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온 태정은 반신욕을 하며 머리에 쌓인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었다.
그렇게 잠시 잡생각을 닫고 뜨거운 물에 몸을 지지고 있는데.
돌연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메카닉의 길. 퀘스트 종료까지 72시간 남았습니다.]
[서둘러 퀘스트를 시작하십시오.]
“이건 또 왜 이래?”
중얼거리며 허공에 뜬 메시지 창을 보던 그가 퀘스트 창을 오픈했다.
[메카닉의 길 1-3]
아라곤의 미로.
흑룡 아라곤은 먼 고대 천계의 전사들을 피해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미로를 만들어 자신을 봉인하였습니다.
출구를 찾아 아라곤의 봉인을 해제하십시오.
목표
아라곤의 봉인 해제.
보상 - 태극 1호, R타입 이레이저 건
*퀘스트 종료까지 72시간 남았습니다.
미 클리어 시 메카닉의 길을 더 이상
진행하실 수 없습니다.
남은 시간: 71:59:02
보지 못했던, 아니 존재하지 않았던 내용이 창 하단에 달려 있었다.
“종료까지 72시간… 미 클리어 시 진행이 안 된다니? 제라드.”
몸을 기대고 누워 있던 그가 자세를 바로하며 제라드를 호출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예. 주인님.
“이거 처음부터 있던 건가?”
-아닙니다. 조금 전 새로 생긴 데이터입니다.
“이거 있는 대로 해석하면 되는 거야? 72시간이 지나면 진행이 되지 않는다고 나와 있는데. 아주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일정 기간 동안 진행이 안 된다는 거야? 어느 쪽이야?”
-전자가 맞습니다.
“그럼. 3일 안에 끝내야 한단 소리잖아?”
태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사실 그는 미로에 대해 딱히 생각을 해 놓은 것이 없었다.
그저 성장을 바탕으로 힘이나 더 키울까 했던 것이 계획이라면 계획.
하지만 길드에 연이어 악재가 터져 버렸고, 그 덕분에 그는 차마 사냥을 다녀오겠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비상근무 중인데 혼자서 커 보겠다고 외출을 하기가 미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무를 수 없다는 말인데.”
다음 날.
양태식의 집무실.
“휴가가 필요하다고?”
“예. 밖에 좀 다녀올 일이 생겨서요.”
“혹. 분쟁 건 때문인가? 그거라면 자네는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인 용무입니다.”
“개인적인 용무? 그런 거라면 굳이 나를 통할 필요가 있나. 자네는 지역대의 대장이자, 익스클루브 등급의 헌터야. 자유로운 몸이란 말이지. 신상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선 휴가 정돈 내 허락을 따로 받을 필요가 없어. 그때 말을 해 줬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드 사정도 어려운데, 제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마음에 좀 걸려서요.”
“자네는 능력만큼 책임감도 투철하군. 뭐 알다시피 이번 일은 인력으로 어떻게 해결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내 들으니 자네 주말도 없이 출근을 하고 있다던데. 그 정도면 충분히 할 몫은 한 거야. 마음 쓰지 말고 다녀오게. 단, 절대 일신에 문제가 생겨서는 안 돼. 항상 자네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잊지 말게.”
“알겠습니다.”
길드장의 허락을 받아 밖으로 나온 태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락이야 떨어질 줄 알고 있었기에 별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국내 단 9인만 클리어 한 아라곤의 미궁.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 돌아온’이 맞을 것이다.
정보라도 있으면 기댈 곳이라도 있겠지만, 길드를 비롯해 외부의 여러 커뮤니티를 모두 뒤져 봤지만 이곳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는 것이 없었다.
완전한 미지의 던전.
“남은 시간은 이제 이틀 반. 진행 시간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오늘 저녁엔 진입을 해야 해.”
다시 숙소로 복귀한 태정은 일단 먹을거리를 싸기 시작했다.
대충 인스턴트와 과자 위주로 한가득 챙겨 인벤토리에 처박은 그는 회사에 있을 박세아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며칠 나갔다 올 거야.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라도 누가 물으면 미궁에 대해선 말하지 말고.”
-거길 가시려구요? 거긴 아홉 명밖에…….
“알아. 근데 나한테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너무 걱정은 말고,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아, 그리고… 정말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네, 말씀하세요.
“정말 만약에 내가… 음. 아니야. 다녀올게. 다녀와서 봐.”
태정은 자신이 잘못되었을 때를 대비해 유언을 남기려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전화를 끊었다.
‘재수 없는 생각은 하지 말자. 무조건 클리어 하는 거야, 무조건.’
위험부담이 큰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무조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정에게 있어 퀘스트는 메카닉 클래스의 절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다.
당장 이걸로 얻은 스킬만 해도 주력의 절반이 넘는 상황.
즉. 이걸 포기한다면 이후에 얻게 될 수많은 스킬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태정은 꼭 가야만 했다.
반쪽짜리가 되지 않으려면.
다짐을 하며 숙소를 나선 태정은 1층으로 가지 않고 옥상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게 되면 동선이 남기 때문에, 비행을 해서 가겠단 생각이었다.
“그때 주소 기억하지?”
-옥산동 75-1 말씀하시는 겁니까.
“어. 거기로 갈 거야.”
제라드의 안내를 받아 구 안성 옥산동을 찾은 태정은 눈앞에 보이는 포털 하나를 바라봤다.
시퍼렇게 일렁이는 푸른색의 게이트.
제닉스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11등급의 홀이었다.
사실 말이 소유지 애초에 이곳은 아무도 찾지 않기 때문에, 그 흔한 근무병력조차 없었다.
“오긴 왔는데. 으음. 막상 들어가려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
얼마나 강한 놈들이 바글거릴지 상상도 되지 않는 곳.
정보가 하나도 없는 곳.
망설임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굳게 마음을 다잡았다.
‘제주도에서 그 엄청난 놈도 때려잡았는데. 할 수 있어.’
“아자! 간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기합으로 날려 버린 태정은 당당한 걸음으로 게이트에 진입했다.
그러자 사방이 빛으로 빙그르 돌더니, 순식간에 낯선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귓가로 알림음 하나가 들려왔다.
[아라곤의 미로에 진입하셨습니다.]
[퀘스트 진행 시간이 999일 연장되었습니다.]
“응? 999일?”
말을 뱉음과 동시에 태정이 퀘스트 창을 확인했다.
[1001일 18시간 25분]
시간이 무려 999일이나 늘어나 있었다.
기존에 있던 것과 합쳐서 1001일.
하고도 18시간 25분이었다.
“뭔 놈의 시간이…….”
추가 시간이 붙은 것도 전혀 예상을 하지 못했지만, 늘어난 시간이 너무 비상식적이었다.
며칠도, 몇 주도, 몇 달도 아닌 거의 3년에 가까운 시간이라니.
다소 어이가 없었지만 이걸로 하나는 확실해졌다.
“단시간에 클리어 할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야.”
창을 닫은 그는 곧장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당장 보이는 것은 사방이 석벽으로 막힌 하나의 통로였다.
그 벽의 양옆으론 횃불 같은 것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는데, 그로 인해 시야는 굉장히 좋았다.
진입한 게이트는 보이지 않는 상태.
‘딱히 특이한 점은 모르겠는데. 일단 전진해 보자.’
통로가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그는 초반부터 기체를 소환했다.
장비 또한 풀 무장을 한 상태였는데, 이전 퀘스트의 난이도를 고려한 셋업이었다.
그렇게 그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력은 10%대로 굉장히 느린 편이었다.
사람의 걸음보다 조금 빠른 수준이랄까.
그 모습이 덩치에 비해 조금 답답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몬스터 레벨을 모르는 그로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괜히 뭣도 모르는데 까불다가는 골로 가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한 시간 남짓.
레이더에 잡히는 물체가 하나도 없고 점점 공간에 익숙해진 그는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20%, 30%, 40%.
그렇게 2시간이 더 지나고.
그는 출력의 50%까지 끌어내 달리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없는 거지? 지금쯤이면 뭐가 나와도 나와야 정상인데.’
계속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좌우로 늘어진 횃불들이 이제는 지겨워 신물이 날 정도.
“데이터 들어온 거 없어?”
-예. 주인님. 이곳의 데이터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던전에 들어오면 데이터를 내려받는 경우가 있었기에 혹시나 싶어 물어본 태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곳이라 그런지, 들어오는 데이터가 티끌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달리길 한 시간.
드디어 그의 시야에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경은 딱히 바뀐 것이 없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조금 큰 공간과 함께 드러난 다섯 개의 통로.
“여기서부턴가.”
태정은 통로마다 새겨진 숫자를 바라봤다.
[1-5, 2-10, 3-5, 8-9, 9-2]
“뭔가 문제 같지는 않고. 각 방의 번호인거 같은데. 혹시 이거 이거저거 대입해서 해석할 수 있겠어?”
-딱히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확률도 당연히 모르겠지.”
-출구에 대한 확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좋아. 그럼 1-5로 간다. 혹시 뭔가 잡히는 게 있으면 바로 말해 줘.”
태정이 선택한 통로는 가장 첫 번째에 있는 1-5번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첫 번째니까 그냥 가 보는 것이다.
어차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의 확률은 20%.
차근차근 하나씩 돌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가 나오지 않을까.
그렇게 통로로 들어간 태정은 또 처음과 같은 일을 반복하며 지루한 이동을 계속했다.
이제는 거의 80% 출력을 내고 있는 상태.
스치는 횃불의 이미지가 뭉개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그 끝은 언제 닿을지 모를 정도로 길고 또 길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다시 공간이 넓어지며 통로가 나타났다.
이번엔 좌우 4개와 전방에 2개 그리고 그가 튀어나왔던 통로와 그 옆에 존재하고 있는 같은 방향의 통로까지 총 여덟 개였다.
“이거 어디로 가야 되냐.”
앞의 통로는 숫자가 9번대와 7번대였다.
그가 들어왔던 1번대는 좌측의 통로.
문제는 뒤 번호가 4라는 것이었다.
“그럼 1-1이 출구인가? 제라드, 여기 있는 번호 전부 외워 놔. 혹시 모르니까 말이야.”
-알겠습니다.
쭉 한길로 직진해 볼까도 싶던 그는 우선 1번대부터 조지기로 했다.
그렇게 다시 이동이 시작됐다.
두 개의 통로를 지나며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태정은 이제 최대출력으로 내달렸다.
그만큼 주파하는 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처음과 비교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1-4를 통과한 그의 시야에 또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총 열 개의 통로였다.
“계속 늘어나네. 2개씩 늘어나는 건가.”
또다시 추가된 통로에 중얼거리기도 잠시.
그는 좌측에서부터 번호를 훑기 시작했다.
“칠. 팔. 십. 오… 뭐야? 없잖아?”
통로의 숫자를 확인하던 태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마지막 통로의 숫자를 몇 번이고 재확인했다.
10개의 통로 중 1번대 번호가 적힌 곳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면 난감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