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박세아와 김형식을 다른 차에 태운 한설아는 운전대를 잡으며 태정과 함께 단둘이 올라탔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겸사겸사. 전해 줄 말도 있고. 지역대장이 되었다 들었어. 늦었지만 축하해. 영지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면서? 놀라운 일이야, 그렇게 단기간에 그런 활약을 할 수 있다는 건. 더군다나 넌 길드에 들어간 지 이제 석 달 차잖아?”
“누님이 그때 도와주신 덕분이죠.”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번 일로 서진이 너에게 관심을 같기 시작했어.”
“리더께서요?”
“응. 아마 월드워 국가전이 마지막 평가가 될 것 같아.”
“그럼…….”
“네 공적에 따라 가입 승인이 날 거란 얘기지. 물론, 네 의지가 중요하겠지만.”
뜻밖의 말에 태정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클럽의 가입.
단순하게만 봐도 이곳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한 개인으로는 엄청난 일이었다.
조금 전 그 대단하다던 금사자와 무적이 찍소리도 하지 못한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규격 외의 단체.
불가침의 영역.
사내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을 해 볼 법한 곳이었다.
물론 그 기회가 모두에게 주어지진 않는다.
극히 한정된 자원에, 그 자원 중에서도 또 초엘리트들에게만 그 특권이 부여된다.
태정이 놀란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최소 몇 년은 굴러야 올 줄 알았던 기회가 너무 금방 찾아와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어? 들어오겠다는 생각.”
“네. 헌터들의 로망이잖아요.”
“로망이라. 들어와 보면 전혀 아니란 것을 알 텐데. 참. 혹시 미궁은 다녀왔어?”
“아. 네.”
“그럼 규칙도 알고 있겠네.”
“일단은 메모라이징 해 놨어요.”
“오, 거기까지? 잘했어. 나중에 네가 더 성장을 하게 되면 알겠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많은 정보를 얻게 될 거야. 히든만이 가진 특권. 아니, 짊어질 짐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게 좋을 거야. 월드워라 해 봐야 이제 고작 반년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네. 그런데…….”
“응, 말해.”
“저놈들이 순순히 물러날까요?”
“누구? 아. 그 바보들? 그럴 수밖에 없을걸? 지킬 게 많을수록 겁이 많은 법이거든.”
한설아의 말은 정확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진 악명이 보증을 하는 것이었다.
극히 소수의 주변인들에게나 정상인으로 보일 뿐, 다른 이들에게 한설아는 악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하루아침에 3천에 이르는 사람을 죽여 버린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가 될 정도니까.
국내에서 그 정도 대학살을 자행한 헌터는 단언컨대 그녀가 유일했다.
물론 해외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국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었다.
그녀가 속한 단체는 한산도의 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등한 위치에 협의를 보는 관계라고나 할까.
이 말은 곧 그녀가 한다면 한다는 것이었다.
“운전은 할 줄 알지? 저 앞에서 세워 줄게.”
“그냥 가시게요?”
“서진이 가 보래서 잠깐 들어온 거야. 지금 클럽은 전쟁으로 난리도 아니거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한적한 도로에 차를 세우고 하차했다.
그런 그녀를 뒤따라 내린 태정이 물었다.
“뭐 타고 가시려구요?”
“나? 이거.”
어느 새 포털 하나가 한설아의 앞으로 소환됐다.
그리곤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
포털 또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하여간. 귀신 같은 사람이라니까.”
* * *
금사자 간부 회의실.
오전에 있었던 일로 인해 초상집 분위기가 된 금사자는 결국 한설아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기로 최종 결론을 지었다.
“제길. 분해. 분해서 미칠 것 같아.”
아직까지도 회의실에 홀로 남아 있는 금사자의 최철호는 화가나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설마 여제가 이런 식으로 개입을 할 줄은 전혀 예상을 못 했기 때문이다.
“미친년이 분명해. 아니, 한산도 이 새끼들도 문제야. 명색이 일국을 책임진다는 놈들이 저런 깡패 같은 놈들 하나 통제를 못 해서 이 사단을 만들다니.”
최철호는 한산도를 믿고 있었다.
초인클럽과 그들이 맺은 밀약.
터치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클럽 역시 국내 일에 관여를 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 있었던 일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처사였다.
한산도에서 나온 국내 톱 랭커라는 놈은 찍소리도 못 하고 그녀를 보내 줬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자신들이 아닌 한설아의 손을 들어 줬다는 것.
“나라가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어. 더러워서 여길 뜨던가 해야지, 원.”
분에 못 이겨 연신 씩씩대고 있는데, 누군가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보안대 소속의 보안과장 심현섭이었다.
“왜? 또 무슨 일이야?”
“중앙 C구역 1급 창고 1차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 누가 처먹은 거야?”
“그게… 일단 경비를 서고 있던 헌터들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되었습니다. 알리바이 동선도 확실하고, 인벤토리도 깨끗했습니다.”
“그럼? 뭐 귀신이라도 와서 털어 갔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짜증이 치미는데 보고를 들으니 더 짜증이 이는 최철호였다.
그런 그의 눈치를 보던 심현섭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경비들 말로는 오늘 새벽 공대2부 부대장이 잠깐 들어왔다 나갔다고 합니다.”
“최다솜이?”
“예. 보안 시스템 점검 차 나왔다고 했다더군요.”
“최다솜이 보안 시스템을? 그녀에겐 권한이 없는데,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저도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하나같이 다 그리 말을 하고 있어서.”
“최다솜이 있었다… 최다솜이. 그래서? 최다솜은 지금 어디 있지?”
“공대에서 업무 중입니다.”
“이런 멍청한.”
“예?”
“심문 결과가 그러면 당장 데려다가 조사를 해야 할 거 아냐?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게 지금 1, 2억짜리 사건인 줄 알아? 자그마치 1조 8천억이야, 1조 8천억.”
“하지만 2부 대장은 길드장님의 반려…….”
“반려 좋아하고 있네. 당장 잡아들여, 당장!”
“아. 예!”
* * *
금사자와의 회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닉스는 빼앗겼던 사업들을 하나둘 돌려받기 시작했다.
한설아의 협박이 제대로 먹힌 것이었다.
덕분에 길드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는데, 태정만큼은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어떻게 됐을까. 괜히 나 때문에 잘못되는 거 아냐?’
최다솜은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인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아무리 한설아라고 해도 이것만큼은 어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 최다솜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여자였다.
더군다나 그녀는 생판 모르는 남도 아니고 친구이지 않은가.
결국 그는 전화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어, 석호냐. 혹시 다솜이 연락 없었냐.”
-아니. 왜?
“아. 별건 아니고. 전화번호 줘 봐.”
-오. 드디어 연락을 하시려고? 잘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문자로 좀 찍어 줘.”
-오케이.
잠시 후.
문자로 그녀의 전화번호가 전송됐다.
바로 전화를 걸어보는데.
-여보세요?
“최다솜?”
-앗. 태정이니?
“어, 난데… 혹시 무슨 일 없나 해서.”
-일? 그런 거 없는데?
“나 땜에 곤란해지고 그런 거 아냐?”
-곤란은. 내가 말했잖아.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있다고.
“내가 직접 보지 못했으니까.”
-넌 정말 예전이랑 똑같구나.
“뭐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서 걱정하고 그랬잖아. 지금 우리 쪽은 창고 같은 거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알잖아,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금액대가 만만치 않을 텐데.”
-나 정말 괜찮아. 진짜루. 네가 걱정해 주는 건 너무 고마운데. 나 지금 1년 전부터 잡아 놓은 해외 출장 건으로 좀 많이 바빠.
“해외 출장?”
-응. 전부터 큰 사업 하나를 추진 중이었거든. 그래도 가기 전에 연락 줘서 고마워. 그렇지 않아도 걱정 말라고 전화 하려고 했었는데. 너무 바빴어.
“그렇구나. 난 네가 나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다행이다, 어찌 됐건 잘 넘어가서. 그럼 한동안 연락은 힘들겠네?”
-아마도? 길드의 장거리 통신만 가능할 테니까.
“언제쯤 돌아오는 거야?”
-글쎄. 유럽 진출의 첫 단추를 꿰매는 일이라 한 1, 2년은 꼬박 살아야 될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들어오면 꼭 연락해.”
-왜?
“그렇게 큰 도움을 받았는데, 이렇게 입 싹 닫으면 사람도 아니지. 일단 들어오면 연락해.”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뭐 집이라도 사 줄 기세다 너?
“집 같은 게 문제겠냐.”
-어? 태정아, 나 준비 때문에 이만 끊어야 될 것 같아. 다녀와서 보고 들은 거 이야기 많이 해 줄게.
“어어. 그래. 준비 잘하고, 조심히 다녀오고. 고맙다, 정말로. 이 은혜는 내가 꼭 갚을게.”
-응.
뚝.
전화를 끊은 태정은 그제야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딱히 큰일은 생기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제닉스 길드와의 일만으로도 상당히 벅차 보이는 상황.
더군다나 그도 정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금사자 길드 내에서 최다솜이 가지는 위치를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었다.
본인만 해도 길드 서열 30위권에 또 아주 높은 위치에 있는 인사와 매우 관계가 두텁다는 것까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약혼을 한다는 소리까지도 있었다.
“일단 잘 넘어간 거 같아 보이긴 한데…….”
* * *
금사자 최다솜의 숙소.
태정과의 통화를 마친 그녀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됐겠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대체 뭐가 된 것일까.
방을 나서자 거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의 사내.
그 모습에 살짝 놀란 듯한 그녀가 바로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어?”
“조금 전에 도착했습니다.”
“들었어?”
“……”
“들었구나.”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줘.”
“오면서 들은 얘기인데, 보안과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나도 알아.”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추궁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지금 부대장님 신변이…….”
그녀가 사내의 말을 끊었다.
“우리 얼마나 됐지. 6년. 그 즈음 됐지?”
“그렇습니다. 그날 부대장님께서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던전에 갇혀 있던 저를 구하러 오셨죠. 초면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날 보살펴 준 아저씨의 혈육이었으니까. 차마 두고 나갈 수가 없었어.”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살았잖아. 그럼 된 거야. 아저씨가 돌아가시던 날, 네가 내게 와서 했던 말 기억해? 무슨 일이 있어도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날 지켜 주겠다고.”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의 유언이기도 했는걸요.”
“그럼, 그 유언 꼭 지켜.”
“하지만 부대장님.”
“이건 명령이 아닌 부탁이야. 네 눈엔 내가 바보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도 지키고 싶은 게 있어. 내가 그걸 지키지 못하면… 난 살아도 사는 게 아니게 될 거야. 끝까지 비밀로 해 줄 수 있지? 그게 날 지키는 거야.”
“…….”
사내는 그 물음에 쉽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고초를 겪게 될지 뻔히 보이는데, 입을 싹 닫고 있으라니.
더군다나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들어 버린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한다면 한다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그랬기에 6년 전 그날.
생존율이 10%도 채 되지 않던 그곳에 홀로 들어와 자신을 구했던 것이다.
모든 이들의 반대를 뚫고.
“그분이 부대장님께 그렇게도 중요한 사람입니까.”
“중요한 사람? 그는 내 전부였어. 그리고 한때는 그도… 그러니. 도와줘. 부탁할게.”
그녀의 간절한 눈빛에 그가 결국 시선을 피하며 마지못해 말을 내뱉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