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메카닉 플레이어-155화 (155/182)

155화

“으음.”

포근한 기운과 좋은 냄새.

슬며시 눈을 뜬 태정은 자신이 박세아에게 안겨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참 따뜻하구나, 이 여자의 품은.’

평소 같으면 금세 떨어져 나왔겠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의 귓가로 그녀의 속삭임이 전해졌다.

“일어나셨어요?”

“아니.”

“…….”

그렇게 다시 잠이 든 지 얼마나 흘렀을까.

허전함에 눈을 뜬 그가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던 박세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겐 있었다.

펄럭!

그의 거친 손길에 이불이 한차례 펄럭였다.

동시에 무언가를 확인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멀쩡하군.”

어제와 같은 불상사가 또 일어난 건 아닌지 걱정이 되던 태정이었다.

하지만 걱정과 다르게 그의 하체는 뽀송뽀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그대로의 상태.

순간 뿌듯함이 밀려들며 기분이 좋아졌다.

‘두 번은 있을 수가 없지. 내가 누군데.’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가 밖을 나서자 구수한 음식 냄새가 위장을 자극했다.

인기척에 음식을 장만하던 박세아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셨어요?”

“어. 넌 언제 일어났냐.”

“방금이요. 앉으세요.”

태정이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상이 거하게 차려졌다.

평소보다 요리의 가짓수가 많아 보였다.

앞에 보이는 계란말이 하나를 입에 넣은 그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없었어?”

“네. 어제는 괜찮으셨어요.”

“그래. 근데 오늘 무슨 잔치야? 반찬이 왜 이렇게 많아.”

“아. 그냥 이거저거 하는 김에…….”

“너무 많이 하지 마, 어차피 다 못 먹으니까. 그리고 고마워.”

“네? 뭐가요?”

“그냥 이래저래 다. 네 덕에 큰 산 하나를 넘은 것 같아.”

“제가 도움이 된 건가요?”

“완전. 혹시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만 해, 전부 사 줄 테니까. 아니면 소원이라든가. 원래 이런 약속 잘 안 하는데, 넌 받을 자격이 충분해.”

“아녜요. 제가 무슨…….”

“또또 이런 건 그냥 앞뒤 체면 신경 쓰지 않고 무조건 받는 거야. 당장 없으면 고민 좀 해 보다가 나중에 말해. 기한은 넉넉히 줄 테니까. 알았어?”

“네. 고맙습니다, 보스.”

“고맙긴, 내가 고맙지.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당연하죠.”

“바디, 어디 거 쓰냐.”

“바디워시요? 보스하고 같은 거 쓰잖아요. 왜요?”

“그래? 이상하네. 내 몸에선 그런 좋은 냄새가 안 나던데.”

“네?”

“아냐. 얼른 먹고 출근이나 하자.”

아침을 먹고 지역대로 출근한 태정은 집무실에 들어와 의자에 한껏 몸을 기댔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허공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어젯밤의 기억.

대자로 뻗어 의식이 꺼지기 전 그는 분명히 목도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낯익은 로봇의 형체를.

흐뭇한 미소로 어제의 일을 떠올리던 태정이 으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이. 카이저.”

[왜 부르나.]

“너 맞지?”

[……]

“말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맞나 보군. 소감이 어떠냐.”

[무슨 소감 말인가.]

“3년은 걸릴 거라 했던 네 말을 내가 두 번 만에 뒤집었는데. 이 정도면 기록 아닌가.”

[음. 확실히 다시없을 기록은 맞다. 누구도 예상을 하지 못했으니까. 단, 그게 너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지. 그건 편법이었다.]

“편법이라.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무슨 수를 쓰든 목적을 달성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아주 좋아 죽겠나 보군.]

“당연하지. 2~3년짜리를 단 두 번으로 해치웠는데. 그보다 이제 완전히 내 손으로 들어왔으니, 성능을 한번 봐야겠지?”

핵미사일 다음으로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천신병이었다.

어디로 가서 확인을 해야 할까.

그에 걸맞은 테스트 장소가 필요했다.

“현재 내 수준이면 레드 3급까진 어떻게 비벼 볼 수 있을 거야. 천룡을 포함한 내 전투력이 4만 정도라 가정을 하면 한… 5급? 5급 정도면 적당하려나?”

천신병의 물리 공격력은 15만이었다.

3급까지 4만으로 비빌 수 있다면 적어도 2, 3등급은 가뿐히 월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5급. 무난하게 5급 정도로 가 보자.”

태정은 박세아에게 레드 게이트 5등급에 대한 자료를 부탁했다.

점심을 먹고 검술 교육을 마친 그가 자리에 돌아오니, 그녀가 가지고 온 자료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드라이어드 협곡.

하이 레벨로 가기 전 거치는 첫 번째 관문.

적정 레벨 850 이상.

특징 - 지상과 공중에서 끊임없이 밀려드는 적.

원거리, 중거리, 근접 특성의 몬스터가 골고루 서식함.

이형진(2개 이상의 파티를 지닌 복합 전투 진형) 필수.

.

.

.

“적정 레벨 850에 2개 이상의 파티라. 생각보단 해볼 만한 것 같은데? 어이 카이저.”

[또 왜?]

“여기 되겠지?”

[그거야 모르지. 참고로 말하지만 난 피라미는 상대 안 한다.]

카이저의 말에 태정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냐. 내가 결정을 하는 거지.”

이후 잠시간 고민을 하던 그가 가는 것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5급이면 천신병의 전투력을 생각했을 때, 충분히 하고도 남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게이트가 제닉스엔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 제닉스가 가진 레드 게이트는 태백에 하나.

남극을 가기 전 그가 클리어 했던 요정의 숲이었다.

즉 더 높은 등급을 가기 위해선 주인이 없는 5등급 게이트를 찾아야 한다.

“이 정도 등급을 굴릴 수 있는 곳이면 상위 20위권은 돼야 할 텐데. 금사자나 무적 놈들 걸 좀 빌릴까? 그놈들 건 좀 써도 미안하지 않을 것 같은데. 명도도 괜찮을 것 같고… 아니지. 우리도 사면되는 거 아냐?”

한산도의 승인하에 게이트의 소유권을 사고파는 플랫폼이 있다.

지금까지야 필요가 없어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이제는 좀 봐야 할 때.

길드 자체도 스페셜리스트로 승격이 됐고, 성장을 위해선 미리 확보를 해 놓는 것이 좋았다.

생각을 하던 그가 전화를 들었다.

“어. 난데. 밑에 차 좀 대기시켜 줘.”

지역대를 빠져나와 그가 향한 곳은 길드장이 있는 본청이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자, 의자에 앉아 있던 양태식이 그를 반기며 일어났다.

“어서 오게.”

“안녕하셨습니까.”

“감사로 정신이 없을 텐데, 어쩐 일인가.”

“부탁드릴 일도 있고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일단 앉지. 차는?”

“먹고 왔습니다.”

“그래. 내게 부탁을 할 일이 뭔가.”

“게이트와 관련된 일입니다.”

“게이트? 또 무슨 분쟁이 생긴 건가? 내 그것에 대해서 들은 보고는 없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레드급 게이트가 필요합니다.”

“레드급? 그거라면 태백에 하나가… 자네, 얼마 전에 다녀오질 않았나?”

“맞습니다. 한데 그곳은 이제 졸업을 했습니다. 더 높은 등급이 필요합니다.”

태정의 말에 양태식이 약간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리 최하 등급이라지만 레드를 겨우 한 번 다녀오고 졸업이라니?

돌연. 그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사할린에서 돌아온 참모장과 총대장의 보고.

-생애 그런 대폭발은 처음 봤습니다.

-난 그때 세상의 종말이 오는 줄 알았네. 그 엄청난 폭발은… 거의 진 메테오 급이었어

그들은 이미 태정을 하이 레벨급에 견주고 있었다.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들이 거짓을 말할 리는 없을 터.

“혹시 그 핵미사일이란 것을 쓴 것인가. 태백 레드 홀 말일세.”

“아닙니다.”

“그럼 폭격기를?”

“아닙니다.”

“그럼 대체 뭐로 졸업을 했단 말인가?”

“검을 사용했습니다.”

“검? 자네, 검도 사용할 줄 아나?”

“예. 뭐 조금.”

“특성이 원딜인데 검으로 레드를 졸업했다… 자넨 대체 못하는 게 뭔가.”

“그냥 열심히 할 뿐입니다.”

“열심히 해서 레드를 졸업할 것 같았으면 우리 길드는 이미 톱 텐에 들고도 남았겠지. 좋아. 어차피 우리도 이제 스페셜리스트에 들었고, 레드 하나로는 부족할 수 있지. 원하는 게이트가 있으면 픽해서 경영실로 올려놓게. 승인하라 일러 놓을 테니.”

“참모진 논의 없이 바로 말입니까?”

“논의는 무슨. 다른 이도 아니고 자네가 필요하다는데, 묻따로 승인해야지.”

들어 보지 못한 낯선 단어에 그가 양태식을 향해 되물었다.

“묻따… 말입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허허. 자네 묻따를 모르나.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라는 뜻일세. 요즘 길드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줄임말이지.”

“아. 그렇군요.”

“아무튼. 게이트에 대한 건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 얼마가 됐든 모두 지원할 테니까 말이야.”

“감사합니다.”

길드장의 허락을 받고 다시 지역대로 돌아온 태정은 게이트 소유권에 대한 매매 양도가 이루어지는 플랫폼에 접속했다.

[인천 3급 4,200억.]

[고성 7급 2,800억.]

[당진 6급 3,200억.]

[울산 5급 1,800억.]

[제천 8급…….]

“비싸다, 비싸.”

등급을 막론하고 레드 게이트의 시세는 대략 수천억이었다.

수도권에 가까울수록 가격이 좀 더 오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 2~4천억에 형성된 매물이 가장 많았다.

신기한 점은 블루 게이트의 가격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블루가 더 높은 곳이 많았다.

블루의 수요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졸업 구간이라 할 수 있는 15~17은 1조를 가뿐히 넘는 매물이 여럿 있었는데, 올라온 지 하루도 되지 않아 거래 완료가 된 상태인 것이 상당수였다.

반면, 레드는 수년이 지나도 거래가 되지 않은 악성 매물이 페이지마다 널려 있었다.

“하긴. 레드 1급만 해도 사실상 50위권 밖은 전멸이니까. 우리만 해도 한 오십 명 정도 갈 수 있으려나?”

서열 40위권대에 포진해 있는 제닉스에서조차 레드에서 제대로 사냥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길드장을 포함해 각 부의 수뇌들이나 가능할까, 나머진 아직도 블루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걸 사게 되면 온전히 자신만 쓰게 될 것인데, 수천억에 달하는 회사 자금을 혼자 쓰는 곳에 투자하기가 조금 미안했기 때문이다.

“일단 테스트 겸 5급으로 하나만 사 볼까.”

그는 나와 있는 5급 매물 중 가장 저렴한 울산 게이트를 픽해 본청 경영부에 올렸다.

승인은 그날 오후에 바로 떨어졌다.

최소 한 달은 걸리는 일이 몇 시간 만에 처리가 된 것이다.

이것만 봐도 태정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있는 부분이었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소유권이 이전될 테고. 그동안 마르시나 좀 넉넉히 뽑아 놓을까.”

삼 일 뒤.

울산의 레드 게이트가 제닉스 길드에 귀속됐다.

태백과 마찬가지로 경계 병력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거리가 워낙 먼 데다가 세워 봐야 지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곳에 이미지 미러(영상 녹화 마법진)를 설치해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일에 대해 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게이트 앞에 이 돌 2개를 놓으시고 스크롤을 찢으면 자동으로 설치가 될 겁니다. 미수복지니 각별히 몸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참모부에서 내려온 간부에게 이미지 미러 설치법을 전해 들은 태정은 이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내리쬐는 햇살과 맑게 갠 푸른 하늘.

사냥을 나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럼 어디 가 볼까.”

그의 신형이 굉음과 함께 쏘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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