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학살.
그야말로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신은 공평하다고.
단점이 있으면 장점이 있기 마련이고, 불행이 있으면 행운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이곳엔 그런 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일방적인 공격과 압도적인 화력.
놈들에겐 도망칠 머리도, 공격을 버텨 낼 단단한 몸뚱아리도 없었다.
수단이라도 있으면 발악이라도 해 보련만, 불행히도 놈들에겐 그것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다 가진 이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이들의 싸움.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모습이었다.
꿀꺽. 꿀꺽.
벌써 수십여 분째 에너지 탄을 난사하고 있는 태정은 잠깐 휴식을 가지며 챙겨 온 생수를 들이켰다.
“역시 사냥 중에 마시는 물이 꿀맛이지. 어이. 너희도 한 모금 할래?”
나름 배려를 하며 물은 말이었지만, 지상의 몬스터들은 그저 멍청하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자식들, 말을 안 하네. 그건 그렇고 진짜 많긴 많구나. 아직도 이렇게 남았냐.”
벌써 레벨 업을 14업이나 한 그였지만, 아직도 몬스터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남아 있었다.
다른 헌터들이 본다면 기겁을 하고 돌아 나갔을 물량이지만, 태정에겐 아무런 위화감도 주질 못했다.
닿지 않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사실 날 수 있는 직업이 메카닉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흔하게 플라이 스킬을 사용하는 법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무식한 사냥을 할 수가 없었다.
화력 비슷하게 나올지 몰라도 후속타가 없기 때문이다.
딜이 있고 없고의 차이.
연사가 가능하냐 가능하지 못하냐의 차이.
이것이 이런 괴이한 형태의 사냥을 가능케 하는 것이었다.
“그럼 어느 정도 쉬었으니, 다시 가 볼까.”
먹고 있던 물통을 폼 나게 던진 그가 다시 총질을 시작했다.
타타탕! 타탕! 탕탕탕탕!
경쾌한 소리에 맞춰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지는 괴수들.
흘러나온 피가 강이 되고, 쌓인 시체가 산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곧이어 레벨 업과 함께 반가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생화학 수류탄 스킬을 획득합니다.]
“음? 생화학 수류탄? 이건 뭐야?”
사격을 중단한 태정은 바로 스킬부터 확인했다.
[생화학 수류탄] [극약v1]
탄두: 생화학 압축 확산탄
범위: 기준으로부터 100m
살상력 - HP 8,500
특성 방어력 무시.
소비 마나 4천
분당 최대 3발
“범위 100미터에 살상력 HP 8,500? 이게 무슨 뜻이지? 제라드.”
-HP는 몬스터가 가진 생명력입니다.
“그럼 8,500만큼 생명력을 깎는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극약v1 확산탄은 물리 방어력을 무시하고, 몬스터의 생명력 8,500을 앗아 갑니다. 다만 내성이 있는 경우 반감이 되고, 실드가 있을 경우엔 통하지 않을 확률이 있습니다.
“그래? 근데 사람한테는 괜찮은 건가, 그럼?”
-극약v1의 경우 몬스터에게만 있는 특정 DNA를 증폭·파괴시키기 때문에 인간이 입는 피해는 미미합니다. 하지만 강력한 마취 성분이 있어 단시간 몸을 움직이지 못하거나 체질에 따라 수면에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정도면 미미한 게 아니라 생각보다 치명적인데? 지상에서 쓰면 나도 걸릴 수 있다는 거잖아.”
제라드는 별것 아니라 치부했지만, 이건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매 순간 생사를 가르는 던전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은 목을 내놓고 죽이라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태정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그가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주인님의 경우 100% 내성을 띠기 때문에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 나하곤 상관이 없단 말이지… 음. 그럼 일단 소환만 해 볼까.”
말을 끝으로 그가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그러자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작은 홀로그램이 형성되더니, 그의 손으로 주먹만 한 수류탄 하나가 들어왔다.
동시에 손을 오므리자 그 실체가 드러나며 묵직한 무게가 전해졌다.
“오호라. 이렇게 생겼구나. 사용 방법은?”
-외부 안전 클립과 안전핀을 해제하고…….
“이게 안전핀인가? 이게 클립이야?”
제라드의 설명을 들으며 몇 번이고 확인을 해 보던 태정은 눈을 빛내며 지상을 내려다봤다.
기왕 꺼낸 김에 사용을 해 보려는 것이었다.
대충 몰려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안전핀과 안전 클립이 제거된 수류탄을 냅다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확산탄이 몬스터의 대가리에 부딪히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다.
동시에 뿌연 연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순식간에 일대가 녹색으로 뒤덮였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나.”
느긋이 상황을 지켜보려던 태정이 팔짱을 끼려던 그 순간.
연기에 뒤덮인 몬스터들이 떼로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경험치 알림음이 미친 듯이 울려 댔다.
[경험치…….]
[경험치…….]
[경험치…….]
끝없이 울려 퍼지는 알림음과 집단 폐사를 당하고 있는 몬스터들.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워낙 몰려 있다 보니, 밀고 들어온 놈들이 새로운 자리를 채우고 그대로 중독이 되어 무작위로 나가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수만 해도 벌써 수백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 불나방이라고 하는 것일까.
고작 확산탄 하나에 엄청난 재미를 보고 있는 태정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거 가성비 너무 좋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몬스터들이 알아서 줄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마나 4천에 이만큼의 효율이라니.
이 정도면 가진 무기 중 가성비 면에서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8,500이라는 한계 데미지가 있긴 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그 한계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불나방처럼 뛰어들던 몬스터들이 속속들이 죽어 나가자, 그에 따른 레벨 업도 빠르게 진행됐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레벨 업을…….]
수류탄 한 발에 5업.
아직도 연기는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이 재밌게 흘러가자 그는 다시 수류탄 한 발을 소환했다.
그리곤 100여 미터쯤을 지나 한 발.
또 100여 미터쯤을 지나 한 발을 투척했다.
그러자 녹색 연기의 범위가 300여 미터로 확장하며 일대는 그야말로 지옥도가 따로 없었다.
그 광경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지켜보고 있던 태정이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좋아. 빨리 다 죽어 버려라. 한 번 더 돌아야 하니까.”
지상에 있는 몬스터들이 정리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블라스터를 해제하고 대지에 내려 선 태정은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뿌연 녹색 연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효과만 해도 완전 좋은데, 지속성까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제라드의 말대로 그는 연기에 중독되지 않았다.
시리우스의 힘을 일부 이어받으면서 규격 외의 몸이 되었다나 어쨌다나.
산을 쌓고 있는 주변의 사체를 보던 그는 한참을 달려 나가 새로운 트랩들을 발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몬스터 모으기와 하나라도 더 밟겠다는 그의 필사적인 달리기.
이번엔 굳이 공중으로 올라갈 필요도 없었다.
이미 300여 미터에 달하는 독가스가 넘실거리고 있기 때문에, 그곳으로 유인만하면 알아서 정리가 될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죽였는지도 모를 만큼 많은 몬스터를 잡고 있는데, 또다시 그의 귓가로 반가운 알림음 하나가 들려왔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s1 네비게이터 기체 스킬이 오픈됩니다.]
[수중 대반경 생체 레이더 스킬이 오픈됩니다.]
“오. 스킬.”
뒤따라오는 놈들을 마저 정리한 그는 조용한 환경에서 두 개의 새로운 스킬을 확인했다.
[네비게이터] [s1]
1세대 완전 잠수형 기체
기본 무기: 능동 유도 소형 어뢰
레이더: 음파 탐지
어뢰 파괴력: 1만 8천
소비 마나: 1발당 1만
기체 소비 마나: 출력에 따라 다름
최대 속도: 30노트(55km/h)
[대반경 생체 레이더] [수중]
잠수/반 잠수 기체에 장착
레이더: 완성형 생체 탐지.
정확도: 99%
범위: 3km 내외
소비 마나: 시간당 8천
스킬에 대한 내용을 확인하던 태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뭐야 이거? 잠수면 물속에서 사용하는 거 아냐? 맞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거 타고 제주도도 갈 수 있나?”
-가능합니다.
“햐. 이게 여기서 나와?”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 제주도를 가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던 태정이었다.
일단은 돈을 벌기 위해 나오긴 했지만, 사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잠수정을 빌리기엔 요금이 비싸도 너무 비쌌다.
기본 왕복 백억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 가는 데다 혼자 타고 가는 것도 아니라, 껄끄러운 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해서 인천항에 놀고 있는 길드의 배를 가지고 가 볼까도 잠깐 고민을 해 봤지만, 그 역시도 어려움은 있었다.
100에 95척은 날려 버릴 강력한 폭풍.
그 5%에 희망을 걸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잠수형 기체라니.
이건 누군가 그의 사정을 보고 있다가 떡 하고 던져 준 것이나 다름없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의 선물이었다.
“이게 이렇게 해결이 되네. 잠수형 기체라… 이거 지금 쓸 수 있나?”
-바퀴가 달린 것도, 직립형도 아니라 여기선 사용을 해 봐야 의미가 없을 겁니다.
“그래? 이거 대반경 레이더는 세트인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음파 탐지에 비해 월등한 정확도를 자랑하는 레이더입니다. 제게 이식되어 있는 데이터론, 당시 이 레이더 기술은 세계 10대 혁신 기술에 들어갈 정도로 대단했다고 하는군요. 이곳에서 말하는 몬스터 아웃 브레이크 이후 적용된 수많은 기술 중, 거의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오직 마력이 깃든 타깃만 골라 탐지를 하는 혁신적인 장비입니다.
“오. 그런 엄청난 기술이라니.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말을 하니 대단해 보이는 것 같긴 한다. 그건 그렇고 수중에서 활동을 할 수 있다라. 이러면 그때 설아 누님이랑 같던 수중 던전 같은 곳도 이제는 별 문제없겠네. 이걸로 갈 수 있는 곳이 늘어난 건가.”
네비게이터로 인해 지상과 하늘, 바다까지 그의 활동 범위가 늘어났다.
이 말은 곧 갈 수 있는 선택지가 좀 더 다양해진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것이 가능한 헌터들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설아만 해도 이 모든 것이 쉽게 가능한 수준이니까.
또 굳이 그녀가 아니더라도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었다.
중요한 건 레벨이다.
적어도 430이란 레벨대에서 이 모든 게 가능한 헌터는 그 외에 존재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능일수록 고레벨에 오픈이 되고, 또 그것을 얻기 위해선 다른 스킬 하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정석으로 성장을 한 헌터들은 대부분 이런 것이 후반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킬 트리라는 개념이 없는 태정은 다른 이들에 비해 엄청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를 필요 없이 주는 족족 다 받아 쓰면 되기 때문이다.
“아주 좋아. 이걸로 고민거리 하나 치웠고. 슬슬 마무리 하고 보스나 때려잡으러 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