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박세아가 만들어 준 음식으로 거하게 배를 채운 태정은 다시 탐색에 들어갔다.
어찌 됐건 이 근방에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꼼꼼히 돌아다니는 것밖에 없었다.
‘넓어도 너무 넓어.’
화구의 크기는 정말이지 심각할 정도로 거대했다.
부스터나 블라스터가 없다면 돌아다니는 데만 꼬박 한나절이 걸릴 정도.
비가 많이 오는 것도 문제였다.
그렇지 않아도 넓은 구역에 억수로 비가 쏟아지니, 무언가 있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인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혹시 몰라 기체를 소환해 레이더까지 돌려봤지만 의미는 없었다.
그렇게 별의별 수단을 동원해 돌아다니기도 한참.
외벽을 기준으로 탐색을 하던 그는 어느덧 처음 내려앉았던 호수 반대편에 도달했다.
“이제 곧 해가 지겠는데.”
흐린 하늘이 점점 더 시커멓게 변하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6시.
곧 있으면 밤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이대로는 답도 없을 거 같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음?”
잠깐 서서 고민을 하던 태정의 눈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는 바위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바위.
그가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본 바위는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바위였다.
딱히 특이할 만한 것도 없는.
그 위에 올라가 쪼그린 상태로 다시 생각에 잠기던 태정은 무심코 땅을 주시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물이 왜 이쪽으로 모여들지?”
바위 쪽으로 물이 모여들고 있었다.
처음엔 장애물에 막혀 고여 있는 줄 알았지만 자세히 보니, 물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다시 내려선 태정은 가까이 앉아 led를 비춰 봤다.
동시에 그의 뇌리가 번뜩였다.
“설마.”
무언가 생각이 떠오른 태정은 바로 물속에 손을 집어넣어 봤다.
그러자 바위 밑으로 주먹이 쑥 하며 들어갔고, 팔뚝까지 집어넣자 허공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빈 공간이라는 뜻.
바로 기체를 소환해 근접 형태로 전환한 그는 힘껏 바위를 밀어봤다.
들썩들썩.
바위가 들썩일 때마다 흘러 고인 물이 급속도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걸 본 태정이 부스터 출력을 100%로 올렸다.
그러자 박혀 있던 바위가 한 바퀴를 구르며 숨겨져 있던 구덩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이런 게…….”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이런 곳에 이런 게 있었을 줄이야.
태정은 아래로 led를 비춰 봤다
뭐가 있나 보기 위해서였는데, 아무리 봐도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깊다. 빛이 전혀 닿지 않아.’
공간이 매우 깊다는 것을 깨달은 태정은 즉각 야투경을 소환해 머리에 장착했다.
동시에 기체를 비활성화한 그가 블라스터를 출력 상태에 놓고 서서히 수직으로 진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염없이 내려가는 그의 신형.
누가 팠는지는 몰라도 상당한 깊이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들어가자 바깥 소음이 차단되고, 물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내려가면 갈수록 크게 느껴졌고, 어느 순간 바람이 한번 휙 불더니 태정의 앞으로 커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여기인가 보다.”
확실하진 않지만 왠지 그럴싸한 느낌이었다.
물의 깊이는 발목 위 정도로 깊은 편은 아니었다.
외골격 다리로 지상에 내려선 그는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굴의 전반적인 모습은 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은 아니었다.
지상에서 본 굴과 별다를 것이 없는 구조.
그렇게 신중히 한 발 한 발을 내딛던 그의 귀에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
철컥.
바로 총구를 전방으로 뺀 그가 걸음을 멈추고 통로를 주시했다.
야투경의 시계는 대략 20~30m
몬스터라면 보자마자 반응을 해야 한다.
잠시 후.
통로 끝에서 시커먼 무언가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팔다리를 벌린 인간으로 보이던 그것은 조금 더 가까이 오자 그 모습이 명확해졌다.
그것은 거꾸로 서 있는 초거대 거미였다.
확인을 한 그가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탕! 타탕! 타타탕!
통로를 환희 밝힌 빛의 탄환이 정체 모를 몬스터의 몸에 사정없이 틀어박혔다.
하지만 얼마나 몸이 단단한지 그대로 쳐 맞고 돌진해 들어온다.
그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지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연사에서 초연사로 변환시킨 태정이 다시 한번 방아쇠를 이어 갈겼다.
타타타타탕! 타타타탕! 타타타탕!
이전보다 훨씬 많은 탄환이 기어 들어오는 거미를 향해 때려 박혔다.
그러자 발작을 하듯 다가오던 놈의 신형이 발목이라도 잡힌 듯 제자리에서 전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계속 탄을 날리자 어느 순간 놈의 배때지에 구멍이 뚫렸고, 순식간에 몸이 쪼그라 들어 그 자리에 푹 주저 앉아버렸다.
[타이탄 스파이더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500만을 획득합니다.]
[거미의 실타래를 획득합니다.]
“와. 여기 난이도 장난 아닌데?”
한 마리를 잡는 데 거의 천 발을 때려 박은 태정이었다.
이 정도면 이곳에 오기 직전에 간 블루 9급보다도 훨씬 높은 난이도였다.
경험치만 해도 보스를 능가하는 수준.
정신이 번뜩하고 차려진 태정은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제라드, 너 저놈 아냐? 일반 몬스터야? 아니면 중간 보스야, 뭐야?”
-타이탄 스파이더는 일반 몬스터입니다.
“일반이 9급 보스보다 강해?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x 되겠는데.”
덕분에 느슨해진 정신 상태를 새롭게 무장할 수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수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벽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에겐 아직 쓰지 않은 패가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동이 시작되고 간간이 전투가 이어졌다.
주로 나오는 놈은 거대 거미와 날개가 달렸지만 날지 못하는 거대 박쥐였는데, 둘의 수준은 엇비슷했다.
연사 빨로 조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정도.
문제는 마나의 소비가 극심하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기체에 달린 슈퍼 발칸포를 사용한다면 놈들을 때려잡는 거야 일도 아닐 것이다.
지금 있는 총만 가지고도 그럭저럭 때려잡을 순 있으니까.
그리고 그 편이 마나 소비도 훨씬 적었다.
문제는 통로가 기체를 운용하기엔 너무 좁다는 것이었다.
‘포션이야 차고 넘치니까 그렇게 문제는 안 되는데, 이 총만 가지곤 금방 한계를 드러내겠는데. 언제 넓어지려나.’
길이 넓어지길 기대하며 꾸역꾸역 앞을 나아가던 그의 앞에 드디어 사방이 훤히 트인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야투경을 해제한 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이제 숨 좀 쉬겠네.”
공간은 빛 하나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정중앙에 놓인 계단과 제단으로 보이는 구조물 하나를 발견했다.
자연스레 걸음이 옮겨졌다.
제단 위엔 그림이 그려진 석판이 하나 있었다.
백록담을 표현해 놓은 것 같은 그 석판엔 어떠한 표식들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동굴을 표현해 놓은 것이었다.
“여기 다섯 개. 아까 거기. 그리고 여기. 뭐야? 입구가 20개도 넘잖아? 그렇게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더니. 이건 도면인가.”
개미굴처럼 이어진 한라산 내부의 도면.
그중에서도 현재 태정이 위치해 있는 곳은 5개의 메인 석실 중 가장 큰 곳이었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태정은 주변을 둘러보며 특별히 이상한 곳이 있나 유심히 관찰했다.
하이데어 소자가 있을 만한 곳.
하지만 아무리 훑어봐도 뭔가 있을 만한 곳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게 돌아다니기도 잠시.
다시 제단 위로 올라온 그는 석판을 만지다 판이 밀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렇게 옆으로 밀어보니.
다섯 개의 홈이 있는 금형이 나타났다.
동서남북을 잇고 있는 4개의 작은 홈과 중앙에 위치한 그보다는 조금 더 큰 홈.
이게 무엇일까 생각을 하던 그가 제라드를 호출했다.
“이거 뭔가 장치 같지 않냐?”
-그건 봉인을 해제할 때 쓰이는 판입니다.
“봉인 해제? 너 이게 뭔지 알고 있는 거야?”
-어떤 형태로 설계가 되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판의 형태를 보면 어떠한 봉인을 해제할 때 주로 쓰이는 의식의 판이 맞습니다.
“뭐가 봉인되어 있는데?”
-강력한 몬스터나 아티팩트, 그 외 암호화된 기관 장치나 진법 등이 있습니다.
“이게 맞는 것 같은데.”
제라드의 설명을 들은 태정은 왠지 이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백록담에서 가장 깊은 곳이자, 다섯 개의 메인 홀 중 가장 거대한 곳.
거기에 봉인을 해제할 수 있는 의식의 판까지.
하이데어의 소자는 이곳에 봉인되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문제는 아니었을 때의 일이 전혀 예측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몬스터가 봉인이 되어 있다 한다면 대충 얼마나 강할까.”
-평범한 놈은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만만한 놈이 이런 곳에 봉인되어 있을 리는 없으니까. 그보다 작동하는 법은? 그건 알아?”
-사방위에 있는 4개의 작은 홈에 똑같은 형태의 마정석 4개가 놓여야 하고 가운데는 그보다 높은 수준의 마정석이 놓여야 합니다.
“비싸기도 하다.”
-키 역할만 하기 때문에 소모되는 건 아닙니다.
“그럼 뭐 하냐. 결국 작동도 못 시킨다는 거 아냐. 내가 가진 마정석이라 해 봤자 아까 굴에서 얻은 4개가 전부… 아니지. 그 문어 놈한테 얻은 게 하나 있었지.”
태정은 즉시 인벤토리를 열어 마정석을 꺼내 봤다.
같은 크기의 마정석이 4개. 그리고 그보다 큰 덩어리의 마정석이 하나.
딱 다섯 개였다.
“문어 대가리한테 얻은 이 마정석이 굴에서 얻은 거보다 좋은 거 일려나? 일단 크기는 더 큰데.”
-봉인을 해제하실 생각이십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순 없잖아. 아니다 싶으면 도망가면 되는 거고.”
-놈이 하이데어의 소자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그럼 뭐… 이판사판이겠지. 확실한 건 이걸 풀어야 윤곽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거야.”
말을 끝으로 마정석을 하나둘 사방위에 배치했다.
그렇게 그의 손에 쥐어진 마지막 마정석 하나.
잠깐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마음을 잡으며 가운데 홈에 슬며시 마정석을 올려놓았다.
동시에 석판에서 강렬한 빛이 솟더니,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펑! 파팟! 펑!
“마나 아끼지 말고 팍팍 좀 써 봐.”
“하고 있어.”
“티도 안 나잖아, 제기랄.”
절망에 휩싸인 얼굴로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이들.
그들은 사냥을 나왔다 산 채로 매장이 된 일본인 헌터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허망한 얼굴로 앉아 있던 이쿠죠가 힘 빠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한 짓하지 마라. 체력만 소모될 뿐이야.”
“하지만 대장! 이건 너무 억울하잖아. 이런 개죽음이 어딨냐고, 대체!”
“다 내 탓이다. 날 욕해라.”
“그러지 말고 와서 스킬이라도 좀 써 봐, x발.”
“소용없어. 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우린 결국 굶어 죽을 거야, 비참하게.”
이쿠죠는 이미 포기를 한 상태였다.
아무리 날고 기는 헌터라 해도 자연의 벽 앞에선 한낱 미물에 불과한 것.
그 옆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마사지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걸 왜 거기다 걸어 놨을까. 내가 왜 거기다…….”
“마사지마, 자책하지 마라. 다 내가 못나서 이렇게 된 거니까. 넌 아무런 잘못이 없다.”
“아니, 이건 내 잘못이다, 이쿠죠. 네가 책임을 짊어질 필요 없어.”
“아니다. 이건 리더로서 내가…….”
서로 꼴 같지도 않은 신파를 찍고 있는 그때.
갑자기 대지가 심하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드드드드.
“뭐, 뭐냐!?”
“지진입니다!”
“다들 엎드려!”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었다.
혼비백산한 헌터들이 저마다 벽에 붙어 대비를 하고 있는 그때.
갑자기 그들 앞으로 엄청난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 빛은 순식간에 그들을 집어삼켰고, 잠시 후 빛이 사라진 동굴엔 헌터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