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이, 이게…….”
마지막 일격을 가했던 김용진은 후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재빨리 몸을 돌려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보이는 태정의 모습.
분명 검이 가슴을 갈랐건만 대체 무슨 수로 그걸 피해 낸 것일까.
아니, 피한 것까지는 많이 양보해 인정을 해 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자신의 후방까지 들어올 수 있었냐는 것.
그것도 감각이 극에 달한 자신이 전혀 낌새를 느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김용진의 물음에 태정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김용진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확실히 보내 주지.”
끝을 보겠다는 듯 김용진이 전력을 다해 출수했다.
찰나의 순간 들어간 일격.
누가 봐도 머리가 쪼개짐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검이 머리를 가르자, 태정의 신형이 깜빡이며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등 뒤로 느껴지는 작은 살기.
순간적으로 몸을 뺀 김용진이었지만, 살기는 그대로 현실이 되어 그의 등을 강타했다.
퍽!
“컥!”
상당한 충격과 함께 밀려난 김용진이 재빨리 돌아서 방어 태세를 갖췄다.
그러자 바로 코앞에 선 태정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언제?’
놀라기도 잠시.
곧 흥분된 그의 음성이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놀랍군. 그런 엄청난 스피드를 숨기고 있었다니. 이러면 얘기가 달라지지. 조금은 놀아 볼 만하겠는데?”
김용진이 몸을 물리며 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에도 여전히 태정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의 내면 안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멍청한 놈, 이건 속도의 개념이 아니야. 공간을 접은 거지. 그보다 워프까지 끌어다 썼으니, 이건 무조건 걸린다. 지금이라도 막아야 돼.
[떠들어 대지만 말고 방법을 생각해라.]
=외부의 강력한 충격이 필요해. 내면을 뒤흔들 만큼의 강한 충격 말이야.
[네가 나가서 두들겨 패 보지 그러냐.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좀 더 날뛴다고 달라지겠나.]
카이저의 말에 프리지아가 한심하다는 듯 설명했다.
=바보 같은 놈, 공간 이동은 특이점 이후에 나타나는 고차원의 기술이야. 원래의 몸이라면 쉽게 제압하겠지만 지금 내 수준으론 이 인간의 옷깃도 못 스친다. 비록 제거 등급 1호는 아니지만 그 아래 랭크되어 있을 정도로 공간 이동은 성도 72좌가 극히 꺼려 하던 기술 중 하나야. 그만큼 만만하지가 않다는 소리지.
[그럼 이대로 심판을 받길 기다려야 하는 건가.]
=그러니까. 네가 제때 나갔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멍청한 고철아. 넌 지금 일을 망친 거라고.
[그 부분에 대해선 아까 충분히…….]
=‘충분히’라고? 이게 지금 그딴 소리로 무마가 될 일인 줄 알아? 성도에 이 데이터가 전송되면 우린 끝장이라고. 너야 인공지능 따위니 별 미련 없겠지만, 난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다.
[말이 좀 심하군. 나도 살고 싶은 마음은 있다.]
=꼴에 죽기는 싫은 모양이군.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주인님의 몸이 벌써 붕괴에 돌입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십 분을 버티기가 힘들 겁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곤두박질치고 있는 김용진의 신형.
가속을 받으며 떨어져 내리던 그의 몸이 한차례의 충격과 함께 멈춰 섰다.
동시에 그가 재빨리 위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태정은 그곳에 없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김용진이 그를 발견한 것은 아래쪽에서 들린 함성이 있고 나서였다.
“아랩니다! 부단장님!”
김용진의 고개가 본능적으로 밑을 향했다.
그러자 언제 들어왔는지 태정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검을 고쳐 잡은 그가 그대로 머리통을 휘갈겼다.
하지만.
슉!
또다시 허공을 가른 검과 코앞에서 나타난 태정의 신형.
마치 농락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김용진의 신형에서 금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무시하지 마라!”
위이-! 팟!
파파팟!
그의 신형으로부터 엄청난 빛이 폭사되며 사방을 금빛으로 뒤덮었다.
반경 수십 미터를 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오러 피어.
폭발형 스킬이라 코앞이라면 절대 피할 수가 없는 기술이었다.
정면에서 맞았으니 결코 무사치 못하리라.
“이 정도 거리면 염라대왕이라 해도… 아니!?”
확신에 차서 중얼거리던 김용진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폭운이 걷히며 드러난 깨끗한 밤하늘.
그보다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의 코앞에 선 멀쩡한 태정이었다.
“어, 어떻게 그걸…….”
김용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 그와 태정의 거리는 고작해야 한 자(30cm).
그 거리에서 직격을 당했으면 같은 레벨의 히든이라 해도 무사할 수가 없는 강력한 공격이었다.
한데, 박살은커녕 상처 하나 내질 못했다.
정녕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왠지 모를 두려움에 그의 몸이 떨려 왔다.
‘무슨 수를 썼는진 모르겠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이번 공격에 끝을 봐야겠어.’
결의를 다진 김용진이 다시 마나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용솟음치는 마나가 외부로 표출되며 수많은 기의 실오라기가 검으로 응집됐다.
동시에 검을 휘감는 스크루가 형성되며, 오러가 맹렬히 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소드 마스터 최후의 비기.
오러 드라이브.
지금까지 전투를 하며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던 기술이었다.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라.”
말을 끝으로 응집된 빛의 실오라기들이 직선으로 쏘아졌다.
대기가 일렁일 정도의 엄청난 기운.
동시에 자세를 고쳐 잡은 그가 심안을 전개했다.
‘10만 이상의 파괴력이 실린 오러다. 무조건 피할 수밖에 없어.’
김용진은 애초에 그가 이것을 막아 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그마치 10만.
오러가 가진 속성의 특성상 방어력 15만까지는 무난히 박살을 낼 수 있는 엄청난 파괴력이 실린 공격이었다.
이걸 막는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일.
당연히 그는 피하는 것을 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해서 심안을 전개해 미리 위치를 선점하려는 것.
하지만.
“뭐, 뭐야!?”
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빛의 스크루가 태정의 신형을 강타했다.
그 모습에 지상에서 한상진을 돌보고 있는 최다솜이 비명을 내질렀고, 직접 공격을 한 김용진조차도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예상을 벗고 그냥 냅다 쳐 맞아 버린 것이다.
오러 피어보다 공속이 훨씬 느려 당연히 피할 것이라 생각을 했건만.
이리도 허무하게 가 버릴 줄이야.
“왜 피하지 않은 거지? 설마, 그걸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어이가 없기도 잠시.
빛이 사라진 자리에 드러난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오러 드라이브를 정통으로 때려 맞은 태정이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으로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놀란 김용진의 눈이 크게 확장됐다.
시체도 남기지 못했어야 정상인 그가 어떻게 저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광경에 자연스레 몸이 떨려 왔다.
‘말도 안 돼. 피한 건가? 아니, 분명 맞았어. 직격당했다고. 한데 어떻게…….’
도무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고 있는 그때.
꿈이 아닐까 싶은 광경이 펼쳐졌다.
태정의 몸이 한차례 껌뻑이더니 이내 수십 명으로 늘어나 그를 포위해 버렸기 때문이다.
“잔상? 아냐. 이건 이미지… 도 아니잖아?”
처음 잔상이라 생각했던 그는 모습이 사라지지 않자 이미지 페어링이라 생각했다.
여러 이미지를 형성해 실체를 숨기는 마법 중의 하나.
하지만 그의 감각은 보이는 모든 태정의 모습을 전부 실체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후에 일어났다.
위이이잉-!
한차례 공명음과 함께 수십 명에 달하는 태정의 앞으로 빛의 실오라기들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이내 한 점으로 모여 크기를 불려 갔고, 이내 직경 2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체가 만들어졌다.
동시에 빛이 번쩍이며 김용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친. 이건 내…….”
사방에서 쏘아지고 있는 빛의 스크루.
조금 전 자신이 쏘아 보낸 오러 드라이브였다.
=리플렉트에 자가 복제까지 들어갔어. 이제 정말 끝이야.
[네가 저쪽으로 넘어갈 순 없나.]
=외부에서 막아 놓은 걸 이곳에서 무슨 수로 뚫어? 시리우스 놈이 직접 와도 여기선 불가능해.
[그런데 이놈은 어떻게 기어 들어간 거지?]
-편법의 부작용. 버그입니다.
[완전무결을 자랑하는 성도의 시스템이 고작 인간 하나에 구멍이 뚫리다니. 신들이란 놈들도 별 볼 일 없는 족속인가 보군.]
=이건 성도의 시스템이 뚫린 게 아니라, 시리우스가 구축해 놓은 시스템이 뚫린 거다.
[그게 그거 아닌가? 결국은 성도의 시스템을 뚫은 시리우스의 시스템이 뚫린 거니까. 얼마나 한심하게 설계가 됐으면… 나라면 이런 식으로 구멍을 만들지 않았을 거다.]
=탓해 봐야 뭐해? 이제 끝인데. 지금쯤이면 성도에서도 이 일을 알아차렸을 거야. 젠장. 모처럼 내게도 기회가 왔나 싶었는데. 다 끝났어, 다.
프리지아의 말에 제라드가 그건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아직 완전히 끝난 건 아닙니다.
=아니라니? 이 정도면 가드에 걸리고도 남았어.
-가드에 걸렸을진 몰라도 원인을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이봐 고철, 시리우스가 가드를 피해 시스템을 구축한 것까진 나도 인정을 하는 바야. 지금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드러난 이상 성도 코어의 핵으로 작동되는 가드를 막을 순 없어.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리우스의 시스템 역시 성도의 핵으로 작동됩니다.
=뭐? 그럼 놈이 코어의 핵까지 훔쳤단 말이야? 72좌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키고 있는 핵을? 놈이?
-그건 불가능합니다.
=당연히 불가능하지. 놈이 잘나 봐야 겨우 1인분일 텐데.
-하지만 꼭 코어에 존재하는 핵만이 핵은 아닙니다. 한 곳이 더 있죠.
=한 곳이 더 있다? 그런 말은 듣지 못했는데. 그곳이 어디지?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똑같이 핵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마 해독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프리지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자, 카이저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다행이라고? 바보 같은 소리. 이놈 이제 곧 죽는다. 정신력이 한계에 도달한 지 오래야. 이제 제 몸을 갉아먹을 거고, 그 마지막은 자멸이 되겠지. 너도 알겠지만 네가 차원의 경계에서 나와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다 이놈 때문이다. 이놈이 사라지면 너도 끝장이란 말이지.]
=네 걱정이나 해, 고철. 난 그나마 심판이 오기까지 버틸 수 있지만, 넌 이놈의 죽음과 동시에 소멸할 테니까.
[오. 며칠 더 살아서 기분 참 좋겠군.]
=응. 아주 좋아. 미쳐 버릴 것 같아.
[한심한 년.]
=너만 할까.
도무지 답이 없는 인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제라드는 방법을 찾기 위해 계속 생존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그렇게 100만 번 이상을 돌려 나온 태정의 생존 확률은.
‘제로 퍼센트.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