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F구역 영빈관.
“한 잔 더 받으시죠.”
“어째 술이 계속 나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건 아껴 두시고 이제 양주를 드시는 것이…….”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아직도 다섯 병이나 더 있습니다. 하하하.”
70년 된 소주는 그 뒤로도 세 병이나 더 나왔다.
벌써 네 병째.
썩은(?) 술을 먹고 있는 태정은 속이 울렁거려 죽을 지경이었다.
당장이라도 먹은 것을 게워 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해서야 어떻게 그를 영입한단 말인가.
그렇게 겨우겨우 잔을 비우고 있는데, 한상진이 그를 향해 물었다.
“한데, 은인은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아. 아직 제 소개도 하지 못했군요. 유태정입니다.”
“태정 님이셨군요. 그럼 나이는…….”
“스물여덟입니다.”
“오. 그럼 저보다 한 살 위신데. 저는 스물일곱입니다.”
“예?”
스물일곱이란 말에 태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못해도 사십 줄은 되어 보이는 이 사내가 정녕 자신보다 한 살 아래였단 말인가.
“놀라셨군요. 제가 털이 좀 많아서 그렇습니다. 깔끔하게 면도하고 이발하면 제 나이가 나오지요. 하하하.”
“그, 그렇군요. 그보다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상진 님을 모신 건…….”
태정이 슬슬 본론을 말하려는데, 한상진이 그의 말을 끊으며 들어왔다.
“길드에 가입하라, 그 말씀이시죠?”
“알고 계셨습니까.”
“대충 예상은 했습니다.”
“아무래도 혼자 하시는 것보다야 길드가 있는 게 편하시지 않겠습니까. 조건이나 대우는 최대한 맞춰 드리겠습니다.”
태정은 그렇게 말하며 한상진의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바로 거절을 한다면 애초에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기에, 영입은 물 건너가는 것.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잔을 마저 털어 넣으며 입을 열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한상진의 대답에 태정의 얼굴이 밝아졌다.
일단 조건이 나왔다는 건 들어올 확률이 매우 크다는 뜻이니까.
“말씀해 보시죠.”
“음. 저는…….”
태정은 한상진이 무엇을 요구할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보통 길드에서 스카웃을 할 때 조건으로 내걸 수 있는 건 두 가지 정도.
돈 아니면 직함이었다.
톱 텐 역시도 뒷배경이란 타이틀만 있을 뿐,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제는 700레벨의 히든이 과연 돈과 직급으로 매수가 가능하냐는 것.
돈이야 넘치도록 벌고 있을 테고, 쓸데없는 직함은 성장에 방해가 될 뿐이니 사실상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역시도 몸소 그걸 체감하고 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걸 들이대면 어떡하지?’
별의별 생각이 다 지나가는 가운데, 뜸을 들이던 그의 입이 활짝 열렸다.
“일 번을 시켜 주십시오.”
“예?”
“일 번 말입니다.”
일 번.
의미심장한 단어였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길드장이 있었다.
사실 그것 외에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길드의 원 톱이 아니고서 일 번을 붙일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태정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길드장 자리를 달라고? 애초에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거구만.’
어지간한 것은 모두 들어주려고 했던 태정이었다.
그럴 만한 힘도 있었고 길드 내 자신이 가진 영향력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길드장의 자리는 줄 수가 없는 조건이었다.
“죄송하지만 길드 마스터의 자리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태정이 거절을 하자 한상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길드 마스터 자리는 관심이 없습니다.”
“방금 일 번을 달라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말씀드린 일 번은 태정 님의 일 번을 말씀드린 겁니다.”
“저요? 제 일 번이 무슨…….”
“수하로 받아 달란 뜻입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태정은 자신이 뭔가 잘못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수하로 받아 달라니?
술에 잔뜩 취한 것이 분명했다.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제가 잘 못 들어서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하로 받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수하라는 게…….”
“태정 님의 일 번이 되고 싶다, 이 말입니다.”
“…왜요?”
“혹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란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한상진의 물음에 태정이 제라드를 향해 물었다.
‘무슨 뜻이냐.’
-한 사람의 아래, 만 사람의 위라는 뜻입니다. 세상에 자신보다 위인 존재는 하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제라드의 설명을 들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상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각성을 하기 전부터 생각을 해 오던 게 있습니다. 과연, 세상에 으뜸으로 설 수 있는 클래스가 존재할까. 무인, 궁술사, 염동력자, 원소계 법사, 정령술사, 그랜드 소드 마스터 등 세상엔 많은 히든이 있고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직업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누구도 1등을 장담할 수가 없죠. 그 이유는 그 직업이 세상에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저는 최상이 될 자신은 있지만 최고가 될 자신은 없습니다. 제가 노력하는 만큼 남들 또한 노력을 할 것이고, 제가 가진 집념만큼 그들 또한 열정을 불태울 테니까요. 한데, 태정 님은 다릅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클래스를 가지고 계시죠. 그리고 그 능력은 제가 이미 검증했습니다. 이 말은 결국 최고가 되실 분이란 뜻입니다. 바로 그 최고 밑에 제 자리를 틀겠단 겁니다.”
“저는 당최… 그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자랑이고 자부심이죠. 내가 모시는 분이 세계 최강이다. 그런데 그 최강의 일 번이 바로 나다. 이거면 의미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저는 목숨도 빚을 진 사이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태정은 한상진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듣기엔 말도 안 되는 궤변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태정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조건이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이 없었다.
“정말 그게 들어오는 것에 대한 조건입니까?”
“예.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음. 사실 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좋습니다. 그 일 번, 하고 싶으면 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럼 절 받으십시오.”
태정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가 일어나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덩달아 일어난 태정이 손을 저으며 만류했지만, 그는 기어코 세 번이나 절을 했다.
“이제부터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예? 무슨 주군까지야. 그런 거창한 단어는…….”
“아닙니다. 이제 주종 관계가 되었으니, 응당 그에 따른 예를 갖춰야지요. 그리고 이제 하대를 하십시오.”
“그건 나중에 차차…….”
“저를 진정한 일 번으로 생각지 않으시는군요.”
“그게 아니라… 그럼 상진 님도 말을 놓으시죠.”
“그건 아니 될 말입니다. 어찌 수하가 주군에게 말을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땅이 울고 하늘이 격노할 일입니다.”
“…….”
태정은 이제 ‘진짜 이게 꿈속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군이라니?
살면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태정이었다.
책에서나 두세 번 봤을까.
게다가 말을 편하게 하는 이것이 정녕 땅이 울고 하늘이 격노할 정도의 일이던가.
“그… 저기 그래도 이건…….”
“진정한 일 번이 되지 못하면 가입은 다시 한번 재고를 해 봐야…….”
“알겠다.”
“감사합니다.”
“대신 나도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입니까.”
“네가 혼자 지내며 시대와 조금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주군이란 호칭은 둘이 있을 때만 쓰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형이 어떻겠나.”
태정의 제안에 한상진의 얼굴에 작은 갈등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그가 절충안을 내놓았다.
“형님으로 하겠습니다.”
“그것만 해도 고맙네. 그럼 가입도 해야 하니 그 전에 길드장님을 뵈러 가 볼까?”
“존명.”
“아니, 그런 말은 좀…….”
태정이 본 한상진은 무협 소설의 광팬이었다.
자신이 무인이다 보니 그런 것도 있었지만, 문명과 떨어져 미수복지에서만 줄곧 살아서 그런지 본인이 진짜 무림인인 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 때문에 시대와 어울리지 않은 이상한 말들이 튀어나오곤 했는데, 태정은 그것이 너무 오글거렸다.
그 역시도 한때는 무협 소설을 즐겨 봤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보게 되니 괴리감이 심해도 너무 심한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야, 정신은 멀쩡한 것 같은데. 혹시 이게 코스프레라는 건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어쨌든 꼬시는 데에는 성공을 한 태정이었다.
게다가 이게 진짠지 거짓인지 알 수는 없지만, 히든이 수하로 들어왔다.
손해를 볼 것이 없단 뜻이었다.
태정은 별관을 나서기 전, 양태식에게 전화를 넣었다.
“예, 길드장님. 자리에 안 계신다고 해서 여기로 연락드렸습니다. 바쁘십니까?”
“아니. 내가 바쁠 것이 뭐가 있겠나. 그보다 자네, 아직도 그자와 함께 있나?”
“옆에 있습니다.”
태정의 말에 그가 소리를 죽이며 물었다.
“혹시 떠봤나? 들어올 의사는 있다던가?”
“가입하기로 했습니다.”
태정의 말에 전화를 받고 있던 양태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진짜야?”
“예.”
“조건은?”
“하나 있었는데, 이미 제가 지불을 했습니다.”
“버, 벌써? 뭘 내어 줬나?”
“길드에서 따로 나간 건 없습니다. 제 개인… 제가 그냥 해결했습니다. 지금 길드장님을 뵈러 가는 길인데, 오래 걸리십니까?”
“아니, 오래 걸리긴. 내 벼락같이 달려감세. 조금만 기다리게.”
통화를 마친 양태식을 향해 전략참모가 궁금하다는 듯 말을 물었다.
“지역대장입니까?”
“그 무인이라는 자. 가입을 하기로 했다는군.”
그의 대답에 좌중이 술렁였다.
방금까지 고민을 하던 것이 한순간에 해결돼 버린 것이다.
“조건은요? 원하는 게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지역대장이 개인 사비로 해결을 한 것 같아.”
“예? 그가 그렇게 부자였습니까?”
“아무래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히든이니… 벌이가 남다르지 않겠나? 아무튼 난 지금 본청으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나를 만나러 온다는군.”
“그럼 얼른 가 보십시오.”
“자네들은 다 복귀하게. 인사참모는 나와 함께 가지.”
길드장에게 전화를 넣고 차를 타고 이동한 태정과 한상진은 얼마 되지 않아 본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건물로 향하는 두 사내.
앞서 걷던 태정이 뭔가 불편한 듯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왜 혼자 멀찍히 떨어져 걷는 거야?”
별관을 나올 때부터 거슬리던 것이었다.
마치 주워 온 자식처럼 거리를 두고 있는 그.
그런 태정의 물음에 한상진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수하는 군주와 나란히 걸을 수 없습니다. 뒤로 4보. 우측으로 3보. 이곳이 일 번의 자리입니다.”
“그런 건 누가 만들었는데?”
“책에서 봤습니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아까부터 검은 왜 자꾸 만지작거리는 거야?”
“암습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끄응. 여긴 길드야, 우리 길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아.”
“모든 일은 거안사위(居安思危)라 했습니다.”
“거안, 뭐?”
“가장 편안할 때 위급함을 생각해 항시 대비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뜻은… 좋네. 근데 길드장실은 무기를 들고 가지 못해. 그러니까, 여기에서만큼은 넣고 가자. 그래도 길드 최고 어른을 뵈러 가는 자리인데,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지.”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요. 뭐 제겐 검 말고도 다른 수단들이 많으니. 알겠습니다.”
그렇게 검을 인벤토리로 집어넣는 한상진을 보며 태정은 생각했다.
‘거안사위가 아니라, 믿도발찍 아냐?’
-데이터에 없는 단어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제라드의 물음에 태정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대답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 당분간 주의해서 잘 봐, 아직은 속을 잘 모르겠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