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뭐야? 이 여자는 또.’
난데없이 등장한 인물에 태정은 조금 전 죽을 뻔한 사실도 잊어버렸다.
이 여자. 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접객실 내부엔 분명 아무도 없었다.
도망이라도 칠까 하여 몇 번이고 둘러봤기에, 누군가 있었다면 발견을 했어야 정상.
‘어느 쪽이지?’
한라산이 자신을 제거하려 했으니, 그걸 저지했다면 일단 레인저일 확률이 높았다.
처음부터 이걸 염두에 두고 모종의 장치를 마련해 뒀을 수도 있는 거니까.
하지만 정작 레인저의 이무배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뭐지? 언제 저런 게…….’
이무배의 그런 반응과는 다르게, 차민수의 얼굴은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다리까지 덜덜 떨며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다.
그 모습에 이무배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냐, 저년은? 네 얼굴을 보아하니, 너희 쪽도 아닌 것 같은데.”
이무배의 물음에 차민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얘기 따윈 들리지도 않는다는 눈치였다.
“갑자기 벙어리가 됐…….”
“여, 여제.”
“뭐?”
“여, 여, 염동여제다.”
“염동 여… 뭐!? 뭐라고!?”
말을 곱씹던 이무배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이어 그의 반응은 차민수와 다르지 않았다.
염동여제.
다른 말로는 멸절의 마녀라고도 불린다.
히든 중에서도 초희귀한 에스퍼 클래스의 헌터.
그녀가 멸절의 마녀라고 불리는 이유는, 세계 3대 클럽인 악마성을 단신으로 해체시킨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 혈사 때 그녀의 손에 죽은 헌터들만 무려 삼천여 명.
몬스터 아웃 브레이크 이후, 단일 전투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온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이 기록적인 이유는, 투항을 했음에도 전멸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
그때부터 그녀의 이름 앞에는 마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저, 저 여자가 정말 염동여제란 말이냐?”
“네놈 길드는 그 정도 정보력도 없나.”
“가면을 쓴 사진만 봤지, 맨 얼굴을 무슨 수로 알아봐. 그러는 네놈은 저게 염동여제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갈수록 태산이군. 우리 길드엔 여제에 대한 자료가 있다. 물론 인상착의 정도가 다지만, 보면 모를 수가 없지. 더군다나 우리 중 저 여자가 이곳에 들어온 걸 알아차린 자가 있나?”
“흥. 겨우 그걸로? 그 정도는 하이 레벨의 어쌔신들도…….”
“아니. 여긴 상시 디클로킹이 걸려 있는 방이야. 어쌔신 따위가 들어왔다면 알람이 울렸어도 진즉에 울렸겠지.”
“디클로킹? 그딴 게 걸려 있었나. 방비 한번 철저하시군.”
그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여자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얘기는 끝났나.”
그녀의 물음에 이무배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네, 네가 정말 염동여제 한설아인가.”
“한때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지.”
“여, 여기에 온 이유는?”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어떤? 혹 거기 있는 그 청년을 데려가려는 것이라면…….”
“것이라면?”
“우리가 먼저 왔으니 당연히 우리에게 권리가 이, 있지 않겠나.”
“권리라. 뭐? 수틀리면 제거할 권리? 이놈의 한국은 오랜만에 왔는데도 변한 게 없어. 이런 구시대의 비열한 짓거리가 아직도 성행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이 바닥이 네놈들 같은 쓰레기들에 의해 놀아나고 있는 거겠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동시에 작은 입으로부터 서슬 퍼런 음성이 새어 나왔다.
“당장 꺼져, 줄초상 나기 싫으면.”
무척이나 모욕적인 발언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이무배 등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가 없었다.
상대는 여제.
더한 말을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존재였다.
그녀는 길드장이 직접 와도 될까 말까 할 정도로 엄청난 강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해야 한다고?’
거의 손에 넣을 뻔해 더 아쉬운 상황이었다.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일까.
이무배가 갈등하는 사이, 한설아가 살짝 고개를 돌리며 태정을 돌아봤다.
“안 가?”
“예?”
“여기 있어 봐야 좋은 꼴 보지 못할 것 같은데.”
“아.”
머뭇거리던 태정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를 따라 조심스레 한 발 한 발을 내딛고 있는데.
갈등을 하던 이무배가 결단을 내렸다.
‘저년이 싸우는 걸 직접 본 놈은 아무도 없어. x발, 모 아니면 도다.’
큰 결심을 한 그가 근처에 있는 헌터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좌‧우측으로 퍼져 있던 헌터들이 그녀의 뒤를 노리고 들어갔다.
거리가 워낙 가까워 누가 봐도 깔끔하게 들어간 기습이었다.
하지만.
쾅!
한차례 굉음과 함께 뛰어들던 헌터들이 그대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뒤에서 보고 있던 태정은 그들이 어떻게 날아갔는지조차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이, 이게 사람이냐.’
놀란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 그녀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무배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한 번만 더 까불어 봐. 그땐. 그 덜떨어진 판단을 내린 네놈의 머리통을 부셔 버릴 테니까.”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이무배를 뒤로 하고 그녀가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태정이 말없이 따라섰고, 더 이상 그들의 앞을 막는 이들은 나오지 않았다.
한설아를 따라 밖으로 나온 태정은 복도의 상황을 보고 또 한 번 경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경 이백에 달하는 헌터들이 빼곡하게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이 여자가?’
생각지도 못한 대참사에 그가 벙쪄 있는데, 그녀가 걱정 말라는 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잠깐 재웠을 뿐이니까.”
“그, 그렇군요.”
그렇게 함께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태정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했다.
대체 이 여자는 누구일까.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와준 것일까.
그도 아니면 조금 전 그놈들과 같은 부류인걸까.
‘염동여제? 그게 뭐지? 아까 그놈들 말로는 뭔가 엄청 대단한…….’
염동여제란 말은 처음 들어 봤지만 그녀가 대단한 인물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전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자신을 차지하려던 헌터들이 이리도 쉽게 보내 줄 리가 없었을 테니까.
그가 생각하고 있는 사이, 한설아의 손이 레스토랑이 위치한 6층으로 향했다.
그 모습에 태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여긴 왜……?”
“나 공복이거든. 문제 있어?”
“문제라기보단 여긴 아까 그놈들…….”
“걱정 마. 뇌가 썩은 게 아니고서야 건드릴 생각도 못 할 테니까.”
그렇게 층에 도달한 태정은 그녀와 함께 한식당으로 들어갔다.
“뭐 먹을까.”
“전 딱히… 됐습니다.”
“그래? 여기 제일 잘하는 걸로 하나 주세요.”
그녀가 주문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를 왜 도와주신 거죠?”
“아까 말했잖아, 친구의 부탁이라고.”
“누구요?”
“있어, 우리 리더.”
“리더?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모르는데요.”
“사실 나도 의외긴 했지. 그는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이 아니거든.”
“혹시 그 부탁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별거 없어. 그냥 며칠만 따라다니면서 지켜 주라고. 그게 다야.”
그녀의 설명에 태정은 더욱더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부탁이라는 것은 이해관계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
대관절 무슨 이유로 자신을 지켜 주라고 했단 말인가.
단서가 1도 잡히지 않는 가운데, 그녀가 음료를 들이켜며 다시 입을 열었다.
“참. 근데 자기도 히든이라며?”
“저요?”
“그래. 아니야?”
“뭐 대충은…….”
“잘됐네. 생각 있으면 우리 길드에 들어와. 강제는 아니니 부담은 가지지 말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좀 그렇지만 상당히 괜찮은 길드거든.”
“그쪽 같이 대단한 분이 있는 길드면 정말 대단한 곳이긴 하겠네요.”
“그쪽? 어감이 좀 딱딱한데. 나이가 몇이야?”
“스물여덟이요.”
“뭐야? 20대였어? 보기보다 어리구나. 그러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쪽도 20대 아니에요?”
“뭐야? 그거 립 서비스야?”
“아뇨. 그냥 딱 봐도 제 또래 같아 보이는데.”
“농담하지 마. 난 자기보다 적어도 열 살은 많아.”
“뭐라고요?”
살짝 놀란 태정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노화의 3대 상징인 팔자, 눈가, 목 주름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관리가 매우 잘된 전형적인 20대 미인형의 얼굴.
한데, 이런 얼굴이 최소 30대 후반이라니?
당연히 믿어지지가 않는 태정이었다.
적어도 자신보다 두세 살은 아래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표정 뭐야? 진짜 그렇게 봤나 보네. 뭐. 내가 좀 동안이긴 해. 아무튼 내가 나이가 훨씬 많으니까, 누님이라 불러. 그쪽보단 그게 정감 있지 않겠어?”
“뭐… 저야 상관없지만.”
통성명까지 마친 그들의 분위기는 의외로 화기애애했다.
펜트하우스에서 보여 준 위엄 있는 모습과는 다르게, 한설아라는 여자는 유쾌하면서도 꽤 즐거운 사람이었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호감이 가는 상이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슬슬 그녀에 대한 것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까 위에서 보니까 엄청 강한 것 같던데, 그 정도면 우리나라에서 몇 등 정도나 돼요?”
“몇 등이라. 딱히 그런 건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굳이 따져 보자면…….”
“따져 보자면요?”
“그래도 한 20위 안에는 들지 않을까?”
“20위요!?”
한설아의 대답에 태정은 먹고 있던 와인을 뿜을 뻔했다.
그에게는 너무 비현실적인 순위였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톱 텐에 올라가 있는 각 길드의 수장들만 해도 열 명.
거기에 길드 무력을 대표하는 대장들이 삼십여 명.
이것만 해도 벌써 사십 명이었다.
말인즉, 한설아 역시 이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이고, 현재 태정은 그런 엄청난 거물과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20위권이에요?”
“뭘 그렇게 놀래? 나름 겸손 챙겨서 말한 건데.”
“이게 겸손이라니… 그럼 길드에서 누님이 제일 강하겠네요.”
“그건 아냐. 나보다 강한 사람이 최소 두 명은 더 있지.”
“…….”
최소 20위권에 들어가 있는 그녀보다 강한 사람이 둘.
이쯤 되자 태정은 그녀가 속해 있는 길드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위권 내에 3명이나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길드가 과연 어디일까.
당장 생각나는 건 한산도밖에 없었다.
“혹시 어디 길드예요?”
“알고 싶어? 그럼 우리 길드에 들어와.”
“일단 들어 보고 나서…….”
“이것 봐, 동생. 세상엔 공짜가 없는 거라구.”
“…….”
“농담이야. 동생 혹시 초인클럽이라고 들어 봤어?”
“들어는 봤죠. 오늘 오전에도 검색을… 잠깐, 그럼 설마?”
“그 설마가 맞을 거야. 내가 거기 소속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