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염동여제.
누군가는 멸절의 마녀라고도 부른다.
히든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에스퍼 클래스의 헌터.
초인클럽의 서열 3위이자, 세계 3대 클럽인 악마성을 단신으로 무너뜨린 괴물.
그녀의 이름은 한설아였다.
“누님이 어떻게…….”
얼굴을 확인한 태정의 중얼거림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몇 간부의 표정이 밝아졌다.
“클럽에서 보낸 거야.”
“역시.”
“이대로 내버려 둘 위인들이 아니지.”
무려 클럽 서열 3위의 등장에 거의 축제 분위기에 다다른 제닉스 인사들.
반면 최철호와 조영민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곳에 올 여유가 없을 텐데?’
‘지금쯤 연합이랑 피 터지게 싸우고 있어야 할 저년이 어떻게 여기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었다.
그래서 충격이 더욱 크게 다가왔다.
특히 최철호는 체감이 더 심했는데, 정문 본진의 건물들이 죄다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시나리오에 없던 상황이야. 설마, 악의 연합이 패한 건가?”
“그럴 리가. 아무리 클럽이 강해도 악은 세계 5대 연합 중 한 곳인데.”
“그럼 저건 뭐야.”
“내가 볼 땐 혼자 온 것 같은데… 들이받자.”
“뭐라고?”
“잊었나. 여긴 우리 본진이다. 먼저 공격까지 받았으니 명분도 충분하고. 우리가 전력을 다하면 여제 하나 정도야…….”
나름 상황을 파악하며 진지하게 말을 꺼낸 조영민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최철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욕을 뱉었다.
“이런 등신 같은 새끼가, 여긴 내 길드야. 우리 본진이 아니라.”
“그럼 어쩌자고?
“저 높이를 한번 봐라. 방공망이 그냥 뚫렸어, 뚫린지도 모르게. 괴물… 아니, 그 이상이라고 저 여자는. 맞붙으면 이긴다 해도 본부가 싹 날아갈 거다. 그럼 다른 놈들만 좋은 일시키는 거지. 물론 네놈 길드를 포함해서.”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그런 섭섭한 말을… 아니, 그럼 이렇게 피해를 입고 두 손 번쩍 들고 마중이라도 나가겠단 소리냐.”
“나도 생각 중이야. 그런데 길드 분쟁에 끼면 한산도와의 마찰을 피할 수가 없을 텐데. 무슨 생각으로 여길 나타난 거지?”
그들이 대책을 세우고 있을 때 고개를 쳐들고 있던 최무혁의 신형이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렇게 마주하게 된 한설아와 최무혁.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그러게.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요청을 받았거든. 국내엔 언제 들어온 거야? 저번 한라산과의 마찰 이후 떠난 것 아니었나.”
“호오. 그걸 알고 있었어?”
“그렇게 대놓고 돌아다니는데 모를 리가 있나.”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 아니고?”
“그 재미없는 농담은 여전하군. 그보다 이제 장난은 이쯤 하지. 너무 과했어. 이 정도면 전쟁을 하자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야.”
최무혁의 말에 한설아가 아래에 시선을 두며 대답했다.
“저것들이 그럴 만한 배짱이나 있을까.”
“물론, 머리가 제대로 박혔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겠지, 감히 너를 상대로. 그런데 이건 알아야 돼. 너희 초인클럽은 길드 분쟁에 끼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국내의 모든 법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어. 한데,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네 말이 맞아. 지금도 여전히 클럽의 약속은 유효해.”
“그런데 왜?”
“난 길드 분쟁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야. 개인적인 용무지.”
“개인적인 용무?”
“난 그저 동생의 얼굴이나 볼까 하고 온 거거든.”
“동생? 너에게 동생이 있었나.”
“삼으면 동생이지. 별거 있어?”
“이봐, 한설아. 지금 그런 장난 같은 말로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장난이라니. 너무 오랜만에 봐서 내 성격 까먹었나 보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내 동생을 보러 왔을 뿐이야.”
웃고 있던 한설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 모습에 한숨을 쉬던 최무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어차피 클럽의 공식적인 일이 아니라 하니, 믿어 주지. 근데 동생을 보러 왔으면 동생만 보고 가면 되지.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인거지?”
“곤란해 보이는 것 같아서. 그게 다야.”
“겨우 그런 이유로? 역시, 넌 하나도 바뀌지 않았군. 천방지축 무대포에 그 반쯤 맛이 간 사고방식까지.”
“칭찬으로 들을게.”
“네가 뭘 하든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알아 둬야 될 거야. 내가 이곳에 중재위원으로 온 이상. 오늘 일은 가감 없이 상부에 보고가 들어가게 될 거다. 아마 너희 리더 서진도 이번엔 빠져나가지 못할 텐데. 그에 따른 대책은 있나.”
“있지, 아주 확실한.”
“그게 뭐지?”
“너.”
“뭐?”
“너도 대충 알 거 아냐, 이 일이 어떻게 해서 벌어진 일인지. 세상 사람 누구한테 물어도 저 머저리들이 억지를 쓰고 있는 건데. 제닉스는 이번 사태로 추산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피해를 입었어. 저 멍청한 놈들 때문에.”
“그래서?”
“네가 똑바로 보고를 하면 모두가 평화로워진다는 거지. 설마 넌 놈들이 저지른 짓이 올바르다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니지만 이건 늘상 있어 왔던 이 바닥의 암묵적인…….”
“그래서 너희 한산도가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거야. 나라의 기둥이라는 것들이 옳고 그름을 떠나 구시대에서나 통할 법한 악법에 좋다고 동조를 하고 있으니까.”
예상치 못한 진지한 얘기에 최무혁이 의외라는 듯 말을 내뱉었다.
“너… 대충 사는 건 아니었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때려 부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일자무식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야 기본이지. 어쨌든 말 좀 잘해서 좋은 쪽으로 무마 좀 시켜 줘. 그래도 한때 우리 동료였잖아. 초인 십일방. 기억 안 나? 뭐 지금은 다 흩어졌지만. 그리고 내가 너 목숨도 한번 구해 줬었던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최무혁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대체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이냐. 뭐 좋아. 이 일은 그럼 내 선에서 마무리시켜 보지. 대신, 이 이상은 안 돼. 사태가 더 커지면 나도 손쓸 수 없어.”
“커질 리 없을 거야. 저것들 이미 쫄았거든.”
말을 끝으로 둥둥 떠 있던 건물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보이는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
영문을 모른 채 허공을 허우적거리던 그들이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이.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로 세밀한 컨트롤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최철호 이하 무적과 금사자 길드의 헌터들은 다시 한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어. 건물 수십 채가 저리도 쉽게…….”
“그 와중에 사람은 하나도 안 죽었어. 미친 제어술이야.”
혀를 내두르고 있는 그들 앞으로 최무혁과 한설아가 내려섰다.
“우리 예전에 얼굴 한번 봤었지?”
한설아의 말에 최철호와 조영민이 한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피차 통성명은 필요 없겠고. 그럼 못 다한 회담을 시작해 볼까.”
한설아의 요구 조건은 이랬다.
더 이상 제닉스의 사업에 손을 대지 말 것.
히든인 유태정에게 눈독을 드리지 말 것.
빼앗아 갔던 것들을 모두 원상 복구 할 것.
제닉스 입장에선 당연한 요구였지만, 금사자와 무적의 입장에선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히든인 유태정을 빼앗기 위해 그들이 이번 일에 들인 자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적게는 두 배, 많게는 세 배까지 웃돈을 얹어 뺏은 사업이 대부분.
이걸 다시 돌려주게 되면 그들로서는 엄청난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국내 분쟁에 클럽이 낀다는 것도…….”
최철호가 영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내뱉자, 한설아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분쟁에 끼겠다는 게 아니야. 이렇게 해 줬으면 좋겠단 바람을 전한 거지. 그러니 당연하게도 여기엔 강제성이 없어. 일개 개인의 바람일 뿐이니까. 다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거야. 네가 길가다 번개를 맞아 뒈지든, 갑자기 닥친 재난에 본부가 개박살이 나든, 하고 있는 사업이 줄줄이 쳐 망하든. 왠지 그런 일이 벌어질 거 같아서 말이야. 내가 그런 쪽으로 촉이 좀 좋거든.”
그냥 대놓고 조지겠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딱히 문제를 걸고넘어질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협박이라는 증거를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촉일 뿐이니까.
결국 머리를 굴리던 그가 최무혁을 찾았다.
“위원장님, 이건 명백한 협박입니다.”
“글쎄요.”
“절 죽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본부를 박살 내고 사업을 조지겠다는데. 이게 협박이 아니면 뭐겠습니까.”
억울하다는 듯 말을 뱉은 그의 말에 한설아가 난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왠지 그런 일이 생길 것 같다는 거지. 내가 한다는 말은 안 했는데? 그럴 생각도 당연히 없고.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게 그 말 아닌가.”
“그럼 따져 보든가.”
휘파람까지 불며 약을 올리는 그녀를 보며 최철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지금 그의 눈빛이 그러할 것이다.
그만큼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그였지만 그 감정이 행동으론 나오지 못했다.
“좋다. 그럼 원래 제닉스가 요구했던 모든 조건을 수용하지. 단, 네가 박살 낸 것들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질 거지?”
“그건 달아 놔.”
“뭐?”
“내 이름 적고 장부에 달아 놔. 돈이 생기면 조금씩 줄 테니까.”
“이게 진짜… 위원장님,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지금? 이 정도면 제닉스에서 작정을 하고 고용을 한 겁니다.”
“고용이라니. 난 그저 개인 자격으로 여기 왔을 뿐이야. 꼴리면 한판 붙던가. 물론, 난 싸울 마음이 전혀 없지만.”
그야말로 막가파가 따로 없었다.
소문을 들어 무식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대책이 없는 인간일 줄은 상상도 못 한 그들이었다.
그런 최철호 등을 향해 그녀가 손을 휘휘 저었다.
“딱히 할 말도 없는 거 같은데 그만 길 좀 트지.”
한설아는 그렇게 말하며 바리케이드처럼 둘러친 헌터들을 중력으로 밀어냈다.
홍해와 같이 좌우로 갈라지는 헌터들.
그런 그들을 뒤로 하고 한설아가 태정을 향해 손짓했다.
“동생, 얼른 와.”
그를 필두로 제닉스 간부들이 대기하고 있던 자신의 차량에 줄줄이 올라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조영민이 최무혁을 찾았다.
“위원장님, 이거 설마 그냥 넘어가시진 않겠죠? 이건 클럽이 룰을 어긴 겁니다. 반드시 한산도 차원에서 제제, 아니 엄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으음.”
“위원장님!”
“길드장께선 방금 여제가 한 말을 잊었습니까.”
“뭘 말입니까.”
“꼴리면 한판 붙자는 말, 말입니다.”
“그게 왜요?”
“그냥 한판 하세요.”
“뭐라고요?”
“개인 자격으로 왔다고 하는데, 뭘 더 어쩌란 겁니까. 확실하지도 않은데 괜히 클럽까지 끌어들여 일을 확대시킬 순 없습니다. 게다가 본인이 배상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냥 적당한 선에서 원만히 해결을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군요.”
말을 끝으로 최무혁 역시 본인의 차를 타고 사라졌다.
“이런 병신 같은 새끼가!”
최철호가 이를 갈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당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들이 거대 길드로서 제닉스에게 한 짓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어찌 되었건 클럽은 금사자나 무적보단 한 수 위의 단체.
한산도 역시 꺼려지니 알아서 해결을 보란 뜻이었다.
약한 이유로 부조리를 당하던 제닉스와 똑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되긴 망한 거지. 길바닥에 돈만 왕창 뿌렸군.”
“근데 최무혁 저놈 설마 쫄은 건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그냥 넘기겠다니.”
“그만큼 클럽이 부담스러운 거겠지. 젠장. 이거 어디 약자는 서러워서 살겠나.”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만둬? 자넨 좋겠군. 잃은 게 없어서.”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도 똑같이 자금을 댔는데.”
“그래도 본부는 멀쩡하잖나. 우린 개박살이 났는데.”
“뭐 그거야… 천재지변이었으니까.”
“갚아 준다.”
“뭐?”
“내 오늘 일은 반드시 갚아 줄 거야. 두 배, 아니 세 배 그 이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