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똑똑.
“보스, 일어났어요? 오늘 팀 오전 회의 때문에 먼저 나가 봐야 해서요.”
문밖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찡그린 눈을 겨우 뜬 태정은 배게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어. 가 봐. 난 좀 있다 갈게.”
“그럼. 이따 식사하시고 천천히 나오세요.”
“그래.”
최근 사할린에서 구조 작업을 포함, 금사자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느라 며칠째 밤을 새운 그는 좀처럼 이불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그래도 자빠져 있으면 안 되겠지?”
계속해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뜬 태정은 고개를 흔들며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때.
평소엔 느껴 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 그의 전신을 타고 느껴졌다.
‘뭐지?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 거지?’
아무리 피곤하다 해도 물리적으로 몸이 무거울 순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상함에 고개를 돌려보는데.
웬 처음 보는 여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동시에 그의 몸이 번개에 감전된 듯 펄쩍 뛰어올랐다.
“아, x발! 깜짝이야!”
잠이 확 달아난 태정은 침대에서 내려와 벽에 붙으며 소리쳤다.
그런 그의 반응에도 여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 여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뭐야!?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나? 너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는데?”
“뭐라고?”
여자의 말에 태정은 어젯밤 기억을 떠올려 봤다.
분명 일을 하고 들어와서 씻고 바로 잠이 들었었다.
술이라도 마셨다면 조금 이해라도 해 보겠지만, 어제는 너무 피곤해 밥도 먹지 않고 그대로 뻗지 않았던가.
한데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더군다나 이걸 박세아가 캐치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난 어제 분명 혼자…….”
“어제 들어왔다고 안했는데?”
“뭐?”
“한… 보름 즈음 됐나? 뭐 아무튼 그 정도 됐겠네.”
“혹시 미친 건 아니지?”
“하. 이것 보게. 귀엽다고 받아 주니까 끝도 없이 나가네.”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는 듯 여자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보이는 눈부신 나신.
하지만 태정은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못했다.
그만큼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어둠의 천사 프리엘라. 또 다른 말로는 역천의 프리지아라고도 하지.”
여자의 소개에 태정의 손가락이 자동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엇! 잠깐. 그럼 넌 그 연구소에서…….”
“이제 알겠어?”
“알긴 뭐… 그런데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니, 왜 날 따라온 거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봉인이 풀리고 난 뒤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거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기생을 좀 했지. 뭐 정확히 말하자면 힘을 회복할 때까지 잠깐 머무를 곳이 필요했다고나 할까.”
별일 아니라는 듯 태연히 말을 뱉는 그녀를 보며 태정은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더군다나 기생이라니?
그런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내 몸을 마음대로 네가 들어왔다 뭐 그런 뜻인가.”
“잘 아네.”
“그럼 그동안 뭘 한 거지? 내 몸속에서?”
“그냥 뭐 이것저것. 오랜만에 세상 구경도 하고… 아침마다 발딱발딱 서는 네 흉물도 좀 보고. 인간인 주제에 생각보단 아주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있어. 근데 쓰질 않더라고. 보통 인간 수컷이면 하루에 한 번은 쓸 텐데 말이야.”
“아…….”
“뭐야, 그 반응은? 이건 칭찬인데.”
“다… 했으면 이만 가라.”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난 아직 네가 필요하거든.”
“거부한다.”
“너 따위가 거부해 봐야 말뿐이지. 그건 그렇고 아주 오랜만에 밥을 좀 먹어야겠는데… 네가 먹는 걸 보고 있으니 어찌나 침이 돌던지.”
프리지아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정은 그제야 눈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뭐라도 걸치든가.”
작은 헤프닝이 지나가고 식탁에서 마주한 그들은 늦은 아침을 함께했다.
“햐. 이게 얼마 만인가 대체. 역시 인간 음식은 알아 줘야 한다니까.”
몇 끼는 굶은 것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퍼먹고 있는 그녀를 보자, 태정은 돌던 입맛이 팍 떨어졌다.
불청객.
그것도 상당히 머리를 아프게 하는 불청객이었다.
‘내가 보고 듣는 걸 다 느낀다는 거잖아. 이건 뭐 cctv도 아니고.’
누군가 자신의 사생활을 일거수일투족 지켜본다는 건 썩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몸에 들어와서 그런다고 생각을 하니, 더욱더 머리가 복잡해지는 태정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음식을 집어먹던 프리지아가 그 앞에 놓인 밥그릇을 말도 없이 낚아채 갔다.
“음식 두고 그런 표정 지으면 복 나간다, 꼬마야.”
“됐고.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당분간은 네 몸속에서 휴식을 취해야지. 이따금 나와서 이렇게 밥도 좀 먹고. 바람도 좀 쐬고.”
“그러니까 언제까지.”
“나도 몰라. 사실 그 안에 처박혀 있던 게 너무 오래 돼서 언제 힘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거든.”
“힘을 찾으면? 그다음은?”
“놀아야지. 시리우스가 너에게 금역의 힘을 줬다는 게 뭐겠어? 이곳을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인 거야. 도움도 받았고 하니, 나도 그 유치한 놀음에 장단을 좀 맞춰 줘야지.”
“대체 시리우스는 뭐 하는 놈이지? 혹시 세상에 변화가 오게 된 게 시리우스 때문인가.”
“그건 말 못 해. 그때도 말했지만 내가 그걸 발설하면 너도, 나도 오래 살지 못하거든.”
“제라드랑 똑같은 말을 하는군.”
“쯧쯧. 그런 덜떨어진 고철이랑 비교하다니. 난 훨씬 고차원의 존재. 시리우스가 부활시킨 과거 인간의 잔재 따위와는 클라스가 다르지. 그런 무식한 발언은 좀 삼가해 주길 바라.”
“어련하시겠냐.”
“아함. 잘 먹었다. 네 시녀는 일을 하러 갈게 아니라 요리 쪽으로 나가면 전망이 밝겠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진 몰라도 정말 수준급이었어.”
“시녀가 아니라 비서다.”
“그게 그거지.”
“아니, 달라, 완전히. 비서란 건…….”
“아후. 몰라 피곤해. 난 이만 들어가야겠어. 오랜만에 나왔더니 졸립네. 맨날 같은 곳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새로운 곳 좀 가. 그놈의 사무실인지 뭔지 이제 이골이 날 지경이니까.”
“빌려 쓰는 주제에… 하.”
말을 뱉던 태정은 이내 입을 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그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익숙한 음성들이 뇌리에 들려왔다.
[야. 저리 안 꺼져? 소멸시켜 주랴?]
-죄, 죄송합니다.
[그래, 거기.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 고철은 그래야 어울리지.]
둘의 대화에 태정이 제라드를 불렀다.
“이봐, 제라드.”
-예, 주인님.
[조용해라. 잔다.]
-예, 옛. 프리지아님.
“넌 인공지능이 겁을 먹냐.”
[내가 이놈 스위치를 끌 수 있거든.]
“넌 자라 그냥.”
대화가 안 통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태정은 아픈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당분간 골치 아프겠는데.”
* * *
“이제 좀 움직여 볼까.”
일단의 일들이 정리가 되고 슬슬 다시 사냥을 시작해야 할 때였다.
사할린에서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를 때려잡은 그였지만 여전히 퀘스트는 오픈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번 원정으로 얻은 레벨 업은 고작 19.
퀘스트 오픈 조건인 550레벨이 되려면 아직도 20업이 넘게 남은 상황이었다.
“확실히 대규모 파티는 경험치가 안 돼. 그렇게 많이 잡았는데, 아직도 500초반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혼자 잡았다면 600도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몬스터의 레벨을 감안한다면 그 이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딱히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곳은 사냥을 하러 간 것이 아니니까.
“어디 보자. 그래도 제로 그라운드를 뛰어 봤으니, 블루는 졸업을 했다고 봐야 하나? 이봐, 제라드.”
-예, 주인님.
“네 생각은 어떠냐. 그래도 나름 괜찮게 싸웠던 것 같은데. 레드… 도전해 볼까?”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총기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겁니다.
“총기류라면 슈퍼 발칸포나 mk4 같은 걸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뭐야, 그럼? 천룡이랑 천무, 이런 것밖에 안 되잖아?”
총기류를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사냥에 있어 큰 제약이었다.
미사일이나 로켓포는 절대 주력 무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마나의 소비였다.
한 발에 수천, 많게는 만 단위까지 들어가는 마나.
거기에 횟수 제한과 쿨타임까지 감안을 한다면 웨이브 던전이 아닌 이상 효율이 극도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슈퍼 발칸포가 안 통하면 이레이저 건은 되려나?”
-저출력으론 비슷할 겁니다.
“그럼 결국 이것도 무용지물이란 말이네. 출력을 높이면 높일수록 딜이 걸리니까. 그냥 단계를 좀 낮출까? 주력으로 미사일을 쓰기엔 효율이…….”
-미사일이 아닌 주력으로 쓸 수 있는 무기가 하나 더 있지 않습니까.
“더 있어? 뭐가? 나올 만한 건 다 나온 것 같은데.”
-광선검 말입니다.
“아. 광선검도 있었구나. 그렇지. 광선검이 있었어.”
플라즈마 광선검.
이번 원정에서 얻은 신개념 근접 무기였다.
“확실히 광선검이면 일대일에선 꿀릴 게 없지. 문제는 내 몸이 따라 주느냐야.”
광선검의 위력은 이미 검증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에노타우르스를 단칼에 벨 정도였으니, 아무리 레드 홀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사냥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컨트롤이었다.
검사가 아닌 자신이 과연 이것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을까?
잠시간 고민을 하던 태정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그래. 언제는 계획이 완벽했냐. 일단 가 보자. 가 보고 판단하자.”
그날 오후.
태정은 박세아를 통해 레드 홀에 대한 정보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그가 도전하고자 하는 곳은 레드의 초입이라 일컬어지는 요정의 숲.
적정 레벨 730대의 비교적 쉬운(?) 1등급의 던전이었다.
“하루 만에 찍고 나왔으면 좋겠는데.”
* * *
다음 날 아침.
“다녀올게. 차는 대기시킬 필요 없어. 그쪽은 길이 험해서 오래 걸리는 거 같더라.”
준비를 하고 나온 태정은 블라스터를 전개해 곧장 태백으로 향했다.
요정의 숲이 위치한 레드 홀은 제닉스가 소유하고 있는 던전 중 가장 험난한 곳에 위치한 게이트였다.
도로가 멀쩡할 땐 2시간 만에 주파가 가능한 거리지만, 현재에 와선 다섯 시간도 넘게 걸리는 곳.
그마저도 임시로 땅을 부숴 만든 비포장도로였다.
“마나만 조금 쓰면 되는데 같이 고생을 할 필욘 없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자유롭게 비행을 하고 있는 태정은 이동을 하면서도 계속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검으로는 제대로 된 사냥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쓸 게 더 많았다.
더군다나 레드는 이번이 처음.
단계로 치면 블루 14에서 3단계나 월장을 한 것이니, 더더욱 조심스럽게 접근을 해야 한다.
“근데 제라드.”
-예, 주인님.
“그놈 어째 오늘은 조용한 것 같은데. 뭐 하고 있냐.”
-스스로 의식을 봉인하셨습니다.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어제는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영원히 봉인은 못 시키냐.”
-죄송합니다.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그래. 뭐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지. 어. 저기 보인다. 슬슬 내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