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바로 일어서려던 태정은 혹시 몰라 제라드를 호출했다.
“이거 뭐야? 갑자기 왜 움직인 거야?”
-주인님께선 가속 페달을 조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가속 페달이라니? 난 가만 있었잖아.”
-부스터가 활성화되면 바닥 전면에 액셀러레이터가 생성됩니다. 주인님께선 그걸 밟으신겁니다.
“그럴 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태정은 조심히 발을 움직여 봤다.
그러자 어느 순간 전신이 요동치며 온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가.”
제라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발에서 느껴지는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
분명 답력에 반응을 하고 있었다.
“뭔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미세한 느낌이면 쓰기가 좀 까다롭겠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부스터를 해제하며 일어났다.
그러자 보이는 온갖 잔해들.
석고보드로 된 벽은 박살이 났고, 충격이 얼마나 심했는지 책상 위에 있던 컴퓨터는 부엌까지 날아가 있었다.
창문도 온전치는 못했다.
그야말로 개판이 따로 없는 상황.
“주인이 보면 난리 나겠네.”
다음 날 오후.
태정은 대충 잔해들을 한곳에 몰아 놓은 뒤 집을 나섰다.
당연히 집주인과 만나 합의도 봤고, 인테리어 업자 역시 불러 놓은 상태였다.
“어디 보자. 이거 어디부터 가야 하나. 컴퓨터를… 아니. 거기부터 가자.”
태정은 전자 상가로 가려다 차를 돌려 헌터 마켓으로 향했다.
살 것도 있고 봐야 할 것도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1층의 포션 상점에서 약을 구매한 태정은 곧장 3층에 있는 장비 매장으로 올라갔다.
“여기 혹시 관통력이나 명중률 옵션이 붙은 장비는 어느 쪽에 진열되어 있나요?”
“관통력은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게 없고 명중률 옵션이 붙은 장비는 vip관에서만 경매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vip관요? 일반 매장엔 없어요?”
“명중률이 붙은 장비는 워낙 희소해서요.”
“그럼 그 vip라는 건 조건이 어떻게 되나요.”
태정의 물음에 직원은 심히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딱 봐도 구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데, 자신의 시간을 뺏기고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개 직원이 손님을 박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수 없게 컴플레인이라도 걸린다면, 승진은 고사하고 쫓겨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vip는 골드, 프리미엄, 스페셜, 프레스티지 이렇게 4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중 경매에 참여하실 수 있는 등급은 스페셜과 프레스티지 등급으로 각 매장의 총구매액이 700억 그리고 1,000억 이상이면 발급을 받으실 수가 있습니다.”
직원의 설명에 태정은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액수가 너무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다.
“그럼 장비의 가격도 어마어마하겠네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특히나 명중 옵션의 경우 따로 챙길 수 있는 경로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최상위 레벨의 헌터분들께서만 간간이 구매하고 계십니다.”
“음. 일단 알겠습니다.”
더 들어 봐야 의미가 없음을 깨달은 태정은 서둘러 마켓을 빠져나왔다.
금액대도 금액대지만 최상위 헌터들이 주 고객이라면 아직까진 딱히 쓸모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한 곳은 전에 사냥을 했던 미아동의 블루 게이트였다.
아실리우스의 대평원.
경험치 디버프로 인해 성장은 할 수가 없지만, 부스터에 대한 이해도도 높이고 돈도 벌 겸 해서였다.
태정은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곧장 게이트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새파란 하늘의 익숙한 평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외골격 로봇과 부스터를 활성화시키자, 멋들어진 골격과 함께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사각의 머플러 팁 여섯 쌍이 생겨났다.
“자. 그럼 어디 한번 해 볼까.”
액셀러레이터의 위치는 바닥 전면에 걸쳐 이루어져 있었다.
앞쪽으로 경사가 매우 얕은 오르간 형태의 페달.
조심스럽게 그가 앞발에 힘을 가져갔다.
그러자 한차례 엔진음이 들리며 그의 신형이 용수철 튀듯 튀어나갔다.
“어! 어!?”
대처할 새도 없이 태정의 몸이 순식간에 나동그라졌다.
어이가 없다는 그의 표정.
다시 일어나서 해 보려는데, 돌연 그의 몸이 개구리 뛰듯 펄쩍 뛰며 그대로 엎어졌다.
“이거 노답인데?”
단 두 번이었지만 태정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부스터의 페달 조작감이 말도 안 되게 불편하다는 것을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쓰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발의 절반이 페달에 걸쳐져 있는 형태인 데다, 답력은 스펀지처럼 가벼워 푹푹 들어가 버리는 상황.
그냥 걷기만 해도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실전에서 사용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자 그는 제라드를 불러냈다.
“이봐, 제라드.”
-예, 주인님.
“이거 실전에서 사용 가능한 거 맞아?”
-무엇이 문제십니까.
“답력이 너무 가벼워. 위치도 딱 걸으면 밟게 되있는 그런 위치라서 불편하고.”
-페달의 위치와 답력은 단계별 조절이 가능합니다.
“뭐? 그게 진짜야?”
-그렇습니다. 답력은 1~100까지 조절이 가능하고, 페달은 전면부 외 후면부로 위치시킬 수 있습니다.
“근데 그걸 왜 이제야 말해?”
-주인님께서 따로 말씀을 하지 않으셔서 세팅에 만족을 하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만족은 무슨…….”
제라드의 대답에 기가 차는 태정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조절을 할 수 있다면 얘기는 또 달라지는 거니까.
“좋아. 일단 시동 해제.”
부스터를 해제한 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시동을 걸었다.
“지금 세팅된 답력이 몇이야?”
-현재 세팅값은 10입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답력도 무거워집니다.
“좋아. 일단 한 50으로 해 보자.”
-세팅값 50으로 변경합니다.
세팅값이 바뀌고 그가 조심스레 앞발에 힘을 가져갔다.
일정 이상 힘을 줬음에도 불구하고 단단히 버티고 있는 페달.
조금 더 과하게 힘을 주자 그제야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훨씬 나아진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뭔가 좀 부자연스러워. 부스터만 쓰면 상관이 없겠지만 걸을 때 앞에 힘을 못 주니까.”
-페달부를 후면으로 조정해 볼까요?
“아니, 일단 이대로 연습해 보자. 어차피 세팅은 바로바로 바꿀 수 있으니까.”
세팅을 마친 태정은 바로 연습에 돌입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날아가고 부딪히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십 번 이상을 반복하며 부스터를 돌리던 그는 비로소 조작법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대충 이 정도면 쓸 만해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세팅은 그때 그때 바꿔 주면서 써야 할 것 같아. 하나로만 쓰기엔 상당히 까다로운 스킬이야. 음… 그럼 이쯤 하고 슬슬 돈 좀 벌어 볼까?”
사냥을 시작하기로 한 태정은 바로 부스터를 전개했다.
그러자 우렁찬 엔진음과 함께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앞을 튀어나갔다.
아니, 그것은 쏘아졌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만큼 빠르다는 뜻이었다.
“햐. 직분사 하나만큼은 죽인다, 죽여.”
지면에서 한 뼘가량 떠 직선 주행을 하고 있는 태정은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온몸으로 바람을 가르며 질주하는 이 쾌감.
차보다야 당연히 느리겠지만, 체감은 그 이상이었다.
자연스레 감탄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좋다, 좋아! 더 빨리, 더 빨리 가 보자.”
잔뜩 흥분한 그의 외침이 대평원 하늘에 울려 퍼졌다.
밤이 되어서야 던전을 빠져나온 태정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다.
“부스터 쓰려면 안경이라도 하나 사야겠어. 눈알 빠지는 줄 알았네.”
바람으로 인해 충혈된 눈을 비비던 태정은 마켓에 들려 아이템을 처분했다.
워낙 늦게 사냥을 시작해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1억에 가까운 금액을 손에 넣은 태정이었다.
그 대부분을 포션 구입에 사용한 그는 차로 돌아와 고민에 빠졌다.
“집은 수리 중이라 엉망일 테고. 소영이한테 갈까? 아니면 석호?”
불알친구와 여동생의 집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태정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돈도 있는데, 굳이 신세를 질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한들 잠자리가 불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까짓것 이 기회에 나도 호텔이나 한번 가 보자.”
생각을 정리한 태정은 마켓을 빠져나와 근처에서 가장 큰 호텔을 찾았다.
[한라산 명도]
이 근방에선 먹어 주는 5성급 호텔이었다.
보기만 해도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으리으리한 외관.
‘그냥 모텔이나 갈 걸 그랬나.’
왠지 모를 위화감에 잠깐 돌아갈까 생각을 한 그였지만, 이미 짐까지 내린 후였다.
집에서 챙겨 나온 옷가지를 들고 호텔에 들어선 태정은 로비에서 풍겨지는 고풍스러움에 감탄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얼굴이 비춰질 정도로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뻥 뚫린 높은 층고, 곳곳에 달린 고급진 샹들리에와 조명들은 세상에 이런 곳도 존재하는구나 싶을 정도로 호화스러움 그 자체였다.
‘확실히 비싼 호텔은 나 같은 막눈이 봐도 엄청나구나.’
연신 감탄을 하며 로비를 구경하던 태정은 비어 있는 데스크로 향했다.
“혹시 남은 방 있나요?”
“네, 고객님, 어떤 객실로 드릴까요?”
“음. 그냥 아무대나 제일 싼 걸로 주세요.”
“현재 일반 객실은 모두 차서 디럭스 룸 괜찮으실까요? 전면 통창으로 되어 있어서 야경을 감상하시기엔 좋으실 거예요.”
“네. 거기로 할게요.”
“부가세 봉사료 포함 220만 원입니다.”
생각보다 비싼 요금에 귀를 파고 되물으려던 태정은 이내 생각을 고치고 카드를 내밀었다.
자신의 소득 수준이면 그렇게까지 무리인 금액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카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17층에 내려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역시나 고급스러운 분위기.
복도를 따라 코너를 꺾자 작은 거실과 함께 전면이 유리로 된 통창이 시원하게 그를 맞이했다.
“와…….”
창밖으로 보이는 도심의 아름다운 야경에 태정은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힐링이 되는 무한 감동의 향연.
그냥 하나의 객실일 뿐이지만 그 방자체만으로도 그는 뭔가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돈이 있으니까 내가 이런 곳도 와 보는 구나.’
그렇게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인생 한 번인 거. 헌터도 됐겠다, 더 이상 아등바등 살지 말자. 으리으리한 집도 사고, 멋진 차도 사고 남들 다 하는 좋은 것도 하면서 그렇게 한번 살아 보는 거야.’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다짐을 하는 태정이었다.
* * *
한라산 길드 본부.
길드장 이한이 정찰대장으로부터 올라온 보고를 받고 있었다.
“파일을 보면 아시겠지만 저희 정찰대는 최근 바위 산맥에서 넘어온 제보를 바탕으로, 수상한 인간 하나를 추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던전의 모든 상황을 추론해 본 결과, 일반적인 헌터가 벌인 짓이 아니라 판단, 그가 갈 만한 게이트에 정찰대원들을 대거 풀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그로 추정되는 인간을 드디어 발견한 것 같습니다.”
정찰대장 차민수의 설명에 상석에 앉아 있던 길드장 이한이 파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런 일을 진행하면서 나에게 보고도 하지 않았군.”
“죄송합니다. 심증만 있었던 터라,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그게 이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판단하기로는 히든 클래스가 확실합니다. 그것도 기존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초휘귀종일 확률이 높죠.”
“초휘귀종이라. 하지만 여기 사진은 전부 일반 사진들이 아닌가.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사진은 확보하지 못했으나, 저희 수하의 말로는 몸에 기계 같은 것을 두르고 있다 하였습니다.”
“기계?”
“예. 카메라에 담으려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더군요. 이는 스킬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겠죠.”
“음. 기계 스킬이라. 그래서, 지금 이자가 우리가 운영하는 명도호텔에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길드장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자네 말이 사실이면 무조건 끌어들여야지. 길드에 더 없는 축복일 테니까.”
“그럼 오늘 밤 접촉을 하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자네가 직접 가게. 상대가 히든이라면 아무리 최근 각성자라 해도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라도 거절을 하면 그땐 어찌할까요.”
“따로 들어 있는 길드가 있던가.”
“조사한 바로는 없습니다.”
“그럼 강제로라도 데리고 와. 일단 처박아 놓고 설득은 차차 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한편, 또 다른 곳에서는 모종의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 그곳이 어디라고?”
“한라산 명도 호텔입니다.”
“한라산 명도라. 하필 그놈들 영역이군. 놈들은 이걸 알고 있나?”
“모를 겁니다. 그러니 아직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거겠죠. 놈들이 알았다면 무려 히든인데 가만히 놔뒀겠습니까.”
“그럼 얼른 데리고 나와야겠군.”
“제가 직접 다녀오겠습니다.”
“껄끄럽지 않겠나. 자네는 이미 저쪽에 얼굴이 팔렸는데.”
“명도호텔은 한라산이 관리를 하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민간 호텔입니다. 상주해 있는 헌터들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도 않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급이 되는 인사가 가야 그자를 설득하기도 편할 겁니다.”
“만에 하나라도 저쪽에서 먼저 손을 썼다면 어쩔 텐가.”
“그땐 무력으로라도 뺏어 와야겠죠.”
“자신은 있나.”
“제 실력 아시지 않습니까. 한라산 놈들은 제 상대가 못 됩니다.”
“그래. 그럼 자네만 믿겠네. 꼭 데리고 오게, 꼭.”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