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오전 회담이 끝나고 레스토랑으로 안내된 그들은 일부러 보란 듯 왁자지껄하며 점심을 먹었다.
그런 그들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은 태정.
수많은 산해진미를 앞에 놓고도 그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보스, 보스……?”
“어? 불렀어?”
“괜찮아요?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내 표정이 왜?”
“무서워요.”
박세아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가 한숨을 쉬며 표정을 풀었다.
“미안. 나도 모르게… 화가 웬만큼 나야 말이지. 먹어. 눈치 보지 말고.”
태정은 억지로라도 음식을 입에 집어 넣었다.
자신이 먹지 않으면 그녀 역시 손도 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신경은 온통 어떻게 놈들을 조질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 800, 아니 700 즈음만 돼도 해볼 만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순항 미사일도 얻어야 하고.’
냉정하게 말해 지금 상황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퀘스트를 완료해 강력한 무기를 얻고 또 퀘스트를 해 더 강력한 무기를 얻는 것 외에는.
그중 하나가 지금 걸려 있는 분착식 순항 핵미사일이었다.
어쩌면 분쟁의 억지력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무기.
앉아서 서울 일부와 수도권 외곽을 타격할 수 있는 있는 이 무기라면 당장은 몰라도 다른 무기와 조합이 되었을 때 충분히 협상의 카드로 사용할 수가 있었다.
‘어떻게든 알아내야 해. 하지만 확률이 너무…….’
b6-1을 통해 길드의 구조물들을 빠짐없이 찍고 있었지만, 이걸 안다고 해서 스킬 마석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침투 경로와 퇴로가 확보된다는 것.
나머진 이를 바탕으로 수상쩍은 곳을 뒤져 보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어떤 알람이나 경보 마법이 걸려 있을지 모르는 상황.
그야말로 앞이 캄캄한 작업이었다.
식사를 마친 태정은 시간이 많이 남자 간부들과 함께 테라스로 나갔다.
얼마나 돈을 때려 박았는지 건물 하나는 끝장나게 잘 만들어 놓은 금사자였다.
“잠깐 이리 와 봐.”
바람에 머리를 흩날리고 있는 박세아를 향해 뱉은 태정의 말이었다.
“머리가 이렇게 산발로 날려서 되겠냐. 돌아서 봐. 묶어 줄게.”
“괜찮아요. 제가 해도…….”
“돌아 봐. 너 얼굴도 안 보이잖아.”
그녀의 머리를 정돈해 주고 있는데, 저 멀리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최다솜?’
정면으로 눈이 마주친 그들.
그녀가 태정을 향해 걸어왔다.
그 모습을 본 박세아가 자리를 비켜 줬고, 어느새 다가온 최다솜이 태정의 옆에 섰다.
“또 보네.”
“그러게.”
“우연인가.”
“글쎄.”
“회담은 어떻게 됐어?”
“쉽지 않을 것 같아. 네 말이 다 맞더라. 어쨌든 정보 고마웠다.”
“뭘. 대단한 것도 아닌데. 그럼 이제 어떡할 생각이야?”
그녀의 물음에 태정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나도 몰라. 난 길드에서 그렇게까지 영향력이 크지 않거든.”
“날 믿지 못하는구나.”
“우리 길드 일이니까. 내가 함부로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네가 이해해.”
“많이 변한 것 같네.”
“내가?”
“어딘지 모르게 어른스러워진 느낌이야, 예전엔 이러지 않았는데.”
그녀의 엉뚱한 말에 태정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나이가 곧 30인데, 너라고 다를 것 같냐. 지금 그 모습, 8년 전과 비교하면 매치가 안 돼.”
“그래? 나, 나이 들어 보여?”
“야. 8년인데. 양심이 있어라.”
“그렇구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말없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어색한 그들의 모습.
8년이란 세월은 그런 시간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는.
그렇게 나란히 서서 한동안 거리를 구경하고 있던 태정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됐다.
“그런데 저건 뭐야?”
“어디?”
“저기 굴같이 생긴 곳 말이야. 무슨 공사하는 것 같은데? 벙커인가?”
“아. 길드 지하 창고야. 내부 증축 때문에 벌써 여섯 달째인데 이제야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었어.”
“그래? 규모가 얼마나 크기에 여섯 달씩이나 공사를 해?”
“지하 6층까지 이어져 있으니까. 게다가 저곳은 1급 창고라서 일반 인부는 들어가지도 못해. 그러니 시간이 더 걸릴 수밖에 없지.”
“6층이라. 확실히 톱 티어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창고를 지하 6층까지 파놓고 쓰다니. 1급이면 좋은 것도 많이 들어가 있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지? 우리 길드에 1급 창고는 두 곳밖에 없으니까. 하나는 저기 서쪽에 있는 곳인데. 장비들을 보관해 놓고 지금 보이는 저긴 층별로 그 외의 것들을 보관하고 있어. 보기 드문 아티팩트나 마석 같은 것 말이야.”
마석이란 말에 태정이 자연스레 그녀를 돌아봤다.
“그럼 저 넓은 공간에 마석이 가득 차 있단 소리야?”
“그건 아냐. 일반적인 마석은 따로 보관하는 곳이 있고. 저곳은 시중에서 보기 드문 것들이 많지. 개수로 따지면 얼마 안 될걸? 참 우리 작년에 특이한 마석 하나 발견했거든. 아직 외부에 공개도 안 했는데. 마석이 꼭 큐브처럼 생겼어.”
“뭐? 그게 진짜…….”
순간 태정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자 놀란 눈을 하며 빤히 쳐다보는 그녀.
뒤늦게 실책을 깨달은 그가 멋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이런 곳에 파리가 다 있냐.”
“파리?”
“어. 여기 원래 파리 많냐.”
“바로 옆이 식당이라 그런가. 난 한 번도 못 봤는데.”
“근데 무슨 말 하다가 끊겼지? 아. 큐브 뭐라고 하지 않았어?”
“응. 희귀 마석인데 아직 세계 도감에도 등록되지 않은 마석이야. 큐브 알지? 옛날에 석호가 가지고 놀던 거. 그거랑 정말 똑같이 생겼어. 크기는 훨씬 크지만.”
“그래? 그런 희귀 마석을 보관할 정도면 보안도 철통이겠네.”
“맞아. 저곳을 뚫으려면 하이 레벨의 어비스 정도나 가능할 거야. 우리 길드의 날고 긴다는 어쌔신들도 똑같은 시스템인 서쪽 창고를 뚫지 못했거든. 뭐 저곳은 공사 중이라 다 내려가 있는 상태지만.”
최다솜의 말에 태정은 속으로 쾌재를 내질렀다.
범위가 너무 넓어 특정할 수도 없는 이 막막한 상황에 답이 떡 하고 튀어나오다니.
실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황당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이 정도면 기밀 사항이 분명한데, 거리낌 없이 술술 불어 대는 그녀가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간은 의심도 드는 태정이었다.
일부러 유도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 백 번을 생각해 봐도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았다.
그녀는 그가 클로킹 기술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너희 간부들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데, 여긴 꽤 괜찮은 것 같아. 전망도 나름 좋은 편이고.”
“그래 보여? 나 실은 여기 살거든.”
“이 건물? 여기 사무 빌딩 아니었나?”
“18층 위로는 레지던스야. 그래서 레스토랑이 있는 거고. 정확히 말하면 숙소지?”
“그래? 좋은데 사네. 나 이제 가 봐야겠다. 슬슬 오후 회담 들어가야 돼.”
“아, 그래. 그래야지. 저기… 태정아.”
“왜?”
“나중에 우리 또 볼 수 있을까.”
“시간 나면. 그땐 커피 한잔하자.”
오후 회담도 별다른 진척은 없었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상황.
설전이 오가는 사이에도 태정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오늘 거길 털어야 돼. 무조건 털어야 돼.’
의미 없는 두 시간이 흐르고 저녁을 먹은 그들은 다시 처음에 있던 그 호텔로 돌아왔다.
“회의록 한번 보실래요?”
박세아가 수기로 적은 회의록을 들며 물은 말이었다.
그 말에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져 있던 태정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됐어. 지금 그거 볼 때가 아니야.”
무언가 고민이 깊어 보이는 듯하자 박세아가 조용히 의자에 앉아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러자 오늘 테라스에서 있던 일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무심한 얼굴로 머리를 묶어 주던 그의 다정한 손길.
돌아가신 아버지 외에 그런 사내의 손길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설렜다.
좋았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 친절인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장면이 전환되고 또 다른 이미지가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구석에 앉아 바라봐야만 했던 최다솜과 태정의 뒷모습.
흡사 연인과도 같이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보스는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한 걸까.’
왠지 보기가 싫었다.
그 여자가.
순간 깜짝 놀란 듯 박세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바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부끄러움에 얼굴이 발개진 그녀를 태정이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너 뭐 하냐?”
“네? 네!?”
“머리는 왜 흔드는 거야. 얼굴은 왜 빨갛고. 어디 아파?”
“아, 아뇨. 그냥 좀 더워서…….”
“그래? 난 딱히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지금부터 뭘 좀 할 생각인데. 놀라거나 소리 지르지 마.”
“뭘 하실 생각인데요?”
“그냥 엄청 큰 게 하나 나올 거야. 방으로 들어가 있어.”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일단 그녀는 태정이 시키는 대로 침실로 들어갔다.
이후 거실 공간을 확인하던 태정이 프로텍터 아머를 소환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거실을 가득 채운 기체 한 기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을 직관하고 있는 박세아가 토끼 눈이 되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있는 그녀.
마치 괴물이라도 본 얼굴이었다.
그런 박세아를 향해 태정의 음성이 들려왔다.
“놀랐어? 이게 내 스킬이야. 지금 내가 뭘 좀 해야 할 게 있거든.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거 하면 돼.”
눈을 땡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뒤로 하고 그가 제라드를 호출했다.
“우리 오늘 오고 가면서 찍은 거 있지? 디스플레이에 송출해 봐.”
-알겠습니다. 송출 완료되었습니다.
디스플레이에 뜬 이미지를 축소 확대하며 태정은 적절한 사이즈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미리 들고 있던 박세아의 다이어리에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 작업은 몇 번에 걸쳐 이어졌고, 약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주요 건물 등이 그려진 약도 하나가 만들어졌다.
“좋아. 이 정도면 아까 거기까지 충분히 찾아갈 수 있어. 부족한 건 실시간으로 전달받으면 되니까.”
작업을 완료한 태정은 기체를 접고 아직까지도 얼어 있는 박세아를 향해 다가갔다.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처음 봤어요, 그런 거.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꺼내신 거예요?”
“준비물 때문에.”
“준비물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그녀의 양어깨를 태정이 살며시 붙잡았다.
그리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사뭇 진지한 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박세아, 내 말 잘 들어. 난 지금 이곳을 빠져나갈 거야. 당연히 금사자 놈들은 물론이고, 간부님들에게도 비밀로 할 생각이지.”
“건물을 빠져나가시겠다구요?”
“그래. 다시 돌아오려면 얼마나 걸릴 지 몰라. 빠르면 4시간. 늦으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네 역할이 아주 중요해.”
“제가 무슨…….”
“내가 이곳을 빠져나갔다는 걸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선 안 돼. 아까 순검을 한번 돌았으니까, 누가 올리야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네가 막아 줘야 돼.”
“하지만 길드장님이…….”
“할 수 있지?”
말을 끊으며 재차 묻는 그의 눈빛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해 볼게요.”
“좋아.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넌 똑똑하니까. 어떤 식으로든 잘 해낼 거야. 그럼 믿는다, 박세아.”
그 말을 끝으로 태정이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아 그의 말을 되뇌는 그녀.
“믿는다… 박세아?”
작은 미소와 함께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