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쾅! 콰쾅!
엄청난 굉음이 사방을 떨어 울렸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들썩이는 대지의 울림.
뿌옇게 올라온 연기가 사방을 메우다 어느 순간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정화됐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티끌 하나 없이 멀쩡하게 버티고 선 차단벽.
놀랍게도 태정의 무기는 벽에 전혀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로켓포도 안 통해?”
처음 스피어 블레이드를 사용해서 벽을 파괴하려 했던 태정은 꿈쩍도 않는 차단벽에 여러 무기를 소환해서 가격해 봤다.
출력 100%의 이레이저 건부터 시작해 다연장 로켓포까지.
공간의 제약이 있어 천무나 b6-1만 사용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어지간한 건 전부 사용한 태정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사실 레드존의 몬스터도 가루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강력한 화력이었다.
한데, 고작 벽 하나를 부수지 못하다니.
아니, 부수지 못하는 건 둘째치고 상처 하나 낼 수 없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러면 살짝 문제가 좀 있는데.”
벽을 앞에 두고 잠깐 생각을 하던 태정은 이내 엘리베이터로 돌아갔다.
그리곤 바로 한 층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위에서 보면 뭔가 틈이 있을까 해서였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이 된 상태였다.
순간 천무로 무너뜨려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파괴력으로 따지면 앞선 무기들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한번 가 보자.”
무기 관리실을 거르고 가장 가까운 연합국 관리소로 향한 태정은 그곳에서도 똑같은 형태의 통로를 볼 수 있었다.
나머지 3곳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경고음이 말했던 카드란 것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실물도 모르는 물건을 이곳에서 어떻게 ‘찾아내느냐’였다.
대충 보이는 굴만 해도 수백 개.
시야가 닿지 않는 아래위의 것을 합치면 몇 배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을 해 보자. 저 정도로 철통 보안이면 관리직이나 고위급 인사들이 들락날락할 거야. 근데 여기엔 사람이 없으니, 그런 사람들이 사용할 만한 숙소를 찾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겠지. 직위가 있는 만큼 숙소는 최상급일 확률이 높을 테고. 문제는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는 건데…….”
엘리베이터 내부의 모든 문자를 번역해 봤지만 숙소로 추정할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죄다 알파벳 따위에 숫자가 혼용된 알 수 없는 단어와 문자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B-T 522가 골드 클래스였지.”
그가 처음 갔던 B-T 522는 엔지니어들이 사용하는 숙소였다.
비슷한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을 찾다 보면 어딘가 하나쯤은 나오지 않을까.
말을 중얼거리던 태정은 버튼들을 바라보다 두 번째 열에 보이는 B-S 333을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다시 상승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좁은 다리와 함께 건너편의 굴이 눈에 들어왔다.
B-T 522와 마찬가지로 굴을 막아서고 있는 문.
좌측 아래 보이는 콘솔을 조작하자, 디스플레이에 스마일 그림이 뜨며 문이 좌우로 오픈됐다.
내부는 B-T 522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거의 똑같은 구조의 로비.
이곳 역시 제시란 안내 로봇이 있었다.
-이곳은 기체 관련 소프트웨어 기사들이 사용을 하고 있는 골드 등급의 객실입니다.
태정은 522룸과 마찬가지로 로봇을 협박해 모든 룸을 다 살펴봤다.
이곳에서도 태정은 여러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추정이나마 가능했던 엔지니어들의 자료와 다르게 이쪽은 아예 뭔지도 모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와 두 곳을 더 가 본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B-T는 골드 등급의 숙소야. 여긴 일단 다 거르자.”
두 번째로 수색하게 된 곳은 C-S가 붙은 객실이었다.
B-T에 비해 훨씬 큰 규모를 자랑하는 로비.
객실 복도가 하나였던 골드 등급과 다르게 C-S는 무려 8개의 객실 통로가 나 있었다.
하지만 배치된 가구들이나 자재 등의 고급스러움이 골드와 비교하면 다소 저렴한 느낌이 있었다.
안내 로봇도 보이지 않는 상황.
“여긴 휑한 게 딱 봐도 일반 근로자들 숙소인 거 같은데.”
대충 느낌이 온 태정이지만, 기왕 들어온 거 수색은 해 봐야 했다.
통로 중 아무 곳이나 골라 들어간 태정은 좌우로 보이는 수많은 문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도 매우 익숙한 문이었다.
“이건 지금이랑 좀 비슷하네.”
손잡이가 달려 있는 철문.
잡고 당기자 그대로 문이 열리며 단출한 내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철제로 된 2층 침대 2개와 가운데 놓인 옷장 하나.
정말이지 딱 잠만 잘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딱히 볼 것이 없던 태정은 통로에 있는 문들을 하나하나 다 열어 보곤 다시 나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B-T는 골드, C-S는 일반. 여기도 걸러.”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체크해 나가던 태정은 꽤 많은 곳을 걸러 낼 수 있었고, 절반쯤을 진행했을 때, 제법 고급스러운 로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맞이하는 인간 형태의 강철 로봇.
영상 매체에서 본 듯한 비주얼이었지만 접시 로봇보다 오히려 위화감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곳은 레벨2 에이티움 라운지입니다. 저희 라운지를 방문해 주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로봇의 살가운 인사에도 태정은 쉽게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조용히 광선 검을 손에 쥘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접시 로봇이야 한눈에 봐도 별게 없었지만, 눈앞의 로봇은 충분히 그만한 전투력이 있을 것만 같아 보였다.
불시에 공격이라도 당하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언제든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한발 물러선 태정이 물었다.
“어이, 네 이름이 뭐냐.”
-제 이름은 에이든입니다.
“에이든? 너 내가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한국말을 하지? 내가 한국인인 건 어떻게 알았냐. 혹시 내 정보가 여기 있어?”
-아닙니다. 제 머릿속엔 총 1억 7,500만 회에 달하는 다국적 표본 외형 선별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탐색에 의한 결과, 당신은 대한민국의 사람과 97.6%의 확률로 외형이 일치합니다.
“그게 된다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겉모습만 보고 어느 나라의 사람인지를 맞출 수가 있을까.
“제라드, 너보다 나은 거 같은데?”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당연히 농담이지. 근데 어째 넌 감정도 없는 게 발끈하는 거 같은 기분이 드냐.”
-그런 적 없습니다.
“뭐 아무튼.”
제라드와의 대화를 끊고 태정은 에이든을 향해 다시 물었다.
“너 혹시 종합 무기 관리 시설이라고 아냐.”
-BBTS-2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아마 그럴 거야.”
-알고 있습니다.
“오. 알아? 그럼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야 하는지도 알겠네. 카드라는 게 필요하다는데 그 카드가 정확히 무슨 카드를 말하는 거야?”
-연합국에서 발급한 레벨2 이상의 아이디 카드를 말하는 겁니다. 대부분 팔찌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아. 그게 팔찌였어?”
몰랐던 사실에 희망이 생기는 태정이었다.
확실히 뭔가 있어 보이는 로봇이라 그런지 놈은 에티나 제시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그 팔찌는 어디서 구하지?”
-레벨2 이상의 아이디 카드는 따로 구하실 수 없습니다. 한정된 인원에게 공급되었기 때문에 마지막 발급이 15년 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팔찌가 없으면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음. 그래… 근데 여긴 뭐 하는 데냐?”
주변을 둘러보던 태정이 지금에서야 생각이 났다는 듯 말을 물었다.
-이곳은 고급 라운지로 등급 레벨 2 이상의 직위를 가지신 분들이 이용하는 힐링 센터입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술도 보이고 뭐가 많네. 그럼 나도 등급 레벨이 2인가?”
-아닙니다. 제 데이터에 당신은 거수자로 나옵니다.
“거수자? 근데 왜 이렇게 친절해? 혹시 경비 로봇 같은 거 불렀냐.”
혹시나 해서 물은 말이었다.
거동이 수상한 자로 판단이 되었다는 것은 불법 혹은 무단 침입을 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다시 한번 그를 놀라게 만들었다.
-저에게 그런 권한은 없습니다. 다만 현재 당신의 태세와 적개심 그리고 손에 든 무기를 고려했을 때, 제가 공격받을 확률은 74%에 달합니다. 저는 이 일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야… 이건 진짜 대단한데? 어떻게 그런 것까지 계산이 되냐.”
-M-2 최신 인공지능 모델이 탑재된 저에게 그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럼 자리를 옮겨 한잔하시겠습니까? 최상의 위스키와 저희 바의 최고 인기 스타 엠마의 화끈한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에이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코너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그것은 실오라기만 걸친 인간 여자였다.
깜짝 놀란 태정이 에이든을 향해 물었다.
“사람이 있었어?”
-로봇입니다.
“이게 로봇이라고?”
태정은 엠마란 로봇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뭔가 어설픈 점을 찾기 위해서였는데, 몇 번을 뜯어보고 뜯어봐도 사람이 분명했다.
“놀리는 거 아니지? 이게 어떻게 로봇이냐.”
태정은 장갑을 오픈해 여자의 몸을 만져 봤다.
탄력 있고 건강한 사람의 살결.
자신의 것과 비교해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
온기까지 느껴지는 걸 보면 그냥 영락없는 인간이었다.
“엠마라고 했나?”
“네.”
“입 한번 벌려 줄 수 있어?”
“아.”
그의 주문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벌리는 그녀.
로봇이라면 이런 보이지 않는 곳에 분명 티가 나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역시나 사람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손 한번 넣어 봐도 되겠냐.”
“네. 아.”
허락이 떨어지자 그가 손가락을 넣어 여기저기를 훑어봤다.
그리곤 이내 피식 하는 웃음과 함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야, 장난 하냐. 사람이구만. 이 점막이랑 돌기 그리고 침도 나오잖아. 아무리 미래지만 이걸 어떻게 구현하냐.”
태정의 말에 가만히 서 있던 엠마가 자신의 양손으로 머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뽑아 당기자.
쑥 하고 떨어져 나오는 머리통.
놀랍게도 그 내부는 기계였다.
“이제 믿으시겠어요?”
떨어져 나온 머리가 그를 향해 묻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태정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에이든이 몸을 틀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자리를 옮기시겠습니까?
“어? 아니. 됐어. 그냥… 됐고. 내가 지금 바빠서 하나만 물어볼게. 레벨 2 이상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은 어디서 지내냐.”
-제가 알고 있는 곳은 SB-1 한 곳밖에 없습니다.
“알았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엠마의 화끈한 기술은 인간의 그것과 비교가 안 됩니다. 체험을 해 보시면…….
“다, 다음에 올게. 계속 수고해라.”
도망치듯 빠져나온 태정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아직도 따뜻하고 촉촉한 촉감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이게 신세계란 건가?’
미래의 엄청난 기술력(?)을 맛본 태정은 곧 엘리베이터를 타고 SB-1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