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휴식을 끝내고 던전을 빠져나온 헌터들은 한데 모여 작별 인사를 고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태정 씨.”
“별말씀을요.”
“오늘 있었던 일은 정말이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뭘 그 정도까지나. 민망하네요. 그보다 제가 아까 부탁드린 건…….”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팀 입 무거운 사람밖에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되면 다 알게 되겠지만, 지금은 좀 최소한으로 하고 싶어서요.”
“그렇죠. 아무래도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그럼 저흰 이만 복귀하겠습니다. 살펴 가세요.”
우경호 등이 탄 차량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태정과 일행은 한쪽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리무진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박세아가 차에서 내려 그를 마중 나왔다.
“일은 잘 보셨어요?”
“네.”
“다치신 곳은 없구요.”
“네. 가요, 얼른. 쉬고 싶네요.”
그렇게 차를 타고 이동한 태정과 일행은 하나둘 헤어졌고 마침내 숙소에 이르렀다.
“오늘 감사했어요, 태정 씨.”
“감사는요. 바로 이웃인데 종종 인사나 하고 지내요.”
“네.”
“그럼 들어가요.”
마지막으로 서주아까지 보낸 태정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긴 하루였다, 정말.”
그런 그를 향해 박세아가 주스 한 컵을 가지고 오며 물었다.
“물 좀 받아 놓을까요?”
“아뇨. 샤워만 하고 자려고요.”
“저녁은요?”
“입맛도 없고 몸도 좀 쳐지는 거 같고 오늘 저녁은 혼자 먹어요.”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묵은 때를 박박 닦으며 깨끗하게 몸을 씻은 그는 밖으로 나와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바로 그때.
“어. 잠깐만요.”
“……?”
“잠깐 여기 와서 누워 보실래요?”
박세아가 거실에 깔아 놓은 요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요?”
“아까 차에서 허리 아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요.”
“제가 안마 좀 해 드리려구요. 누워 보세요.”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제안에 태정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서가 안마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됐어요, 안마는 무슨. 쉬어요, 그냥.”
“그러지 말고 와 보세요. 저 꽤 잘하거든요.”
“됐다니까요. 그리고 원래 마사지 같은 건 전문가한테 받아야 돼요. 마음은 고맙지만…….”
“와 보세요, 일단.”
“어어?”
태정은 기습적으로 이끄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어정쩡한 상태로 앉아 버린 그는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피곤함 때문인지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정말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고 싶었다.
‘오늘 너무 무리했나? 그럼 어쩔 수 없군.’
태정은 마지못해 돌아누우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냥 대충해요, 난 진짜 괜찮으니까.”
“대충이 어딨어요. 어깨부터 할게요. 힘 빼고 편하게 계세요.”
박세아는 그렇게 말하며 태정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고 시작된 그녀만의 화려한 손기술.
한 번도 안마 같은 걸 받아 본 적이 없는 태정이었지만, 그녀의 주물럭거림은 생각 이상이었다.
손이 닿자마자 어깨에 뭉친 피로가 언제 있기라도 했냐는 듯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이, 이는 분명 전문가의 내공이 확실했다.
“어때요? 시원하죠?”
그녀의 물음에 태정이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따로 배웠어요? 왜 이렇게 잘해요.”
“전공이 물리치료학이었거든요. 비서 교육 때 재활이랑 마사지도 좀 배운 게 있기도 하고요.”
“길드 비서는 정말 많은 걸 배우네요.”
“기본이죠. 비서의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게 보스의 편의랑 건강이니까요. 허리로 내려갈게요.”
태정에게 허락을 구한 박세아는 그의 상의를 들추고 허리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힘을 꾹꾹 줘 압박을 하는가 하면, 어쩔 땐 부드럽게 주물럭거리는 것이 만져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을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처음 깨달은 태정이었다.
그렇게 어깨, 허리, 다리, 발까지 풀코스로 안마를 받은 그는 돌아누워 팔과 손을 맡겼다.
“신체에서 손이 은근히 중요하거든요. 특히 거친 무기를 사용하는 헌터들은 손가락 관절을 잘 풀어 줘야 돼요. 이 부위에 통증이 누적이 되면 금방 낫지 않거든요.”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을 하며 마사지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이지 어느 센터에 근무하고 있는 선생님 같아 보였다.
그 편안함에 태정은 더욱더 긴장이 풀렸고, 어느덧 그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자연스레 눈이 떠진 태정은 자신이 거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새벽녘의 동이 막 트고 있는 시간.
옆을 돌아보니 소파 위에 박세아가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깜빡 졸은 거 같은데 하루 종일 잤네.”
괜히 자신 때문에 불편했을 그녀를 생각하며 내려온 이불을 곱게 덮어 준 그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마사지의 효과가 얼마나 좋았던 건지 잠이 오질 않는다.
몸에 쌓인 피로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상태.
해가 완전히 뜨기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무얼 할까 생각을 하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어제의 일에 대한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만만하게 주방으로 직행한 그는 아침 식사로 뭘 만들어 줘야 할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계란프라이, 라면, 계란밥, 떡라면, 간장버터밥, 만두라면… 뭐야? 만들 수 있는 게 이딴 거밖에 없다고?’
만년 자취생이었던 태정이 만들 수 있는 요리는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대부분 편의점 도시락 아니면 라면을 먹었기 때문에, 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요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인터넷에 접속해 레시피를 따 보려는데.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세요?”
“아! 깜짝이야.”
“왜 그렇게 놀라요? 뭐 하고 있었어요? 계란은 왜…….”
그녀가 싱크대 위에 올려진 계란 4알을 바라보며 물은 말이었다.
그 말에 도저히 계란밥을 만들려 했단 말을 꺼낼 수 없었던 그는 4알을 집어 들곤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목이 좀 칼칼해서. 하나 먹을래요?”
결국 요리에 실패한 태정은 박세아가 차려 준 12첩 반상을 먹곤 숙소를 빠져나왔다.
큰길을 나와 그가 향한 곳은 길드의 중앙 마켓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입장을 하면서부터 그를 알고 있는 매니저가 달려 나와 극진한 인사로 태정을 맞이했다.
“아이템을 좀 처분하고 싶어서요.”
“아. 제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직원에게 vip실로 모셔진 태정은 커피 한잔을 하며 견적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계산기를 두드리던 직원이 견적표를 가지고 돌아왔다.
“총 14억 7천만 원입니다.”
“그래요?”
직원의 말에 내심 만족한 그는 견적표를 들여다봤다.
그러자 우경호의 말대로 붉은 정수가 무려 11억에 찍혀 있었고, 나머지도 그가 예상한 수준을 뛰어넘는 훌륭한 금액이었다.
“싹 다 처분해 주세요.”
“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칼 같은 입금과 함께 그가 마켓을 빠져나왔다.
[유태정 님의 계좌로 14억 7천만 원이 이체되었습니다.]
휴대폰에 찍힌 메시지를 보고 있는 태정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 자신이 이렇게 큰돈을 만져 봤을까.
불과 1억에도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들떴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운이 좋았다곤 하지만 정수를 제외하고서도 포션값은 벌은 셈이었다.
“매일 이렇게만 벌면 부자 되는 거 일도 아니겠네.”
현금도 두둑이 들어왔겠다 이제 뭘 해야 할지 생각을 하던 그는 차를 타고 전투 훈련장으로 향했다.
“저기 중앙 입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김형식이 알려 준 대로 중앙 문으로 입장하자 몇몇 헌터가 대기표를 뽑고 있었다.
그 역시 줄이 없는 곳에 가서 길드 신분증을 건냈다.
그러자 그의 등급을 확인한 직원이 화들짝 놀라며 정중히 다시 인사를 건냈다.
“어서 오십시오, 간부님.”
“간부 아닙니다. 그보다 훈련장을 좀 쓰고 싶은데, 혹시 혼자 쓸 수 있는 훈련장도 있습니까?”
“vip 전용 훈련장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모셔 드릴까요?”
“네.”
직원의 안내를 받아 그가 향한 곳은 지하 2층에 위치한 소규모 훈련장이었다.
말이 소규모지 열 명은 마음껏 사용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
스킬을 테스트하기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외골격 C 타입 슈트]
첨단 보병의 상체 슈트.
소환과 동시에 착장.
상체 근력 증가 [20]
방어력 [1,200]
지속 시간 [3분] 소비 마나 [1,000]
[병렬식 제트 블라스터]
외골격 C 타입에 착장되는 부스터.
최대 상승 고도 [150m]
기동력 [1-250]
지속 시간 [3분]
소비 마나 [5,000]
스킬은 총 2가지였다.
레벨 업을 하면서 얻은 외골격 C 타입과 퀘스트를 깨고 얻은 병렬식 제트 부스터.
공교롭게도 이 스킬은 2개가 한 묶음이었다.
태정은 먼저 외골격 C 타입 슈트를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상체에 푸른빛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강철과 같은 갑옷 하나가 형성됐다.
외골격 다리와 같은 재질의 기계 갑옷.
그의 마음에 쏙 드는 스킬이었다.
“이제야 뭔가 좀 보호받는 느낌이네. 다리만 쓸 때는 허전했었는데.”
착용감도 괜찮고 가동 범위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몇 번 몸을 움직여 보던 그는 대망의 제트 블라스터를 소환했다.
마찬가지로 빛을 통한 홀로그램이 형성되며, 그의 등 뒤로 날개 형태의 블라스터가 생성됐다.
“제라드, 이게 그러니까 하늘을 날 수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작동은 어떻게 하냐.”
-오른쪽 상갑 아래를 보시면 블라스터의 컨트롤러가 말려 들어와 있는 게 보이실 겁니다. 수동은 컨트롤러의 버튼을 이용하시면 되고, 기본적으로 음성 인식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거 괜찮네. 다리에 달리는 부스터보단 쓰기 편하겠어.”
태정은 제라드로부터 음성 명령어를 전해 듣고 바로 활용을 해 보기로 했다.
“점화 1.”
그의 명령에 아무것도 없던 5구짜리 블라스터에서 푸른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 뼘 정도 공중으로 뜬 그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 두 번째 명령을 하달했다.
“상승 1.”
슈우우욱!
한차례 바람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0여 미터를 상승해 멈춘 그의 신형.
거기서 상승 2를 외치자, 다시 10여 미터를 상승해 고도 20미터에 그의 좌표가 설정됐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죽이는데?”
20미터 상공에 떠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태정은 자신이 날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공중을 점할 수 있다는 건 사냥을 함에 있어 엄청난 이점을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화력만 받쳐 준다면 지상에 있는 놈들에겐 대재앙이 되지 않을까.
“기체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보다 20미터가 이렇게 높았나? 처박으면 아주 골로 가겠는데.”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진정시킨 그는 사냥에 적용시킬 수 있을 때까지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어 낭랑한 그의 음성이 훈련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