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시뻘겋게 불타오르고 있는 포털.
보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이는 레드 게이트였다.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상급 레벨로의 입문.
이곳 또한 블루와 마찬가지로 등급이 존재하지만 일단 1등급만 되어도 최소한 레벨이 700은 된다는 소리기 때문에 낮은 등급이라 해서 결코 무시를 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더군다나 솔플을 기준으로 하면 그 레벨의 기준은 훨씬 더 올라간다.
모든 던전은 파티를 기준으로 측정 되기 때문이다.
기대 반 설렘 반으로 게이트를 바라보고 있던 태정은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벌써 여길 오게 되다니.”
헌터가 된 지 이제 불과 석 달이었다.
한데, 벌써 레드라니.
누구도 믿지 못할 엄청난 성장 속도였다.
히든 중에서도 상급이라 일컫는 특수 계열의 헌터들도 1년은 잡아야 하는 레벨.
일반은 최소 3년이었다.
물론. 이건 레벨에 한정된 것이고, 던전의 등급으로 따진다면 10년을 사냥만 파도 될까 말까 한 일.
그러니 당사자인 태정 또한 지금의 상황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클래스가 깡패긴 깡패구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태정은 심호흡과 함께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주변이 일그러지며 어둠이 깔리더니 이내 빛이 스며들며 또 다른 세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쏴아아아!
던전의 배경은 어느 숲의 계곡이었다.
수십 미터에 이르는 폭포와 그 폭포를 아우르고 있는 기암절벽.
사방에는 이름 모를 거대한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일단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주변을 살피며 중얼거리던 그는 곧장 태극 1호와 함께 플라즈마 광선검을 소환했다.
그리곤 이내 부스터를 가동시키며 천천히 이동을 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내부는 여타의 숲과는 다른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도, 수십 미터에 이르는 나무들도.
어딘지 모르게 그 선명도가 쨍하게 느껴졌다.
뭔가 성스러운 분위기라고나 할까.
‘요정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제법 그럴듯하네.’
경계를 하며 나아가기도 잠시.
곧 그의 눈에 무언가가 잡히기 시작했다.
“저건…….”
태정이 본 것은 어떤 한 여인네의 등짝이었다.
긴 금발을 한쪽으로 늘어뜨린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인.
그 자태가 너무나도 고와 가히 백태천광이 따로 없었다.
‘진짜 뒷모습만 보면 깜빡 속겠다. 저게 어딜 봐서 몬스터야. 사람이지.’
태정은 다가가 말을 거는 대신 손에 잡힌 광선검을 활성화시켰다.
박세아에게 넘겨받은 자료에 의하면, 요정들은 인간을 홀려 공격을 한다고 했다.
남자에겐 여자의 모습으로 여자에겐 남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해서 비명횡사를 한 헌터들이 수백 트럭이다.
지금의 저 모습을 보니, 그럴 만도 해 보였다.
하나, 태정이 누구인가?
미인계 따위는 통하지 않는 바른 청년의 사나이다.
‘단 번에 벤다.’
검의 손잡이를 좀 더 강하게 움켜쥔 태정은 곧장 튀어나가려 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발은 좀처럼 땅에서 떨어지질 못했다.
마법이나 함정 따위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지.
인간의 모습을 한 요정의 이미지가 문제였다.
지금까지 그는 인간과 같이 생긴 몬스터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죽여도 될 놈이라 인식을 했던 괴수들과 달리,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을 토막 내려니 거부감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귀가 뾰족히 튀어나온 것이 달랐지만, 그 외적인 건 닮아도 너무 닮아 있었다.
‘저건 몬스터야. 인간이 아니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려는 그때.
여인의 음성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인간이신가요?”
“그, 그런데? 아…….”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은 태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공략집에 의하면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속으로 자책을 하고 있는데, 다시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죄송한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용사님? 전 지금 다리를 다쳐서 일어날 수가 없답니다. 보시다시피 옷도 입고 있지 않아 몹시 추워요. 와서 온기를 나눠 주세요, 용사님.”
여인의 말에 태정은 순간 육성으로 웃음이 터질 뻔했다.
뻔해도 너무 뻔한 멘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인간이라면 저런 멍청한 소리를 할 리 없으니까.
“아아. 너무 아파라. 움직이지 못하겠네. 도와주세요, 인간 용사님.”
“이건 뭐 거의 전설의 고향급이구만.”
“네?”
“내가 인간 껍데기는 처음이라. 특전을 주마. 돌아서라. 뒤에서 베고 싶진 않으니까.”
“설마 저를 죽이시겠단 말씀이셔요? 아아. 어떻게 그런 잔인한 말씀을.”
“3초 준다.”
태정의 단호한 대답에 여자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서슬 퍼런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제가 바라던 용사님이 아니셨군요. 그럼…….”
다리를 다쳤단 여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태정 역시 대비 태세를 갖췄고 마음의 결단을 내린 순간 여자가 ‘휙’ 하며 돌아섰다.
“죽어!”
“헉!”
대시해 들어오는 여자의 속도는 지금껏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엄청난 스피드였다.
하지만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여자의 외모.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기괴하게 생긴 두 눈과 귀까지 찢어진 커다란 입.
그 안으론 가시 같은 촉수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턱이 쇄골까지 내려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완전 빻았구만.”
등골이 오싹해진 태정은 부스터를 활용해 거리를 벌리며 각을 쟀다.
상당히 높은 출력을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곧잘 쫓아오는 여자, 아니 괴물.
확실히 레드는 레드였다.
그렇게 십여 미터 근방까지 쫓아 들어온 괴물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입을 더욱 크게 벌렸다.
그러자 내부에서 넘실거리던 십여 개의 촉수가 고무줄처럼 늘어나더니, 이내 고목만 해져 태정을 향해 쏘아졌다.
슈우우욱!
“진짜 괴물이구만.”
인간 여자의 체구에서 전봇대만 한 촉수가 튀어나온 것도 놀라운데, 그 개수가 무려 십여 개에 달한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태정은 일단 광선검을 허리춤에 파지한 채 mk4를 소환했다.
촉수의 속도와 변화무쌍한 경로가 잘못 들어가면 뼈도 못 추릴 것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견제나 한번 해 보자.”
조준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순간 총구에서 빛이 일더니, 초당 수십 발에 달하는 에너지 탄이 놈을 향해 쏘아지기 시작했다.
타타타탕! 타타탕! 타타탕!
짧은 시간 천여 발의 탄환이 촉수를 강타했다.
하지만 여전히 촉수의 속도는 줄지 않았고, 오히려 더 성이 난 듯 그를 향해 매섭게 덤벼들었다.
“역시 이걸론 무린가.”
예상을 하고 있어서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저 변화무쌍한 촉수를 뚫고 어떻게 놈을 벨 것인가.
그 생각만이 태정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저런 공격엔 부스터도 의미가 없어. 아무리 빨라 봐야 직선 주행밖에 안 되니까.’
단순한 움직임으론 먹잇감밖에 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부스터의 팁들을 활용해 경로를 변환시킬 수도 있지만, 검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둔할 수밖에 없는 입장.
‘하늘? 화학탄? 미사일?’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떠오른 하나의 스킬.
“맞아. 클로킹도 있었잖아.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냥엔 써 보지 못했던 유일한 스킬.
워낙 기술이 많은 데다 사용할 일이 없어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던 기술이었다.
이걸 사용한다면 놈에게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태정은 곧바로 시도를 해 보기로 했다.
[클로킹 활성화]
스킬을 활성화시킨 태정의 신형이 순식간에 유령처럼 사라졌다.
그러자 미친 듯이 쫓아오던 놈의 촉수가 순간 멈칫하더니, 다시 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닌가.
그리곤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괴물.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군.’
고작 10여 미터 간격 사이였다.
보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뜻.
그럼에도 그는 조심스레 놈을 향해 다가갔다.
그렇게 지근거리까지 숨을 죽이며 접근한 태정은 미리 잡고 있던 광선검의 손잡이를 허공으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
괴물이 입이 열렸다.
“이놈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지? 오랜만에 고기 맛을 좀 보려…….”
‘지금.’
즈와- 앙!
손잡이로부터 치솟은 플라즈마가 순식간에 괴물의 목을 갈랐다.
서걱-!
“뭐, 뭐…….”
털썩.
떨어진 머리가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놈의 신형이 나자빠졌다.
[숲의 요정 아르테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228만을 획득합니다.]
“후우! 별것도 아니었네. 괜히 긴장해서.”
사실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이라곤 생각을 하지 않은 태정이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벤 다음 다시 하단을 가르려 했는데, 마치 물을 베듯 쉽게 싹둑(?) 잘려 나가 버렸다.
검의 위력이 놈의 방어력을 훨씬 웃돈다는 뜻이었다.
즉 지금부턴 거리낄 것이 없다는 얘기였다.
게다가 클로킹까지 통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비에 대한 부담도 줄어든 상태.
이제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며 슈퍼 성장을 하는 일만이 남은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진짜 인간이랑 똑같이 생겼네, 얼굴만 빼면. 기분 참 이상해.”
대자로 뻗은 놈의 몸은 인간의 그것과 너무 닮아 있었다.
살인 현장으로 봐도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비주얼.
하지만 놈이 인간이 아니란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고, 이미 한번 베어 버린 그였기에 더 이상의 감흥이나 망설임 따윈 없었다.
이후 다시 이동을 시작한 태정은 무차별 학살에 돌입했다.
“머리!”
서걱-!
“몸통!”
서걱-!
“다리!”
서걱-!
보이는 족족 가로세로 할 것 없이 쫙쫙 찢어 버리며 검이 가져다주는 손맛을 아주 제대로 느끼고 있는 태정.
총을 쏠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었다.
[숲의 요정 아르테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228만을 획득합니다.]
[숲의 요정 그란데를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 315만을 획득합니다.]
[숲의 정기를 획득합니다.]
[레벨 업을 하셨습니다.]
“좋아. 빠르다 빨라. 또 어디냐.”
경험치가 좋은 만큼 레벨 업도 금방금방 되고 있었다.
마리당 무려 2-300만.
블루 보스급을 상회하는 엄청난 경험치였다.
그렇게 여기저기 온 군데를 휘저으며 요정들을 작살내기도 한참.
그는 어느덧 숲을 벗어나 기암괴석이 즐비한 돌산 앞에 이르렀다.
“여기가 돌로 된 요정이 나온다는 그곳인가 보군.”
요정의 숲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과 그 바깥 구역인 돌산 그리고 돌산의 중턱쯤에 자리한 마굴이 바로 그것이다.
그중 돌산은 두 번째로 난이도가 높은 구간으로 상당한 방어력의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는 이 던전의 메인 스테이지였다.
이곳부터는 레벨뿐만이 아니라 장비가 갖춰지지 않으면 사냥이 불가능한 곳.
게다가 지형 또한 매우 가팔라서 운신에도 제약이 심했다.
하지만 그런 건 일반 헌터들에게나 적용되는 룰이고.
태정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블라스터라는 반 사기에 가까운 비행 스킬이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야 껌이지.”
중얼거리던 그의 신형이 수직상승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