노아, 많이 무서워서 왔구나.”
엘로디는 재빨리 손을 뻗어 노아를 안았다. 제 목을 끌어안는 작은 손이 연약하게 느껴졌다.
침대 가운데에 아이를 눕히자 아드리안이 반대편에 누웠다. 마주 본 남자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엄마, 아빠.”
“응?”
“잘 자요.”
양손에 아드리안과 엘로디의 손을 붙들고 노아가 눈을 감았다. 무섭다며 투정 부린 것은 금방 잊은 듯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노아의 몸을 토닥이던 엘로디도 서서히 잠이 들었다. 어쩐지 아까보다 조금 더 따뜻해진 기분이다.
* * *
“어딜 가신다고요?”
가스파르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다. 아드리안이 황제가 되고 나서 3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자신을 파라디 공작의 위치에 앉혀놓고 정말 밤낮으로 일을 시켜준 덕에 검을 휘두르는 시간보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몇 배는 늘어났다.
“로투아로 갈 거라고.”
“이 시기에요? 꼭 가셔야 해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절박하게 저를 붙잡는 가스파르를 보며 아드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엘로디가 요즘 추위 때문에 힘들어 보여서. 겸사겸사 휴양도 하고, 또 상황이 바뀌면 노아하고 사이도 좀 좋아질까 해서.”
노아의 이야기를 하자 가스파르는 입을 꾹 닫았다. 현 황제와 황후의 첫 아이인 노아는 아드리안을 꼭 닮았다.
아름다운 외모,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한 알파.
제국에 알파와 오메가가 엄청난 속도로 불어나게 되면서 엘로디와 연금술사들은 발현되지 않아도 그들의 특성을 식별할 수 있는 진단 키트를 개발했다.
그 뒤로 아이가 태어나면 반드시 진단을 받아 특성을 구분하도록 법으로 만들었다.
“노아 이야기를 하면 제가 못 말릴 것 알고 이야기 하시는 거죠?”
“응.”
가스파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로디가 알파나 오메가에 대해 어떠한 감정을 갖고 있는지 가스파르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가 알파라는 사실을 알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엘로디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다녀오시면 저 휴가 주셔야 합니다.”
“어차피 같이 갈 여자도 없으면서.”
“솔로면 휴식도 못 합니까?”
“뭐, 그렇다고 해두지.”
샐쭉한 표정을 짓는 가스파르를 보고 아드리안은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아직도 방에 못 들어가겠어?”
“말도 마세요. 며칠 전에는 전라의 여자 세 명이 덤벼들었다니까요.”
공작이 된 이후 가스파르는 제국에서 가장 유망한 신랑 후보가 되었고, 그의 정조를 위협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침실을 습격했다.
“그러지 말고 누구라도 만나지 그래.”
“만날 시간이나 주고 말하세요!”
결국 소리를 지르는 가스파르를 보고 아드리안은 재빨리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놀러 가기 위해서는 앞으로 며칠간은 꼼짝없이 일만 해야 했다.
처음 아드리안이 가족 휴가를 제안했을 때 망설였던 엘로디는 며칠 전부터 들떠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노아를 낳고 나서 유독 추위에 약해진 그녀는 올해 유난히 힘들어했다.
따뜻한 휴양지로 떠날 생각에 날짜가 다가올수록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어린 노아를 데려가는 것을 망설이자 아드리안은 선황제와 황후가 머무는 별궁 근처에 숙소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설득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여행 당일이 되었다. 마법으로 이동하기에는 꽤 긴 구간이었기에 셋은 얼마 전 개통한 기차를 타고 가기로 했다.
전생에서의 기억 덕에 엘로디에게는 어색한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나 기차를 처음 본 노아는 아드리안 바로 뒤에 바싹 붙어서 커다란 눈을 굴리기만 했다.
“노아, 기차가 무섭니?”
“웅? 아니! 안 무서워요. 엄마.”
물음에 냉큼 아닌 척하며 가슴을 펴는 노아를 보며 엘로디가 작게 웃었다.
그때 기적 소리가 크게 울렸다.
“으아앙!”
결국 놀란 노아가 엘로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그녀가 뒤로 넘어질 뻔한 걸 아드리안이 붙들었다.
“노아, 그렇게 달려들면 위험하잖아.”
노아는 엘로디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훌쩍거렸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엘로디가 손을 뻗어 노아를 안아 올렸다. 멀리서 가스파르가 손짓으로 애타게 아드리안을 부르고 있었다.
“잠깐, 아빠 저기 삼촌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아드리안이 자리를 뜨자, 엘로디는 노아를 달래며 기차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육중한 크기의 검은색 금속 덩어리가 가까워지자 노아는 엘로디의 품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울지 마. 무서운 거 아니니까. 가까이 가서 볼까?”
“시, 싫어요. 그냥 여기서 엄마랑 놀면 안 돼요?”
발개진 얼굴로 울먹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엘로디는 그런 노아를 어르고 달래며 기차 안으로 들어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차 내부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각각의 칸을 용도에 맞춰 배열하고, 마법으로 각 방을 오갈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놓았다.
“노아는 어느 방이 제일 먼저 가고 싶어?”
“저거! 저거요!”
무서웠던 것보다 신기한 것이 먼저인지 노아는 파란색 문을 가리켰다. 문 앞에 응접실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엘로디가 문을 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열래요!”
어느새 신이 났는지 몸을 흔드는 노아를 손잡이 근처로 올려주자 작은 손이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우와.”
기차의 내부는 아늑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동화에서 나오던 작은 아지트도 있었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노아를 보며 엘로디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출발은 좋네요.”
“앞으로 잘 부탁할게.”
“급한 일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 겁니다.”
아드리안은 마지막까지 결재를 받으러 나타난 가스파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기차에 올랐다. 그 역시 수도를 떠나 먼 곳으로 여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파란색 문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문을 열자 응접실이 앞에 펼쳐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 만들어진 내부에 감탄하며 아드리안은 여행에서 돌아오면 관련자에게 특별 수당을 챙겨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까 울며 타기 싫다고 했던 것은 잊었는지 신이 난 노아가 기차 안을 뛰어다니며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그런 노아를 보며 잔소리를 하는 엘로디의 모습에 아드리안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느낌이 좋았다.
* * *
로투아까지 가는 데는 기차를 타고 삼 일은 더 걸렸다. 다행히 내부에 모든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어른들의 기준으로는 그랬다. 처음 기차에 탔을 때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던 노아는 시간이 지나자 눈에 띄게 지루해하기 시작했다.
“아빠……. 나 심심해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엘로디는 그런 노아를 보다가 문득 어렸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어린시절은 온통 애론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애론이 오메가로 발현하기 전에 시작된 가벼운 괴롭힘은 그가 우월한 지위로 올라가면서 강도가 점점 높아져 갔다.
그런 애론에게 심하게 반항을 하다가 느꼈던 공포를 엘로디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노아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늘 걱정이었다. 아드리안이 이번 여행을 권유한 데에는 분명 자신과 노아의 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노아.”
동그란 눈이 저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안을 꼭 닮은 얼굴이 얼마나 제 마음을 흔드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손짓을 해서 부르자, 쪼르르 달려와서 치마폭에 안겨왔다.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 수도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었다. 아무 스케줄 없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엘로디는 노아를 안아 올렸다. 부드럽고 따뜻한 몸을 끌어안자 안도감이 들었다.
“많이 심심해?”
“우웅.”
말을 웅얼거리던 노아의 등을 엘로디가 토닥거려 주었다.
“엄마랑 같이 잠깐 잘까?”
“지금 자면 밤에 못 잘 텐데.”
가스파르는 용의주도하게 기차에 화물로 서류를 실어놓았다. 결국 아드리안은 일을 빨리 처리하는 데 온 시간을 퍼부었다. 마저 처리해야 할 서류를 내려다보던 아드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음, 괜찮을 거예요. 밤에는 또 다른 거 하고 놀죠, 뭐.”
엘로디는 간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품에 안긴 아이의 체온까지 완벽했다. 등을 토닥이는 손길에 노아는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졸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하아… 그래.”
엘로디의 유혹에 넘어간 아드리안은 결국 안경을 벗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라색 문을 열자 침실이 나왔다. 객실 한 칸을 가득 채우는 침대 위로 흰색 레이스로 만들어진 캐노피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 레이스 사이사이로 한낮의 느긋한 햇빛이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엘로디는 이제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노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엄마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던 노아의 손 때문에 결국 엘로디는 그 옆에 누워야만 했다. 손짓으로 아드리안을 불렀다.
“잠깐만.”
그는 노아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옆에 누웠다. 며칠 전 꼭 이렇게 셋이서 잠든 기억이 있었다.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엘로디와 노아를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폭신한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햇살이 보기 좋았다. 이제 겨우 한나절이 지났다. 로투아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삼 일은 꼬박 더 가야만 했다.
* * *
지루할 것만 같았던 기차 여행은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무엇보다 지루해하며 기차에서 내리기를 바라는 노아를 달래느라 둘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주변의 도움 없이 단둘이서 노아를 돌본 적이 없었기에 고난의 연속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뾰로통해지는 노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드리안과 엘로디는 기차에서 내내 고생했다. 결국 아드리안은 로투아 근교로 들어가자마자 마법으로 차체를 역사 내로 이동시켰다. 그렇게 모두에게 길었던 기차 여행이 끝났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서는 짠맛이 나는 것 같았다. 가벼운 셔츠와 바지 차림의 아드리안은 덥다고 칭얼거리는 노아를 안아 올렸다.
“이상한 냄새가 나요.”
“바다 냄새가 나는 거야.”
“으, 바다 냄새 이상해요.”
아드리안은 노아의 말에 웃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금방 좋아하게 될 거야. 아빠 말 믿어.”
“우웅.”
얇은 원피스에 넓은 챙 모자를 눌러쓴 엘로디가 주변을 살폈다.
“데리러 오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역 안은 둘의 방문 때문에 완전히 비어있었다. 비밀리에 강행한 휴가였지만 무력한 엘로디는 아드리안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금방 오실 텐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브느와 님께서는 오늘 일이 있으셔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보나파르트 부인!”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에 환하게 웃었다. 결혼 후 1년 동안 노아를 돌보아 주던 그녀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고는 선황제가 머무르고 있는 로투아로 내려가 버렸다.
그 뒤로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에 꽤나 반가운 얼굴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지요.”
“네. 노아, 인사드려야지. 너 어렸을 때 돌봐주시던 분이란다.”
낯을 가리는 것인지 노아는 아드리안의 품으로 고개를 숨겼다.
“노아!”
“놔두세요.”
보나파르트 부인은 짧게 웃으며 엘로디를 만류했다. 한 살이 되었을 무렵 곁을 떠났으니 세 살이 조금 넘은 지금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태자 전하. 로투아의 보나파르트입니다. 어릴 적 뵈었을 때는 작으셨는데 벌써 이렇게 크셨네요.”
아드리안의 옷자락을 잡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노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아드리안이 노아를 품에서 떼어내었다. 작은 얼굴이 발갛게 변해서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왜 그래?”
놀란 엘로디가 다가오자 노아는 결국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별장에 도착하는 건 점심시간이 다 지나고 나서야 가능했다.
* * *
도착한 별장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진 2층짜리 건물이었다. 앞에는 넓은 호수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위를 별장에서 키우는 백조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별장 뒤에 펼쳐진 후원이 이곳의 백미라는 집사의 말에 엘로디의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산책하러 가볼까?”
“좋아요.”
엘로디의 마음을 알아차린 아드리안이 노아를 안은 채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드디어 여행을 왔다는 사실이 실감 나면서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울다 잠이 든 노아를 방에 내려두고 엘로디는 오랜만에 보나파르트 부인과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을 지냈던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함께했던 탓일까.
엘로디는 보나파르트 부인이 어떨 때는 이모나 어머니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스티를 내어 준 부인은 엘로디의 반대편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진 엘로디의 얼굴은 그녀의 몸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도 싫으세요?”
엘로디는 그녀가 묻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쓰게 웃었다. 목을 넘어가는 아이스티가 따가웠다.
“어쩔 수 없죠.”
보나파르트 부인이 떠나기 전, 엘로디는 오메가로 변해가는 제 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종족에 대한 혐오감 때문인지, 아니면 미지의 존재로 변하는 과정이 두려운 것인지는 보나파르트 부인도 엘로디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포기했어요. 전 이제 약을 먹을 수도 없는걸요.”
엘로디의 호르몬 체계는 대부분 망가져서 손쓸 도리가 없었다. 금방 새로운 약이 개발될 것이라는 패트리샤의 위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노아를 낳고 나서야 어느 정도 사이클이 돌기 시작했다.
“엘로디 님, 혹시 노아를.”
보나파르트 부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뱉어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이야기였다.
“싫어하냐고요?”
“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간 얼굴이 강렬한 태양 볕 아래에서 가물거렸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처음으로 엘로디가 정말로 오메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의 눈빛은 보나파르트 부인이 종종 그들에게서 받던 느낌을 담고 있었다.
“아직은.”
싫어한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좋아한다는 뜻일까.
보나파르트 부인은 차마 묻지 못한 말을 삼키기 위해 아이스티를 마셨다. 입 안으로 넘어온 작은 얼음 조각이 식도를 긁으며 내려갔다.
다음날 노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보나파르트 부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날 왜 울었는지 모두가 물었지만 노아는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표정이 엘로디를 꼭 닮아서 아드리안은 결국 항복하고야 말았다.
“밖에 나가볼래?”
어제는 우는 노아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별장 근처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못했다. 하얀 모래사장을 갖고 있는 이 별장은 배경인 바다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바다로 이어지는 온갖 열대 나무와 꽃이 피어있는 후원 역시 유명했다.
“엄마도 같이 가요?”
“그럴 거야.”
엘로디의 대답에 노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황성에서는 셋이서 함께하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도 채 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아드리안도 많이 바빴고, 엘로디 역시 그러했으나 무엇보다 그녀가 너무 약해져 자주 아픈 것이 문제였다.
환하게 웃으며 뛰어나가는 노아의 뒤로 엘로디와 아드리안이 나섰다. 높게 솟은 야자수와 화려한 색과 크기의 꽃들이 이국적이었다.
“엄마! 이거 봐요!”
커다란 꽃을 가리키며 노아가 엘로디를 불렀다. 엘로디는 가까이 다가가 꽃과 나무들을 보며 노아와 한참을 놀아주었다. 아드리안은 멀리서 둘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부탁하신 것, 가져왔습니다.”
“아. 직접 가져올 필요는 없었는데. 고마워.”
보나파르트 부인이 하녀가 만들어 온 가벼운 피크닉 박스를 아드리안에게 넘겼다.
“너무 늦지만 마세요.”
“걱정 마. 내가 무슨 열 살짜리 어린애도 아니고. 이따가 부탁이나 들어줘.”
“노아 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드리안은 보나파르트 부인에게 손을 흔들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가버렸다.
점심을 보고 좋아하며 박수 치는 노아는 영락없이 평범한 아이의 모습이었다. 정원에 난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는 단란한 가족을 보며 보나파르트 부인은 한참을 서있었다.
로투아의 바다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엘로디 역시 바다가 보이는 도시에서 살았으나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비취색과 짙은 남색, 그리고 투명한 색이 뒤섞인 거대한 자연은 보는 것만으로 압도당할 것만 같았다.
“우와.”
노아는 제 발밑에서 뽀르륵 사라지는 거품을 밟으며 신나게 뛰어 놀기 시작했다.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엘로디는 바다가 맞닿는 길을 따라 뛰어가는 노아의 뒤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신이 난 아이가 부디 제 말을 들었기를 바랐다.
“밥 먹고 놀라고 할 걸 그랬어요.”
“말 안 들었을걸.”
아드리안은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천막 안에 매트를 펴고 그 위에 피크닉 박스를 올렸다. 그늘 밑이라 뜨거운 햇빛이 없어 시원했다. 아드리안은 옆자리를 치면서 엘로디를 불렀다.
천막은 바다를 향한 정면만 뚫려있어서 아늑한 느낌마저 들었다. 엘로디는 잠깐 밖으로 나가 노아 근처에 근위병들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매트 위에 앉은 엘로디의 옆으로 아드리안이 바싹 붙어왔다. 둘러진 손이 허리 부근을 문질렀다.
“좀 어때?”
“뭐가요.”
“요즘, 유난히 잠을 잘 못 자잖아.”
“으음.”
엘로디는 말을 피하려 웃는 얼굴로 눈을 돌렸다.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그녀가 저를 보게 했다.
“추워서 그랬나 봐요. 어제는 확실히 잘 잤어요.”
“다행이네.”
기뻐하며 웃는 모습에 얼굴을 붉혔다. 그와 몸을 섞고 함께 산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처음처럼 심장이 뛸 때가 많았다.
“엘로디.”
마주한 눈동자에 묘한 열기가 번졌다.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엘로디의 미소 위에 닿았다. 가볍게 빨아들이자 열이 확 올라왔다.
“으응.”
달콤한 맛이 입 안으로 번져나갔다. 벌어진 틈새를 침범하는 타인의 온도가 지나치게 높다.
엘로디는 몽롱해지는 시야 끝에 걸린 그의 눈을 보았다. 맹목적인 애정이 담긴 눈이 애달팠다.
그의 사랑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망가뜨린 세계의 다른 축이 떠올라 속을 헤집어 놓았다.
“하아. 밖인데.”
“아무도 없어.”
그의 입술이 낙인을 찍듯이 귀에서 목선을 타고 내려왔다.
“아…읏. 그래도요.”
“안 보이게 해둘게.”
아드리안이 웃으며 끌어안았다. 그의 손끝에 닿은 곳부터 저릿해져서 순식간에 몸 아래로 번졌다.
느긋하게 얇은 원피스 위로 손이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드러운 가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옷 위로 딱딱해진 유두가 윤곽을 드러냈다.
“흣, 아.”
옷을 단숨에 끌어내리자 뽀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여기저기 옅게 남은 치흔이 얼마 전의 격렬한 정사를 기억나게 했다. 아드리안은 상의를 벗어 던지고 제 밑에 누운 엘로디를 내려다보았다.
빤히 보는 남자 때문에 부끄러워서 자꾸만 몸이 달아올랐다.
“그…그만 봐요.”
“예뻐서.”
그는 쪽 소리가 나게 볼에 키스를 하고는 천천히 몸을 문질러주었다. 지난겨울에 이상할 정도로 낮아졌던 체온이 따뜻한 곳에 온 덕인지 많이 올라온 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이 부드럽게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커다란 손이 엘로디의 오른쪽 허벅지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놀란 엘로디가 파드득 몸을 떨었다.
“하지 마요.”
“왜?”
아무리 천막 아래라지만 대낮에 음부를 환히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러기엔 여기가 너무 젖었는데.”
섬세한 손가락이 젖은 속옷 위로 클리토리스를 짓눌렀다. 움찔하며 몸을 튕기는 모습이 귀여워서 몇 번이고 손끝으로 누르고 굴렸다.
“장난치지, 아읏.”
그가 붙들고 있던 발목 안쪽을 가볍게 빨아들였다. 아랫배가 꽉 뭉치고 간질간질했다. 그의 붉은 혓바닥이 약한 안쪽 살을 핥아 올리자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눈을 꽉 감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을 막으며 떠는 모습에 아드리안이 이를 내어 아프게 물었다.
“흣.”
비어져 나오는 신음소리에 열이 올랐다. 긴 물 자국을 남기며 그의 얼굴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한껏 벌어진 허벅지 안쪽엔 이미 붉은 자국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남아있는 부분을 피해 몇 개고 더 진한 흔적을 남겼다. 다른 손으로는 어느새 흠뻑 젖은 속옷을 밀어 젖히고 음부를 자극하고 있었다.
천막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드리안.”
“쉿.”
가까이서 누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이곳은 황족과 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만 들어올 수 있다. 그 말은 모두 엘로디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란 말이었다.
당황해서 뻣뻣하게 굳어버린 엘로디를 비웃듯 아드리안은 그녀의 음부에 얼굴을 묻었다. 혀로 흘러내리는 애액을 핥아 올려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응!”
갑작스러운 침입에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지자 제어가 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한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음핵을 긁어내렸다. 이미 익숙해진 쾌락을 기대하듯 바짝 부푼 것을 만지자 다시 한번 물이 터져 나왔다.
“아, 아앙. 그만, 아드리안. 잠깐만요.”
혀가 입구를 핥고 질 내를 들락거릴 때마다 눈앞이 점멸했다. 이미 길들여진 몸은 그 다음을 기대하며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음핵을 꼬집듯 누르자 엘로디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애액이 매끈한 얼굴을 더럽혔다.
“내…내가 하지 말라고.”
“난 괜찮은데.”
입술을 혀로 핥아 올리는 모습이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엘로디는 평생 저 얼굴에 끌려다닐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가 양손으로 엘로디의 가슴을 문지르자 식었던 음부가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보다 확실히 더 커진 거 같아.”
“읏, 누가 맨날 만져서!”
“난 오히려 좋은데.”
사르르 웃는 모습에 약이 오른 엘로디는 고개를 획 돌렸다. 그의 입술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입을 찾아들었다. 혀가 얽히는 질척한 물소리와 살을 빠는 소리가 귓가를 더럽혔다. 아드리안은 손으로 음부를 문지르다 축축하게 젖은 내부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뜨겁고 긴장한 내벽이 손가락에 감겨들었다. 아드리안은 지체 없이 내부를 휘젓기 시작했다. 내벽 여기저기를 찌르고 문지르는 손가락, 유두를 꼬집고 굴리는 손까지. 엘로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등이 저절로 휘어졌다. 위, 아래에서 나는 물소리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몸은 더 강렬한 자극을 원했다.
“으응.”
더듬더듬 손을 뻗어 그의 바지 위로 뚜렷하게 드러난 그의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놀랐는지 움찔하는 모습이 보이자 약이 올랐다. 엘로디는 바지 안으로 손을 넣고 그의 페니스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손 안에서 점점 커지는 부피 때문인지 몸은 기대감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아, 아드리안. 빨리.”
“좀 더 풀어줘야 해.”
“읏, 제발.”
엘로디의 재촉에 결국 아드리안은 바지 밖으로 꺼내서 질구에 귀두를 가져다 대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단단한 끝이 음핵을 누르고 음부를 스칠 때마다 엘로디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드리안은 그녀의 양발을 벌리고 허벅지 안쪽을 단단히 붙잡았다. 한껏 벌어져서 물을 흘리고 있는 질구가 뻐끔거리며 다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끝을 제대로 맞춘 뒤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아아!”
몸을 가르며 들어오는 부피감에 엘로디의 눈과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좁고 뜨거운 내부가 아드리안의 물건을 씹어 먹을 것처럼 들러붙었다.
“큭, 힘을 좀 빼.”
아드리안의 말은 엘로디에게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삽입만으로도 가벼운 오르가슴에 도달해서 눈물이 그렁거렸다.
“하아, 아드리안. 더어…….”
애타게 저를 향해 뻗어오는 손을 보며 아드리안이 웃었다. 연결된 부분을 통해 넘어오는 진동에 엘로디의 몸이 다시 한번 떨렸다.
아드리안은 손을 뻗어 엘로디를 잡아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아읏!”
그의 위로 내려앉는 자세에 성기가 더 깊숙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엘로디는 그의 목을 꽉 붙들고 지나친 쾌락을 견뎠다.
아드리안은 그런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얗고 부드러운 엉덩이를 꽉 쥐고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아! 잠깐. 아읏.”
제 아래를 마구잡이로 헤집는 페니스에 신음을 참을 수 없었다.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내부를 찔러대던 성기가 깊은 곳에 다다르자 엘로디는 다시 한번 절정에 다다랐다.
내벽이 경련을 하며 아드리안의 성기에 달라붙었다. 그가 위험하게 웃어 보였다. 붉은 혀가 입술을 훑었다. 제 목을 끌어안은 채 쾌락에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엘로디의 쇄골에 이를 박아 넣었다.
“아아!”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엘로디의 성감대만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찌르고 문지를 때마다 엘로디는 울면서 매달려왔다.
아드리안은 그녀가 자신을 하나 남은 생명줄인 것처럼 매달려 올 때가 가장 좋았다. 언제고 황성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자유로웠던 여자였다.
그녀의 몸에 각인을 새겨 넣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도 아드리안은 종종 그녀가 자신을 떠나게 될까 두려웠다.
“하읏, 아드리안. 그마안.”
“여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어.”
“아! 그런 말은, 으응.”
아드리안은 입을 막듯 키스를 퍼부었다. 허공을 헤매는 혀를 붙들고 빨아들였다. 바닥에 그녀를 조심히 내려놓고, 양 다리를 어깨 위로 올렸다. 몸이 반으로 접힌 탓에 엘로디는 허벅지가 당겼다.
아드리안은 그대로 피치를 올려 빠른 속도로 그녀의 내벽을 짓눌렀다. 고통과 쾌락이 뒤섞인 신음이 입 안에서 흩어졌다.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부딪쳐 오는 남자의 몸 때문인지, 정신이 나갈 정도의 쾌락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읏, 아아!”
질을 빠듯이 채우던 물건이 더 커졌다. 그러고는 곧 몸 안으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아드리안은 사정을 하는 중에도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후희를 즐겼다.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자신이 주는 쾌락에 이 몸이 중독되길.
그것이 아드리안이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 * *
뒤처리를 마친 뒤 엘로디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드리안이 가져온 책을 읽고 있었다.
“화났어?”
“밖에서는 싫다고 그랬잖아요.”
“히트 사이클 때는 항상 밖에서 하자고 졸랐잖아.”
“그…그건!”
발갛게 달아오른 엘로디의 얼굴을 잡고 아드리안이 가볍게 키스를 해주었다.
“다음엔 무인도에 둘만 가서 하자.”
“으, 변태.”
“뭐 어때.”
자신의 외모를 한껏 이용하며 웃는 모습에 엘로디는 가볍게 흘겨보다 결국 웃어 넘겼다. 입고 있던 옷은 엉망이 되어서 아드리안이 새로 가져다주어 갈아입었다. 한가한 시간이 지속되었다.
“슬슬 점심시간 아니에요?”
“아아.”
“가서 노아를 찾아올게요.”
읽고 있던 책을 덮은 엘로디가 일어나려 하자 아드리안이 만류했다.
“걱정 마. 부탁해 두었으니까.”
“어떻게요?”
“오랜만에 우리 둘이 시간 보내고 싶어서 부탁한 거야. 노아에게는 보나파르트 부인이 점심을 가져다주기로 했어.”
“아…….”
엘로디는 그제야 이 모든 것을 아드리안이 준비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아드리안은 한쪽에 놓여있던 피크닉 박스를 끌어왔다. 엘로디는 눈을 반짝거리며 그것을 빤히 보았다.
“보나파르트 부인이 뭘 주셨어요?”
“봐야 알 거 같은데.”
박스를 열자 샌드위치와 샐러드 파스타, 치즈 몇 조각, 그리고 차갑게 먹으라는 메모가 붙어있는 디저트 와인이 들어있었다.
“보나파르트 부인은 항상 걱정이 많으세요.”
엘로디는 내용물을 보며 웃었다. 아드리안 역시 웃으며 그것들을 밖으로 꺼냈다. 이국적인 풍경,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식사라는 분위기 덕인지 엘로디는 오랜만에 식욕이 돌았다.
아드리안이 조심스럽게 샌드위치의 포장을 반만 벗겨내서 엘로디에게 쥐여주었다.
“천천히 먹어.”
“아드리안도 먹어요.”
양껏 베어 물자 짭짤한 베이컨과 치즈, 계란이 잘 조화가 되어 감칠맛이 났다.
“맛있어요!”
엘로디의 반응에 아드리안도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몰랐지만 꽤 배가 고팠는지 그릇을 순식간에 비워가기 시작했다.
“고마워요. 시간 내기 힘들었을 텐데.”
“엘로디에게는 항상 시간이 많았는데. 몰랐나 봐.”
남자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치즈를 잘라 접시에 올렸다. 잔과 와인에 마법을 걸어 차갑게 만들고, 엘로디에게 잔을 건넸다.
그 안으로 투명한 와인이 따라졌다. 제 잔에도 와인을 채운 아드리안은 잔을 살짝 들어 올렸다.
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목으로 넘어가는 달콤한 맛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둘은 한참을 바다를 내다보며 술을 즐겼다. 아드리안의 손이 엘로디의 것에 얽혀 들었다.
차가운 외모와는 다른 따뜻한 손. 엘로디는 이 몸의 온도를 알고 있는 사람이 저뿐이라는 사실이 좋았다.
아드리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들면, 나에게 기대줬으면 좋겠어.”
“아드리안.”
“매번 끌어안고 힘들어하지 말고. 나도 노아의 부모니까.”
엘로디는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노아가 돌아왔는지 밖이 시끄러웠다. 엘로디와 아드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노아는 처음 와본 바다가 마음에 들었다. 발가락 사이로 사르륵 사라지는 모래의 감촉, 파도가 몸에 부딪치는 느낌, 물이 들어올 때와 빠질 때 나는 소리까지.
처음 와본 바다는 노아의 모든 정신을 쏟아붓게 했다.
[흑.]
신나게 걸어가던 노아는 어디선가 들리는 우는 소리에 주변을 살폈다.
[흑흑. 여기야.]
작은 말소리가 분명 들려왔다.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찾았지만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잘못 들었나.”
[여기 바위 안쪽이라고, 이 바보야!]
쩌렁쩌렁 울리는 말소리에 노아는 눈을 굴리다가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야. 넌 바보냐.]
바위 사이에 고인 물에는 아주 작은 물고기가 있었다.
“너 말할 줄 알아?”
[당연하지!]
생전 처음 보는 생김새의 물고기는 식탁 위에 올라오는 것과 전혀 다르게 생겼다. 주황색 몸통에 하얀 줄이 그어져 있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이름이 뭐야?”
[남의 이름을 물을 땐 네 이름부터 말해야지.]
“아, 미안……. 내 이름은 노아야.”
[내 이름은 모니야.]
“모니. 그렇구나.”
노아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작은 물고기를 내려다보았다. 동화에서나 보던 물의 요정이나 그런 게 아닐까.
“근데 여기서 뭐 해?”
[뭐 하긴. 오도 가도 못 하고 있지.]
“그렇구나.”
모니는 소리를 빽 질렀다.
[그렇구나는 무슨! 불쌍한 동물을 봤으면 도와줘야 할 것 아냐.]
눈치가 없어도 정도껏 없어야지. 모니는 짜증이 잔뜩 나서 꼬리를 세차게 흔들려 했다. 그러나 고여있는 물높이가 여의치 않아 조심스럽게 가슴지느러미만 파닥거리는 것이 다였다.
“놓아주면 넌 어떻게 되는데?”
[그야 당연히 집으로 돌아가지.]
모니는 당당하게 가슴(사실상 배 부분)을 펴고 말했다. 노아는 잠깐 고민을 하더니 뒤로 물러섰다.
“그럼 다시 못 보는 거잖아.”
[야. 난 행운의 상징이야. 날 잠깐이라도 보는 걸 고맙게 생각해야지.]
“싫어.”
[뭐?]
“너 여기에만 있어. 내가 매일 찾아올게.”
모니는 저 꼬맹이가 이상한 애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가 만난 아이들은 다들 착한 애들이라 부탁하면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어디서 저런 별종이 눈앞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걱정 마. 내가 제일 좋은 걸 가져다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 미친놈은 무엇인가. 모니는 삼천 년을 살면서 처음 공포를 느꼈다.
“아, 우리 집으로 갈래?”
[야!]
“노아 님.”
등 뒤에서 들리는 보나파르트 부인의 목소리에 노아가 깜짝 놀라며 작은 손으로 모니를 가렸다.
“노아 님, 여기서 뭐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식사하실 시간이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응, 갈게.”
보나파르트 부인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아의 근처에는 어떤 마력의 흔적도 없었고 고작해야 바위와 자갈이 있는 것이 다였다.
“오실 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시고요. 빨리 오세요.”
“응.”
노아는 보나파르트 부인이 의심스러운 눈을 거두고 몸을 돌리자 재빨리 모니에게 속삭였다.
“내일 다시 올게.”
그러고는 빠르게 뛰어나갔다.
[야, 이 미친놈아!]
모니가 외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