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중서부 지구의 한라산 본성.
길드 마스터 이한과 전참부장이 남서 지구 정찰 기지에 대한 건을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선전포고는 했나.”
“예.”
“반응은?”
“본인들하곤 상관없는 일이라 하지요. 오히려 그쪽에서도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군요.”
“거기에 대한 자네 생각은 어떤가.”
“두말할 것도 없는 헛소립니다. 남서 지구는 제너럴에도 들지 못한 길드가 대부분입니다. 영역을 중남부로 확장을 해도 오릭스 연합에 들어 있는 길드를 제외하면 이름 있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요.”
“내 생각도 그래.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있었지. 그놈들이 덩치를 키울 때부터 알아봤어. 건방진 놈들. 해서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
“이쪽의 수비 병력을 제외한 정예로 500명만 추렸습니다.”
“겨우 그걸로 되겠나? 기습도 아니고 정면 승부인데.”
“이 이상 병력을 빼면 격전지 쪽이 위험해집니다. 게다가 오릭스 본성까지 도달하는 시간도 계산을 해야 하구요. A급 마법전단 1개가 붙었으니, 밀리진 않을 겁니다.”
“음. 정찰 기지 쪽은?”
“그곳은 이미 후방 부대에서 차출돼 출발했습니다. 포인트로 귀환된 기존 병력도 합류하겠다며 통신이 왔었구요.”
“좋아. 이번 기회에 그 눈엣가시 같은 놈들 한 번에 치워 버리자고. 대한라산 길드에 칼을 드민 결과가 어떤 건지, 똑똑히 각인시켜 줘야겠어.”
* * *
남서 지구 F구역 리스폰 포인트.
수많은 길드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희 길드도 똑같은 걸 봤다는 거지?”
“그래. 나도 웬 헛소린가 했는데, 우리 쪽 애들만 본 건 아니더군.”
“그럼 대체 그게 뭐였을까.”
“분명히 뭔가 구린 게 있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몇몇 헌터가 보고를 한 좌약같이 생긴 한 물체였다.
섬멸 당하기 직전 보았다는 미상의 물체.
처음에 아무도 믿지 않았던 그것은 리스폰 당한 길드 대부분에서 같은 얘기가 나오자 더 이상 헛소리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상황과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기 때문이다.
“마법인가?”
잠깐의 침묵 속 입을 연 것은 플랜트 길드의 김용태였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길드의 부대장.
그런 그의 말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 성의 이진용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마법이 있다는 건 들어 보지도 못했어.”
“나도 그렇긴 해. 하지만… 혹시 자네들 직업 스킬 트리를 어디까지 꿰고 있나.”
“일반 700까진 교육을 받았네만.”
“꽤 높은 수준까지 배우는구만. 우린 고작해야 600인데.”
“의무니까.”
“어쨌든 그럼 여기선 700이 제일 높나?”
김용태의 물음에 사람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 중 하나겠군.”
“뭐가 말인가.”
“우리가 모르는 700 이상의 스킬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하지만 화력의 규모를 보면 100% 위자드 계열인데, 700이나 되는 헌터가 효율도 안 나오는 소형 성을 왜 공격한 거지? 고작 50점 얻자고 포션을 퍼붓는다는 건 말이 안 돼. 게다가 그 정도 레벨이 움직이려면 보통 길드가 아닐 텐데. 그만한 헌터를 활용할 수 있는 길드가 우리 남서 지구에 있었나?”
“당연히 없지. 하지만 명도 산맥을 넘어가면 얘기는 달라지지.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이 크라시온이야.”
“크라시온이라. 확실히 그곳이라면… 그런데 갑자기 왜?”
그가 납득을 하는 듯하다 의문을 표하자, 누군가 손을 들며 끼어들었다.
빛바랜 금색 갑옷에 키보다 큰 스태프를 들고 있는 사내.
마찬가지로 이들과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던 화이트 라인의 이웃이었다.
천하대 길드의 김무열.
사내의 이름이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자네들 벌서 잊었나. 오릭스를 주축으로 한 그 연합은 산맥을 넘어올 수가 없어. 왜냐하면 명도 산맥엔 대한라산 길드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지. 우리가 상납을 하는 것도 다 그것 때문이 아닌가. 적어도 이 남서 지구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무언의 약속 말이야.”
“그야 그렇긴 하지만 딱 까놓고 지켜 주겠단 말을 직접적으로 들은 건 아니잖아. 그냥 우리가 잘 좀 봐 달라 하는 수준이지.”
“그건 모르는 소리. 한라산이 왜 거기다 정찰 기지를 박아 놓았는지 아나. 그건 연합의 세력이 이곳까지 미치게 되는 걸 원치 않아서야. 남서 지구가 전부 연합에 먹히면 그들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거든. 그렇다고 본인들이 장악하기엔 이미 가지고 있는 성이 너무 많지. 아무리 버려진 땅이라지만, 이곳을 장악하게 되면 연합의 둘 정도는 승급이 가능할 텐데, 왜 몇 년간 구경만 하고 있겠나. 그게 다 한라산의 눈치를 보는 거라고. 아무리 스페셜리스트가 둘에 제너럴이 다섯이라곤 하지만. 상위 랭커인 한라산에 비한다면 바람 앞에 촛불인 격이지.”
“그래서, 그럼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벌인단 말인가.”
“나도 모르지. 확실한 건 이러고 있어 봐야 답이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할까 하는데.”
“제안?”
“어차피 우린 동맹은 아니지만 이래저래 친분이 있는 길드들이 아니겠나. 다 같이 몰려가서 하나씩 찾는 게 어떻겠나?”
“오. 힘을 모으자? 그거 꽤 괜찮은 생각이군. 확인도 할 겸 말이야.”
“동의하는 사람은 손을 들지.”
김무열의 말에 손을 든 것은 대화를 하고 있던 김용태와 이진용뿐이었다.
그런 좌중을 향해 다시 김무열이 물었다.
“자네들은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지?”
“우린 우리끼리 움직이겠네.”
“설마 날 못 믿는 건가.”
“우린 본성에서 이미 지시가 내려왔어. 전후 사정이 파악될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는군.”
“그럼 별수 없지. 자. 다들 서둘러 준비해서 10분 뒤에 저 앞에서 보자고. 시간상 한 번밖에 기회가 없을 듯하니, 죽어라 달려야 할 거야.”
판의 정세가 묘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태정이 속한 제닉스 길드에서는…….
“벌써 7개군.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야.”
실시간으로 상황판을 지켜보고 있던 양태식은 성의 색이 하나둘 바뀌어 감에 따라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그것은 회의장 안을 지키고 있던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점령된 중형 성만 무려 7개.
원래 가지고 있던 성에 육박하는 숫자였다.
그 덕에 랭킹도 80위권에서 60위권 초반까지 올라온 상태였다.
“이거 손 안 대고 코 풀게 생겼구만. 벌써 62위야. 자네들 뭐라 말이라도 좀 해 보게. 나만 이 상황이 놀라운가.”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는 양태식을 향해 총대장이 동의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랭킹도 랭킹이지만 저 속도는 정말이지 경이로울 정도군요. 성과 성 사이엔 거리라는 게 있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저런 속도가 가능한 건지…….”
“나도 같은 생각이야. 농담이 아니라 한 두어 시간 정도 지나면 충분히 이곳까지도 올 수 있겠어.”
“맞습니다, 길드장님.”
“자네라면 어떨 거 같나? 자네라면 저렇게 할 수 있겠나. 그래도 명색이 길드 서열 3위가 아닌가.”
양태식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총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성을 점령하는 것까진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저 속도를 따라가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설사 플라이 스킬을 풀로 전개해서 날아간다 해도 가능하지가 않을 것 같군요.”
“미스테리야. 우리 길드에 나도 모르는 능력자가 존재하다니.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 뻔했나.”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그를 향해 다시 총대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혹시… 이번에 새로 들어온 그 히든이라는 자 말입니다. 그자는 전혀 아닙니까?”
“아. 유태정을 말하는 모양이군.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그런데 생각을 해 보게. 900레벨에 근접한 자네도 힘들다고 하는 걸, 아무리 히든 이라지만 300레벨대의 헌터가 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더군다나 내 보고받기로 그는 얼마 전에 초승달 대지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해서 나왔다고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같이 사냥을 나갔던 헌터들이 그렇게 말을 했다더군.”
“음. 그럼 진짜 뭘까요, 이건.”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시계를 확인하던 전략 참모가 입을 뗐다.
“길드장님, 이제 저희도 슬슬 움직여야 합니다. 아무리 랭킹이 올랐다 한들, 대형 성 없이는 50위권에 안착하기 힘듭니다.”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 아직 소식이 없지 않은가, 소식이.”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을 열고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는 길드 정보국 소속의 정찰대장이었다.
“보고드립니다. 서쪽의 얼리엇 연합과 북쪽의 다렌 연합이 막 충돌했다는 속보입니다.”
그의 보고에 조용하던 회의실에 생기가 띠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이 된 것이다.
“규모는?”
“다렌 본성에서 파악된 얼리엇 공성 병력만 3천이라 합니다.”
“서쪽 놈들이 먼저 선수를 쳤군.”
“예. 나가 있는 대원들의 말에 따르면 동쪽 루비니아 측 역시 대규모 병력이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5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하더군요.”
“5천이라…….”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같이 다렌을 치고 갈라 먹거나 막판 역전을 노리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 한데, 루비니아 그놈들, 5천이면 우리 쪽은 아예 생각지도 않는 모양인가 보군. 남은 병력들로 충분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해도 1만에 육박하는 병력입니다. 주변 성을 정리하고 본성까지 때리기는 만만찮을 겁니다.”
“그래서 올인을 하는 것이 아니겠나. 제아무리 병력이 많아 봐야 성 하나에 집중하지는 않았을 터. 게다가 연합이라는 게 힘이 있을 때나 연합이지. 하나만 무너져도 자기 집 지키기 바쁘지 도움을 주려고 하진 않을 거야. 벌써 5천이 빠져나갔다면, 루비니아 측에 좀 더 많은 병력이 증원되어 있다 하더라도 올인을 해 들어가는 우릴 막을 수는 없지. 일단 알겠으니 자네는 자리로 복귀하게.”
“예. 길드장님.”
정찰대장이 나가고 양태식이 참모를 향해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저는 얼리엇이 좀 신경이 쓰이는군요. 다렌의 본성을 치는 데 3천밖에 출정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리 뒤에서 루비니아가 들어올 것을 안다고 해도 너무 적은 병력이지 않습니까.”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일 테지. 원래 그놈들 여기서 제놈들이 제일 잘난 줄 아는 족속들이잖나. 게다가 자네 말대로 지금은 생각할 시간이 없어. 이대로 시간이 흘러 포탑이 형성되면, 대형 성을 점령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말이야.”
“그럼 일부 병력이라도 남겨 놓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뜻하지 않던 성이 들어와 여유가 충분히 있을 것 같은데요.”
“정 걱정이 된다면 뭐 그리하게. 다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30분 안으로 출정 준비까지 끝내야 할 것이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알겠습니다.”
“모두 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