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마지막 경고입니다. 열지 않으면 따고 들어가겠습니다.”
“거 사람 융통성하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고 있는 제닉스의 공대장과 마스터키를 든 금사자 길드의 사내.
막 그가 키를 가져다 대려는데.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아니, 있으면 대답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려던 사내는 금방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가운으로 겨우 중요 부위만 가린 여자가 훅 하고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하아, 무슨 일이세요?”
“아…….”
숨을 헐떡이며 반쯤 눈이 풀린 여자의 모습.
술을 얼마나 먹은 건지 찌든 알콜 냄새가 복도까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위태롭게 내려갈 듯 말 듯 줄타기를 하고 있는 가운과 차마 볼 수가 없다는 듯 고갤 돌려 버린 사내.
그 옆에 공대장 김한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네?”
“그… 인원 점검 나왔습니다. 일단 들어가시고 안에 지역대장을 좀…….”
용건을 뱉는 사내를 향해 박세아가 휘청거리며 그를 덮쳤다.
“헉. 조, 조심.”
“어머. 괜찮아요? 죄송해요. 옷이 너무 조여서… 어? 헐렁하네.”
“네? 그게 무… 어어어. 어어!”
몸을 가린 가운이 내려가고 있었다.
사내가 기겁을 하며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박세아의 가운을 잡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김한수가 그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가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네, 아주 몹쓸 사람이구만. 어디 다 큰 처자의 몸을…….”
“그, 그게 아니라 가운이 내, 내려가길래.”
“변명하지 말게. 제닉스 길드의 공대장으로서 기분이 몹시 불쾌하니까 말이야. 어디 사내가 할 짓이 없어서 협상단으로 온 비서를… 이봐. 박 비서. 얼른 정신 차리고 들어가.”
김한수의 말에 그녀가 겨우 몸을 가누며 일어섰다.
그러자 그래도 할 일은 해야겠다는 듯 사내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크흠. 안에 지역대장을 좀 불러 주십시오.”
“우리 대장님이요? 우리 대장님 지금 나올 수 없는데… 이제 막 벗었단 말이에요.”
말에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김한수가 낮게 일갈했다.
“어서 들어가지 못해! 이게 대체 무슨 추태야.”
“흐응. 죄송합니다. 보스가 술을 너무 많이 먹여서 혀가 자꾸 꼬이네요. 헤.”
“끄응. 들어가, 얼른 들어가. 어서.”
떠밀리듯 안으로 들어간 박세아를 뒤로 하고 김한수가 문을 닫았다.
그러자 사내가 이게 무슨 짓이냐는 듯 반발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자네는 눈이 삐꾸인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어?”
“그, 그래도 확인을 할 건 해야…….”
“좋아. 자네가 우리 지역대장의 사랑을 방해하겠다면 내 더는 말리지 않지. 대신 내일 회담에서 자네가 우리 박 비서에게 한 짓을 낱낱이 밝히겠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는 아무 짓도…….”
“어디서 발뺌이야, 내가 직접 봤는데. 자네의 그 엉큼한 두 손이 우리 박 비서의… 크흠. 차마 말하기도 낯부끄럽구만. 아무튼 그리 알고 나는 이만 가네.”
김한수가 자리를 뜨려 하자 사내가 급히 그를 붙잡았다.
“아, 알겠습니다. 확인한 걸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코 제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시간이 늦어 넘어가는 것이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뭐 한 번은 믿어 주도록 하지.”
“그런데 공대장님께선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고작 이 건물 안에서, 내가 내 발로 돌아다니지도 못하나. 적적해서 지역대장과 술이나 한잔할까 싶어서 온 거야. 뭐 보다시피 그는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렇군요. 뵀으니 따로 올라가진 않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래. 수고해.”
사내가 떠나고 잠깐 태정의 방 앞에서 술병을 들고 있던 김한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섰다.
“하여간 요즘 젊은 사람들은. 후후. 나도 한때는 불타올랐던 때가 있었는데. 청춘이 부럽구만, 부러워.”
문 앞에서 모든 대화를 듣고 있던 박세아는 인기척이 사라지자 문고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의 가냘픈 신형.
너무 긴장을 해 경련이 오는 것이었다.
“하아.”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또 올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부끄러움에서 오는 수치스러움.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임무를 완수해 냈다는 생각에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해냈어. 그래도 해냈어.’
* * *
어쌔신들이 방심한 틈을 타 굴 안으로 진입한 태정은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입구와는 상당히 멀어진 상태.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걸으면서도 그는 이게 잘하는 짓인가 몇 번이고 생각했다.
본능적으로 진입을 하긴 했지만, 나갈 때도 같은 수법이 통하리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반응했어.’
무의식중에 깔린 욕심 때문이었다.
이번 한 번에 끝을 보고 싶다는 욕망과 편의주의가 부른 행동.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지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무 일도 없이 나가는 것이 베스트지만, 발각이 된다 하더라도 정체만 들키지 않으면 큰 문제는 없었다.
도망은 자신이 있으니까.
걷고 걷기를 반복하기도 잠시.
굴의 끝에 이른 태정이 또 하나의 계단을 발견했다.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니.
또 하나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창고의 마지막 층.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여기서부터가 진짜 창고임을 깨달았다.
단정하게 배치가 되어 있는 호화스럽게 생긴 진열장과 단독으로 올라가 있는 이름 모를 아이템.
그 앞엔 레이저로 글자가 새겨진 고급스런 석판도 있었는데, 해당 아이템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다솜이가 말했던 게 이거군.’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움이 물씬 느껴지는 진열대들.
그는 하나하나 돌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헤르메스의 깃털.
아이템 랭크 S
중거리 이동 포털.
이동 거리 약 200km
구입가: 280억
특징 – 900레벨 이하 방해 스킬 면역
1회성 소모품
디바인 그레이트 실드
아이템 랭크 S
광역 보호막.
시장가: N
물리마방 누적 100만 상쇄.
1회성 소모품
인텔리전트 에이스
아이템 랭크 S
광역 해제기
시장가: N
100미터 내외 5등급 버프 모두 해제.
하나같이 다 S랭크 내지는 A랭크의 소모성 아이템들이었다.
한두 개만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아직 차지 않은 빈 진열대도 무수히 많았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각양각색의 처음 보는 마석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누가 봐도 정밀하게 깎아 놓은 듯한 정사각형의 큐브와 같이 생긴 마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눈을 빛내며 다가간 태정이 석판에 새겨진 글씨를 읽었다.
이름 미정
드롭 장소 악마의 대지
추정 마력 3테라토노.
시장가 없음.
“이거야, 이게 분명해. 제라드.”
-예, 주인님.
“이거 맞지?”
-그렇습니다.
“오케이. 일단 심호흡 좀 하고.”
목표물이 바로 코앞에 있었지만, 태정은 바로 마석을 꺼낼 수가 없었다.
혹시 여기에 개별 마법이라도 걸려 있다면 낭패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그냥 나간다는 건 더더욱 있을 수가 없는 일.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그에겐 걸려도 들키지 않고 나갈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남아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들어올 때도 사용을 하지 않았던 생화학탄.
그것이라면 알람을 듣고 뛰어온 어쌔신들을 재우고 충분히 빠져나갈 수가 있을 것이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만반의 준비를 갖춘 태정이 진열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양손으로 뽑아 들자 묵직한 무게와 함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의 쌀 반 가마니는 되겠는데. 족히 40kg은 되겠어. 저장된 마력의 양이 많아서 그런가? 얼른 넣었다 빼자.”
별다른 장치가 없음을 확인한 태정은 곧장 마석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내부에서 강렬한 빛이 솟구치며 반가운 알림음이 들려왔다.
[잃어버린 유산 B를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으로 분착식 순항 핵미사일을 획득합니다.]
“하아.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안도감에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 불가능했던 미션.
자칫 장기간 방치될 수 있었던 퀘스트였기에 뿌듯함 역시 크게 다가왔다.
볼일을 모두 마친 태정은 이제 마석을 제자리에 돌려 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마석이 딸려 나오지 않는다.
본드라도 발라 놓은 듯 꿈쩍도 하지 않는 마석.
양손으로 힘껏 당겨 보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거 왜 이래? 왜 마석이 꿈쩍도 하지 않지?”
-해당 마석은 일시적으로 봉인되었습니다.
“봉인이라니?”
-이 마석은 오직 메카닉 클래스를 위해 만들어진 아이템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필요 없잖아. 근데 왜…….”
-이 이상의 답변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꼭 이럴 때만. 이거 이러면 아침부터 난리나겠는데.”
계획에 없던 변수였다.
원래 그의 계획은 퀘스트만 완료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길드의 주요 인사가 모두 들어와 있는 마당에 괜한 사건을 만들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결국 창고는 털린 것이 되고, 날이 밝으면 이것으로 인해 시끄러워질 것이 분명했다.
“뭐… 우리완 상관없으려나?”
톡 까놓고 말해 제닉스가 의심을 받을 확률은 제로였다.
숙소에서부터 거리도 거리인 데다 철통같은 감시를 받고 있으니까.
게다가 이곳이 비밀 창고라는 것을 아는 이들도 없었다.
최다솜만 입을 닫는다면.
딱히 거리낄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 이미 저지른 거 어쩌겠냐. 그냥 나가자.”
서둘러 나가려는 그때.
태정의 신형이 멈칫하며 자리에 섰다.
그리곤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여기저기 보이는 값비싼 아이템들.
“근데, 하나 없어지나 다 없어지나 똑같은 거 아냐?”
어차피 마석이 사라졌기 때문에 창고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다른 것들을 남겨 놓을 필요가 있을까.
보너스였다.
합리화를 하며 그가 아이템들을 싹 쓸어 담기 시작했다.
개수는 몇 개 되지 않았지만 하나하나의 가격이 수백억대에 이르렀기에 이것만 해도 자신으로 인해 피해가 생긴 길드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아이템과 마정석을 모두 쓸어 담은 태정은 석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은 건 4층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어쌔신들.
들어올 때와 다르게 큰 부담은 없었다.
아침이면 이곳은 털린 곳이 될 테니까.
마음껏 화학탄을 써도 된다는 뜻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5분이나 걸었을까.
4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며 좀 더 속도를 내려는 그때.
돌연 태정의 눈앞으로 금색의 빛이 치솟았다.
‘이건…….’
빛을 봄과 동시에 그가 본능적으로 몸을 빼며 블라스터를 소환했다.
하지만 빛은 자석처럼 따라와 그의 신형을 묶어 버렸고, 소환되려던 스킬이 비활성 상태로 돌아갔다.
동시에 들려오는 갖가지 상태 메시지들.
[속박진의 영향권에 들어오셨습니다.]
[클로킹이 해제됩니다.]
[아머 슈트가 해제됩니다.]
[블라스터가 해제됩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해 버린 태정은 당황할 새도 없이 몸을 비틀며 제라드를 호출했다.
“이거 뭐야? 어떻게 풀어?”
-대형 속박진이라 현재 주인님의 힘으론 풀 수 없습니다.
“속박진? 아까 통과했잖아?”
분명 들어올 때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은 태정이었다.
그래서 더 당황스러웠다.
이게 대체 언제 설치가 된 것일까.
속박을 당하면서도 태정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압박만 심해져 이제는 숨을 쉬기도 가쁜 상태가 됐다.
“호흡이…….”
숨 쉬는 것도 힘든 태정에게 제라드의 경고음이 들려왔다.
-누군가 근처에서 접근 중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
이윽고 계단을 타고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계단을 내려선 이의 모습이 그의 눈에 잡혔다.
동시에 태정의 동공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너! 너는?”
“역시 너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