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한산도 본청.
“어디를 통해 들어온 서신이지?”
“일반에서 보낸 특수우편이라 발신자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단 알아보라고는 했지만, 워낙 수가 많아 특정 인물을 꼽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음. 이것과 똑같은 것이 다른 길드에도 들어갔다고?”
“예. 확인된 곳만 여섯 곳입니다. 아마 톱 텐에 든 길드엔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곳에 속한 인물은 아니란 말이군. 한데, 1급 기밀에 붙여진 이 사실을 어떻게 다른 이가 알 수 있는 거지? 우리도 최근에서야 입수한 정보가 아닌가.”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신에는 저희가 모르는 내용까지 제법 상세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추측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그런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사실 아닙니까. 게다가 사라진 위너스 길드원들의 행방까지 알 정도면…….”
“제라드라… 들어 본 적이 있나?”
“없습니다. 아마도 가명이지 않겠습니까.”
“단체일 수도 있겠지.”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아는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니, 거짓은 아닐 거야. 일단 톱 텐에 소집령 내리고 이에 대해 논의를 해 보는 것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 * *
태정이 남극에서 복귀한 지 사흘.
세상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
혹시나 해서 한산도 공식 채널을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왔다 한 그였지만, 이렇다 할 입장이나 내용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너무 조용해 우편이 제대로 들어갔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
휴대폰을 내려놓은 태정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무슨 얘기가 하나도 없냐. 그 정도 내용을 알았으면 빨리 길드에 공문이라도 돌려야지.”
확인을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 그에게 내부 전화가 걸려 왔다.
“네.”
-박세아입니다. 전략기획본부장님 오셨습니다.
“본부장님이? 드시라 해.”
수화기를 내려놓고 얼마 뒤.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본부장 한지만이 들어왔다.
태정이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어, 그래. 자네 혹시 바쁜가?”
“아뇨. 딱히…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건 아니고 밥이나 한 끼 했으면 해서.”
“저야 좋죠. 그렇지 않아도 점심을 먹으러 갈까 하던 참이었는데. 나가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내일 저녁에 시간 괜찮은지 그걸 물어보러 왔어.”
“내일 저녁이요?”
“혹시 약속이 있나?”
“약속은 없습니다.”
“오. 잘됐군. 여기 B 구역에 있는 솜씨 좋은 레스토랑인데. 자네도 알지? 해리슨 호텔이라고. 거기 30층이야. 저녁 7시까지 보자고. 참, 그보다 자네 그 소문은 들었나?”
“어떤 소문 말입니까.”
“지금 중국에 큰일이 하나 터진 모양이야. 내부 사정이 많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구만.”
“전쟁이요? 어디서 말입니까.”
“여기, 한국에서 말일세. 내 30년 지기가 빛 서울 간부로 있는데, 최근 한산도로부터 두 번의 소집령이 떨어졌다더군.”
“소집령이요?”
“중책이 아니라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네만, 톱 텐에 있는 일부 병력들이 서해안으로 배치가 되고 있다 하네. 이미 인천에서부터 태안까지 쫙 깔렸다던데. 이게 무슨 뜻이겠나.”
“태안까지 깔렸다면 미수복 지역까지 병력이 들어가 있다는 거군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땅이야. 그런데 그곳에까지 병력을 배치했다는 건…….”
“어딘가로부터 침략을 대비하겠다는 거군요.”
“맞아. 확실하진 않지만 중국에서 뭔가 큰일이 터진 게 분명해. 화산이 비록 제제는 많았지만, 윗대가리들과는 친하게 지내던 것이 사실 아닌가. 독점 계약을 맺은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한산도에서 저리 경계할 정도면 이미 그들과 틀어졌거나, 소문대로 내부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자네도 알겠지만 톱 텐이 한산도 주도하에 병력을 뺀 건, 몬스터 아웃 브레이크 이후, 처음 있는 일이야.”
“그렇군요. 그런데 그 사실을 언제쯤 알게 되신 겁니까?”
“음. 들은 건 일주일 정도 된 것 같군.”
한지만의 말에 태정이 속으로 생각했다.
‘일주일이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건데.’
자신이 서신을 보낸 지 불과 사흘밖에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데 이미 병력 배치를 끝내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니.
이는 중국이 뒤집어졌다는 걸 그보다 한산도에서 먼저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확실히 원 톱이 괜히 원 톱은 아닌가 보군요.”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아. 아닙니다. 한산도 얘기였습니다.”
“아무튼. 그것 때문에 이번에 손대 보려고 했던 항만 사업은 당분간 무기한 보류를 해야겠어. 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가가 나질 않아. 그러니 지역대에서도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알겠습니다.”
한지만이 다녀가고 난 뒤, 태정은 더 이상 이 일에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
실세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으니 알아서들 대처할 터.
병력까지 배치한 마당에 이미 그에 따른 세부적인 계획이 수립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좋아. 거긴 일단 높으신 양반들에게 맡기고. 이제 뭘 해야 한다?”
태정은 머릿속에 우선순위를 매겨 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천신병이었다.
얻어놓고 한 번도 쓰지 못한 궁극의 병기.
우선은 이걸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두 번째는 병장기를 이용한 훈련이었다.
검술과 봉술, 창술 심지어 각법까지, 그는 지금 익혀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전엔 병기술이 단순 보조에 불과했지만, 워커팩이 있는 지금은 주력으로 사용할 정도로 비중이 커진 것이 사실.
그렇다면 제대로 배워 볼 만했다.
근본도 없는 마구잡이식 검술로도 남부 기지의 정예들을 쓸어버리지 않았던가.
체계적으로 배운다면 그 효과는 몇 배나 될 것이 분명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냥 막바지에 얻은 로봇 제작술이었다.
[마르시-1] [휴머노이드]
특성 [MK-22 자동소총]
AI 레벨 [강]
버전: 1세대 군사로봇
공격력 1,500-2,200
기동력 [80] 업그레이드 [1]
제작 시간 1기당 10분.
지속 시간 [반영구적]
소비 마나 8천.
“이거 잘만 사용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봐, 제라드.”
-예, 주인님.
“이거 로봇 제작술 말이야. 반영구적이라는 말이 제작된 로봇이 그렇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한번 소환된 로봇은 파괴되기 전까지 계속 작동됩니다.
“활동 범위는 어떻게 돼? 무한대는 아닐 테고.”
-주인님을 기준으로 반경 10km 내외입니다.
“그보다 멀어지면?”
-자동으로 전원이 끊어집니다.
“음. 활동 반경이 10km면 생각보단 넓지 않네.”
-활동 반경은 차후에 얼마든지 늘릴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어렵습니다.
“그래? 그럼 일단. 이것부터 손을 좀 대 볼까.”
봉신방의 극악무도한 짓으로 인해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아는 피해국만 무려 십여 개.
이들 나라의 동맹국만 해도 수십 곳이었다.
한국 역시 피해국으로 그들과 함께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성명과 압박 정도로 끝이 난다면 다행이지만, 단 한 곳이라도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면 그가 있는 한국은 자동으로 참전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 한반도가 첫 번째 전장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물론 한산도와 톱 텐 선에서 마무리가 된다면 베스트겠지만, 확전이 되어 국운이 걸리게 된다면 그땐 그도 나 몰라라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를 대비해 병력을 모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B급까진 힘들어도 그 아래 레벨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전투력이야. 굳이 전쟁이 아니더라도 비상시에 용이하게 쓸 수도 있을 테고. 우선은 이놈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
그날 저녁.
태정은 방안에서 마르시-1 제작에 들어갔다.
어려울 건 없었다.
이 또한 스킬의 한 종류로 그저 활성화시킨 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스킬을 활성화시킨 지 10분이나 됐을까.
완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들어왔다.
[마르시-1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임시 저장고에 마르시-1이 보관됩니다. (1/20)]
“임시 저장고?”
-말 그대로 로봇을 보관할 수 있는 임시 저장고입니다. 20기까지 보관이 가능합니다.
“오호. 그런 기능도 있었어?”
-창고 스킬을 획득하시면 더 많은 로봇들을 보관하실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창고에 보관이라. 좋은데? 이러면 잔뜩 모아 놨다가 한 번에 꺼내 쓸 수도 있단 말이잖아.”
-그렇습니다.
“햐. 그렇단 말이지. 그보다 소환은 어떻게 해?”
-의식을 집중해 창고를 눈에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잠재의식을 개방해야 하는 일이라 지금은 저를 통해 꺼내시는 게 빠르실 겁니다.
“그럼 일단 한번 보자.”
-마르시-1 소환하겠습니다.
대답을 끝으로 태정의 앞으로 홀로그램이 형성되더니, 이내 기계 느낌 물씬 나는 로봇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형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태정의 키를 훌쩍 넘기는 신장.
머리와 천장의 간격이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야… 간지 제대론데 이거? 기지에선 정신없이 잡느라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 꽤 폼 나잖아? 사람들은 이것만 봐도 신기해하겠다.”
태정의 몸통만 한 총을 들고 우뚝 서 있는 로봇.
바로 제작을 해서 그런지 기지에서 본 것들과 다르게 지저분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녹하나 슬지 않고 매끈하게 빠진 것이 갓 공장에서 나온 새 차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이거 명령은 어떻게 하냐.”
-로봇마다 이름과 직급을 정해 주셔야 합니다. 마르시-1의 경우 기초 군사로봇이기 때문에, 분대장부터 소대장까지 직급 부여가 가능합니다.
“오. 그럼 명령을 하기도 편하겠네. 좋아. 그럼 보자 뭐가 좋을까. 뭔가 새것같이 번쩍번쩍하니까… 새삥. 그래, 새삥이 좋겠다.”
-마르시 제작 코드 넘버1 새삥으로 이름 설정되었습니다.
“지금은 한 기밖에 없으니까. 직급은 나중에 부여해도 되지?”
-변경 수정 차후 부여 모두 가능합니다.
“좋아. 이봐. 새삥.”
태정의 부름에 로봇의 고개가 그를 향해 내려갔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세상에 나온 소감이 어떠냐.”
“이렇게 주인님을 뵙게 되어 반갑고 영광입니다.”
“그래. 나도 반갑다. 앞으로 우리 잘해 보자. 네가 내 첫 번째 수하니, 식구들이 많이 생기면 소대장을 시켜 주마.”
“감사합니다. 이 한 몸 썩어 가루가 될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오호. 말하는 거 보소. 그래그래. 이게 바람직한 로봇의 태도지. 카이저 그놈이 이 반의반만 돼도 좋을 텐데.”
태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천신병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런 구시대의 유물과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네 처참한 수준을 증명하는 꼴이지.]
“그래? 근데 어쩌냐. 그런 처참한 수준 앞에 넌 곧 모습을 드러내게 될 텐데.”
[삼 년 본다.]
“세 달.”
[어림없는 소리.]
“두고 보면 알겠지.”
일단은 질러 놓고 시작하는 태정이었다.
목표가 있으면 간절해지는 것이 사람 마음.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두고 봐라. 내 어떻게든 해 보이고 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