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프리지아의 꼬임에 넘어간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하나 얻었으면 된 것이었다.
그것도 한참은 가야 나올 기술을 미리 얻었으니,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문제는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자, 그럼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나. 아까 보니 광선검은 조금 통하는 것 같던데.”
벽에 박힌 가공된 금속판을 잘라 냈다.
그 말은 광선검 역시도 벽에 손상을 줄 수 있다는 뜻.
같은 플라즈마 계열인 이레이저 건의 출력을 100%로 올려 쏜다면 빠져나갈 구멍 정도는 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프리지아의 대답은 전과 같이 단호했다.
[어림없는 소리. 말했다시피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놈의 장기 안이야. 어찌저찌 이걸 뚫고 나간다 해도 놈의 살과 가죽은 절대 뚫을 수 없어. 시리우스는 음… 노망이 난 것 같지만, 그 정도로 허술하진 않아. 네가 작아진 만큼 네 기술의 파괴력도 떨어져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해.]
“그럼 아가미나 입, 뭐 이런 곳으로 나가야 하나?”
[아가미? 이놈에게 그런 게 있을 것 같아? 게다가 입으로 나간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해.]
“어째서?”
[놈이 입을 벌리면 그 순간 권능이 발동해, 반경 수백 미터 내의 모든 생명체는 이미 작아진 상태야. 벗어나려면 최소한 음속 이상의 속도가 필요한데. 지금 네 수준으론 용써 봐야 입구 컷이지.]
프리지아의 그 말에 태정이 물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넌 무슨 대단한 방법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당연하지. 이 몸이 왜 시리우스보다 위대한지 이런 데서 클래스 차이가 나는 거야.]
“그래? 그럼 어디 들어 볼까, 방법이 뭐야?”
[그건 바로.]
“바로?”
[x구멍으로 나가는 거다.]
“…….”
예상을 뒤엎는 답변에 태정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과연 자뻑을 하면서까지 나올 수 있는 해답인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대답이었다.
x구멍이라니?
그런 그의 기분과 상관없이, 프리지아의 설명은 계속됐다.
[놈의 배변 활동을 이용하면 밖까지 다이렉트로 빠져나갈 수 있어. 시리우스는 여기까진 생각을 못 한 거지. 그러니 이곳에다 숨겨 놓… 그런데 왜 말이 없지?]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x과 함께 배출이 되면 된다? 그 말인가.”
[바로 그거야.]
“이런 한심한.”
태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그녀가 발끈했다.
[뭐야? 그거 지금 나한테 한 말이야? 기껏 방법을 알려 줬더니.]
“야. 나도 그 정도는 생각해. 난 또 뭐 대단한 거라고. 뚫지도 못하고 아가미도 없고 입으로도 못 나가면 남은 게 어디겠냐. 콧구멍이랑 x구멍이지. 뭐 x구멍이 나온 걸 보면 콧구멍은 없는 모양이네.”
[그걸… 네가 생각할 수 있다고?]
“누굴 바보로 아나. 널 보니 그 우주 유일 천재인지 뭔지 하는 시리우스도 대충 어떨지 감이 온다. 무슨 비법도 아니고 x구멍? 에라이. 너 뭐 하는 놈이냐, 진짜.”
예상치 못한 태정의 반응에 그녀가 제라드를 찾았다.
[야, 고철.]
-예. 프리지아 님.
[이 인간 꼬마가 정말 그 정도의 지능이 있는 거냐.]
-그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 없는 건 나야. 그래도 난 네가 뭔가 좀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제대로 봤다.]
“됐고, 제라드.”
헛소리를 하는 프리지아를 뒤로하고 태정이 제라드를 불렀다.
-예. 주인님.
“이제 돌도 얻었으니까. 길이야 알려 줘도 상관없잖아. 여기로 내려가면 되냐?”
-그렇습니다.
“그럼 슬슬 나가 보자.”
블라스터에 출력을 넣은 태정의 신형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을 했을까.
굴이 좁아지며 그것(?)으로 보이는 이물질과 부산물들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x이냐, 이거?”
-맞습니다.
“뚫어야 할 것 같은데. 대체 며칠을 참았길래… 이놈 혹시 변비 아냐?”
길이 막혀 더 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별수 없이 그가 이레이저 건을 소환했다.
“최대출력으로 한 번에 간다. 장 청소 제대로 한번 해 보자.”
-알겠습니다.
위이이잉-!
공명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플라즈마가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범위는 좁지만 핵을 제외하곤 어쩌면 가장 강력할 수도 있는 무기.
특히 이런 막힌 곳을 뚫기엔 제격인 장비였다.
-최대출력입니다.
“좋아. 간다.”
제라드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가 잡고 있던 레버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플라즈마를 잡고 있던 장치가 해제되며, 직경 1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에너지 빔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졌다.
그것은 순식간에 앞에 쌓인 배설물을 날려 버렸고, 동시에 그가 블라스터를 활용해 빠르게 앞을 전진했다.
마치 지우개처럼 앞을 지워 나가던 빔은 약 10초가량이 지난 뒤 사라졌고, 그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앞을 막고 있는 x벽이었다.
“한 100미터는 들어온 것 같은데. 이거 어디까지 차 있는 거야?”
오버 출력으로 인해 이레이저 건이 사라지자 태정이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여기서 미사일은 의미가 없겠지? 이게 어디까지 차 있는지 모르니까. 게다가 폭발형이라…….”
-맞습니다. 이전의 벽 뚫기와는 조건이 완전히 다릅니다.
둘의 대화에 잠자코 있던 프리지아가 입을 열었다.
[의미 없이 힘 빼지 말고 그냥 기다려. 배변 활동이 시작되면 자연스레 나갈 수 있으니까.]
“그게 언제 시작되는데.”
[아까 위에 남아 있는 부산물과 여기 막혀 있는 배설물의 양을 봤을 때, 내 계산이 맞다면 곧 시작될 거야.]
-프리지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미리 네비게이터에 탑승해 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휘말리면 공간이 나오지 않을 확률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그럴 생각이었어. 아무리 슈트를 입고 있다지만 이게 지금… 썩 좋은 기분은 아니거든.”
말을 끝으로 그가 네비게이터를 소환했다.
아늑한 공간에 몸을 뉘인 태정은 장의 활동을 기다리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나가자마자 상승해서 해제하고 바로 날아올라야 돼.’
권능이 일면 다시 원점이 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데도 요동치는 기체.
아니, 그것은 장이 움직이는 것이었다.
좁아졌다 벌어졌다를 반복하며 여기저기로 처박히는 네비게이터.
조종간에 손을 가져간 태정이 물었다.
“시작됐나.”
-준비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바로 벗어나야 하는 거 알지? 이번에 또 잡히면 언제 나갈 수 있을지 장담 못 해.]
“걱정 마. 냅다 튈 거니까.”
대화를 하는 사이, 태정은 x 속에 파묻혀 조금씩 이동을 하고 있었다.
‘내가 x하고 배출되는 날이 올 줄이야.’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무리 헌터라도 이건 결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최초일지도.
그렇게 밀리고 밀려 나가던 태정은 어느 순간 속도가 굉장히 빨라졌다는 것을 감지했다.
바로 그때.
[지금이야.]
대답이 들림과 동시에 기체가 무거워지며 시야가 밝아졌다.
그리고 보이는 x의 잔해물과 바닷속 풍경.
대기하고 있던 제라드가 출력을 최대로 끌어 올렸다.
위위윙-!
동시에 조종간을 있는 대로 잡아당긴 그의 기체가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깊숙이 잠수를 하지 않은 것인지 수면까지는 정말이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바로 기체를 비활성화 상태로 돌린 태정은 슈트와 블라스터를 소환, 최대한 빠르게 고도를 높였다.
그렇게 올라가는 와중 알림음 하나가 들려왔다.
[새로운 스킬 초전자 플렉시온이 오픈됩니다.]
확인할 새도 없이 쭈욱 올라가던 태정의 신형은 최대 고도에 이르러서야 멈춰 섰다.
“됐나?”
[충분해.]
“휘유. 내 살다 살다 몬스터 x이랑 배출되어 보긴 처음이다. 이게 말이 되나.”
태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질린다는 듯 말을 내뱉자 프리지아가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넌 x 안 싸? 뭘 새삼스럽게. 내가 본 것만 해도 몇 번인데.]
“그만해라.”
[뭘 그만해. 아침마다…….]
“제라드! 얘 입 닫게 할 수 있는 방법 진짜 없어?”
-죄송합니다.
“내가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하다니.”
[뭘 그렇게 예민해? x 싸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배설은 유한한 삶을 사는 필멸자들의 축복이야. 넌 그걸 누림에 있어 감사해야 한다고. 그보다 확인해야지?]
“알아서 한다, 스킬 데이터.”
[초전자 플렉시온]
레벨1 [본인 한정]
사용 범위 1단계 [고정 타깃]
축소 범위 - 1.87cm [레벨1]
지속 시간: 5분
소비 마나: 초당 50
*재사용 가능 시간 7일 [레벨1]
“음. 1.87cm까지 줄일 수 있어? 내 몸을? 인류에 이런 기술이 있었나?”
-이 기술은 이론만 존재했던 기술입니다. 그걸 시리우스가 앞당겨 현실화시킨 거죠.
“뭐야? 그럼 인간의 것이 아니잖아.”
-인간의 기술이 맞습니다.
“어째서.”
-인간의 이론을 100% 차용해 만든 것이니까요. 당시 인간은 이미 입자 가속 슈트를 활용해 몸을 축소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프로토타입까지 나와서 연구가 한창이었죠. 문제는 그 슈트였습니다.
“슈트? 슈트가 왜?”
-지속 시간이 짧은 데다 슈트를 착용해야 하니, 활동에 여러 제약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아무것도 장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초전자 이론의 권위자인 플렉시온이 몸 전체를 뒤덮는 슈트가 없어도 유기체의 축소가 가능하다는 파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게 됩니다. 당시 이 논문의 내용은 신의 영역이라 하여 불가능하단 소리가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지난 천 년간 베일에 쌓여 있던 4대 물질과 3대력의 실체가 드러나며 점차 현실화에 힘이 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수백 년 안으로 이루어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죠.
“그런데?”
-바로 이 시기에 몬스터 아웃 브레이크가 일어난 겁니다.
“아.”
-4대 물질과 3대력의 실체로 인해 인간은 플렉시온의 초전자 이론 외,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범우주적 이론들을 정립시켰습니다. 시리우스가 관심을 보인 것도 바로 이런 고차원의 이론들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본 겁니다.
“뭐를?”
-그것까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김새게 진짜.”
태정이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프리지아가 나섰다.
[그건 내가 알려 주지. 인간이 끝없이 갈구하는 지식의 무한한 가능성. 시리우스는 그걸 본 거야. 거기에 배팅을 한 거지. 그런데, 여기엔 함정이 하나 있어.]
“함정? 갑자기 무슨 함정.”
[원판이 깨닫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그 초월적 이론들은 전부라 할 순 없지만 대부분 어떠한 존재들이 가지고 있는 전유물이야. 그 이상의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상대가 될 수 없지. 특히 너처럼… 음, 이 말은 그냥 참도록 하지.]
“말을 하다 말고 왜…….”
[아무튼 놈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지 모르겠어. 난 이곳에 국한된 줄 알았는데. 정말 미쳐 버린 건지.]
프리지아의 말에는 핵심이 없었다.
그래서 이해를 하기가 더 힘들었다.
“띄엄띄엄 얘기를 하니 뭘 알 수가 있나. 어쨌든 하나는 알겠네. 누군가와 싸워야 한다는 거. 근데 그 상대가 말도 안 되게 강하다는 거. 맞지?”
[알아서 생각해. 나도 지금 굉장히 복잡해진 상태라 휴식을 좀 취해야겠으니까.]
이후 프리지아는 말이 없었다.
“인간이 갈구하는 지식의 무한한 가능성이라…….”
한동안 프리지아의 말을 곱씹어 보던 태정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생각해 봐야 거기서 거긴데 이게 뭔 소용이냐. 제라드.”
-예. 주인님.
“남극까지 얼마나 남았지?”
-40시간 이상 가셔야 됩니다.
“그래. 일단 가자. 가서 퀘스트부터 해결하고 보자. 어차피 너희한테 제대로 말을 들으려면 내가 그 특이점인지 매력 점인지 몽고반점인지 뭔지를 달성해야 하니까. 거기까지 도달하고 그때 다시 생각을 해 보자.”
태정이 결의를 다지며 출발을 하려는데, 제라드의 태클이 들어왔다.
-주인님, 매력 점과 몽고반점은 특이점과 관련이 없습니다.
“나도 알아. 그냥 하는 말이잖아. 넌 어떻게 인공지능이 센스가 없냐.”
-…….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