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용사 선배님의 조언
* * *
“이제 그만 수락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탈출한 희망 따위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언제까지 거기서 인생을 허비하실 생각이지요?”
“시끄럽다. 썩 물어가라!”
마족들에게 사로잡힌 채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헥토르와 그의 동료들.
그들을 보면서 벨제뷰티를 비롯한 마족들은 오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회유를 시도하였으나 그들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언제나와 같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마족을 위해선 결코 일할 수 없다 주장하는 용사 헥토르와 그의 동료들.
이와 관련해서 군단장과 사천왕들 사이에선 이쯤 해서 놈들을 포기하고 싹 처형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으나, 이에 대해서 사실상 최종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마왕은 여전히 굳건한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저희들에게 시간은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저만한 인재를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샤뮤엘과 호각 이상으로 싸울 수 있는 강자와 그 상황에서 그만한 소란을 일으킬 정도의 능력자들이라면 분명 크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상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관대하게 아량을 베풀어 주겠다는 마왕의 선언.
이와 관련해서 마족들은 별 수 없이 그들을 어떻게든 회유하기 위해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고 있었으나 그들의 노력은 수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썩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막대한 부를 시작으로 높은 지휘와 권력을 누리게 해주겠다는 꼬드김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는 용사파티.
그렇게 이들을 회유하라는 마왕의 명령이 쉽지 않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오늘도 벨제뷰티의 고민이 깊어져만 가던 그때였다.
“실례좀 하겠습니다.”
“응? 용사?”
감옥을 나서려던 벨제뷰티의 눈 앞에 나타난 검은 용사.
이어서 그는 벨제뷰티를 상대로 무언가를 이야기 하였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헥토르와 그의 동료들은 자동적으로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헥토르.. 저 녀석은 분명…”
“아마도 맞는 것 같다. 우리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린 그 검은 용사다.”
“으음… 설마 저 짝퉁 용사가 여기까지 올 줄은…”
“아마 저쪽도 우리들을 회유하러 온 것이겠지요?”
사실상 그들을 이 꼴로 만든 장본인이라 할 수 있는 검은 용사의 등장에, 안 그래도 더러웠던 기분이 더욱 더러워 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그들.
그 직후.
문제의 그 검은 용사는 벨제뷰티를 뒤로 한 채 그대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법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꺼져라 더러운 마족 녀석.”
“감히 용사의 이름을 참칭하는 놈 따위와 나눌 이야기는 없다.”
검은 용사의 말에 용사파티의 전사들은 완고하게 대화 거부 의사를 표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들을 회유하려는 목적이 뻔히 보였으며,
동시에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눈 앞에 있는 이자와는 어떤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용사라는 이름을 대놓고 더럽히고 있는 사악하기 그지 없는 신성 모독과 같은 존재.
그런 자와 말을 섞는 것조차도 불쾌함 그 자체로 다가오는 만큼,
그들은 이후로 이 검은 용사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대답해주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너무하군요,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여러분의 선배인데 이런 식으로 쌀쌀맞게 대하시다니.”
까득!
“선…배?”
검은 용사의 입에서 기어 나온 말에, 그들은 순간적으로 이를 갈면서 진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자의 말 따위는 무시하겠다 생각했음에도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분노의 감정.
그때…
“왔습니다 용사님.”
“!”
“어?”
그런 그들의 귓가에 들리는 한 여성의 목소리.
그리고 그 직후,
방금 전까지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던 용사파티의 얼굴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다… 당신은… 서… 설마?”
“이.. 이럴 수가… 어…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장면에 용사파티는 진심으로 경악에 사로잡혔다.
자신들의 눈 앞에 서 있는 검은 용사의 존재마저 잊게 만들 정도의 충격을 안겨주는 모습.
그것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전 용사파티의 전사.
엘프 성기사 아멜다가 다크엘프의 몸을 한 채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장면이었다.
“아… 아멜다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이.. 이 더러운 마족 놈들! 네놈들이 감히 아멜다님을 타락 시킨 것이냐!”
줄곧 동경해 왔던 인물이 추악하게 뒤틀려버린 모습에 진한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장면을 보면서 헥토르와 그의 동료들은 그대로 한층 더 진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멍! 멍! 핵핵핵핵!”
“! 이… 이건 또 무슨…”
“….브… 블레스…서… 설마 저거…”
“이럴 수가…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또 다른 용사파티의 일원.
테라.
마치 개와 같은 모습을 보이며 네 발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그 수인을 보면서, 같은 수인 종족의 일원이자 줄곧 그녀를 동경해 왔던 존재인 블레스는 짙은 좌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성 따위는 일절 남아있지 않은, 말 그대로 짐승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테라.
그러나…
그렇게 전 용사파티의 일원이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받은 충격은.
이어진 순간,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이면서도 끔찍하기 까지 한 장면으로 인해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두 사람의 중심에 선 채, 마치 그들의 리더와 같은 느낌을 내보이고 있는 검은 용사.
그는 그대로 천천히 자신이 착용하고 있던 투구를 벗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검은 용사의 맨 얼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봄과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네 사람은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감각을 느끼며 그대로 잠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향해서 그 검은 용사는…
아니,
전 용사파티의 용사이자, 신에게 선택을 받아 세상을 구원할 존재로 알려져 있던 존재인 용사 엘런은..
그대로 자신들의 후배를 내려다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개인적으로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어서 말이야…. 이 정도면. 어느 정도는 내 말을 들어 줄 수 있겠지?”
“…”
전직 용사 엘런의 말에 그저 멍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바라볼 뿐인 현직 용사파티의 전사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용사 엘런은 그대로 차분하면서도 잔잔한 분노가 깔려 있는 목소리로 그들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짐꾼에게 넘어가 자신을 배신한 용사파티의 전사들과.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자신의 상황…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게 된 그의 이야기를 말이다.
*
“그자가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토록 완고하게 저희와 손을 잡는 것을 반대했던 사람이거늘.”
“걱정하지 마십시오, 분명 잘 될 것입니다.”
마왕…
정확히 말하면 에스더로 변장한 채 나와 산책을 하고 있는 마왕의 물음에 난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현재 군단장 샤뮤엘과 함께 팔콘 제국에 잠입하여 음모를 진행하려 하고 있는 헥토르.
비록 보험 차원에서 그의 동료들을 인질로 잡고 있긴 하지만, 난 그자가 이번 일을 잘 수행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그 순간의 헥토르의 얼굴.
용사파티라는 자들이 나를 배신한 것을 시작으로 나와 함께 있는 이 두 녀석 까지 이런 꼴로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서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온 듯 싶었다.
물론, 실제로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긴 했지만, 일단 결과만 보면 용사파티라는 자들과 이를 후원하는 종족연합이라는 것들에게 있어서 우리들은 결국 버림 패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반면 그렇게 버림 받은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마족들은 지금까지 나에 대한 신의를 지켜주고 있었으며 이에 난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복해 이들의 동료가 되었다는 것이 나의 이야기였다.
‘이래저래 각색이 많이 들어가긴 했지만 뭐… 결론이 이 모양인 만큼 저쪽도 안 믿을 수 없겠지.’
아마도 그에게 있어선, 당장 다른 사람도 아닌 전대 용사였던 내가 이렇게 바뀌었다는 것이 매우 결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는 실제로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용사를 칭하는 나를 보면서도 줄곧 대놓고 분노를 토로해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리고, 이렇게 끝내 돌아서게 된 헥토르에게 난 시험을 겸한 임무를 내려달라 부탁했고 그것이 지금의 이 상황이었다.
‘가능성 0 은 아니지만 아마 어지간하면 그럴 일이 없겠지. 일반적으로 신념이 강한 녀석은 한번 그것이 꺾이면 확실하게 돌아서는 법이니까.’
평소 착하던 사람이 흑화하면 정말로 무서워 지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특히 그것이 고지식한 경향이 있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렇게 헥토르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 두 사람은 슬슬 약간 심심한 데이트라 할 수 있는 산책을 끝내며 성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파하도록 하자꾸나.”
“네 마왕님.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안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마왕.
그때,
난 그런 그녀를 보면서 약간의 용기를 담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저기 마왕님.”
“…응? 무엇인가 용사여?”
“그게… 저.. 혹 괜찮으시다면. 이 다음에는 좀 다른 곳으로 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른… 곳?”
나의 말에 가벼운 의문을 표하는 마왕.
이에 대해서, 난 얼마 전부터 줄곧 생각해 왔던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왕 위장 신분도 생긴 만큼.
이번에는 성 밖으로 나가보면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