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날이 지나고 바로 금사자와의 협상이 시작됐다.
최철호의 방해가 있지 않을까 하던 생각과는 다르게, 김용진은 약속을 지켜 줬다.
뱉은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할 바엔 길드를 나가겠다는 반 협박에, 그 독한 최철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여자에 눈이 멀었다 해도 히든을 팔고 데리고 올 순 없는 일이니까.
그렇게 순조로운 탈퇴가 진행되고, 최다솜을 비롯한 그의 부관, 사제 등이 모두 차로 옮겨 탔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그보다 몸은 좀 어떤가, 그때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던데.”
“제가 몸 하나는 튼튼해서,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하긴, 그 나이 땐 아무리 큰 부상을 입어도 금방 회복을 하더군.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는데 말이야. 어쨌든 그럼 또 보세.”
협상단과 함께 별 탈 없이 길드로 복귀한 태정은 최다솜을 인사과에 데려다준 뒤, 지역대로 복귀했다.
그곳엔 두 남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최다솜의 부관이었던 이동우와 전략실 본부장의 딸 한서연이었다.
“부대장님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바쁘신 것 같아 보여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고,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동우가 90도로 허리를 숙이자 태정이 아니라는 듯 그를 일으켜 세우며 입을 열었다.
“저로 인해 일어난 일인데요. 제가 책임을 져야죠. 앞으로도 쭉 다솜이 잘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서연 씨는 여기에 어쩐 일로?”
이동우와 짧은 인사를 나눈 그가 옆에 있던 한서연을 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가지고 온 꽃을 그에게 내밀었다.
“퇴원 축하드려요. 병문안 가려고 했었는데, 근무가 있어서 못 들렸어요. 몸은 괜찮으세요?”
“네 뭐. 굳이 이리 오시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튼 고맙습니다. 꽃 참 예쁘네요.”
“저 그런데 이번에 오신 분이 대장님 여자 친구분이세요?”
“예?”
“어떻게 된 일인지 들었거든요. 금사자 때문에 갈라지셨다고…….”
“아. 이제 옛날 일입니다. 지금은 그냥 좋은 친구죠.”
“정말요?”
“네.”
“다행이다. 전 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근무가 있어서 가 보도록 할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오빠!”
세상 근심 떨쳐 버린 표정으로 그녀가 자리를 뜨고, 이후 이동우 역시 깍듯한 인사와 함께 물러갔다.
그리고 태정 역시 집무실로 들어가려는데.
한서연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다.
“오빠라… 그러고 보니 갑자기 동생들이 많아졌네. 근데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내가 생각보다 일찍 퇴원을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무실로 들어가자, 데스크에 앉아 있던 박세아가 궁금한 표정으로 일어났다.
“어떻게 되셨어요?”
“잘 마무리됐어. 최철호 그놈이 좀 방방 뛰긴 했는데, 김용진 앞에서 쪽도 못 쓰더라고. 확실히 히든이 대단하긴 한가 봐. 그만한 단체의 길드장도 빌빌거리는 걸 보면 말이야. 앞으로 묵은 감정은 잊고 길드끼리도 잘 지내보재. 서로 도울 게 있으면 돕고. 그런 게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잘됐네요.”
“어. 나도 이 정도까진 생각을 안 했는데 일이 되려는지 쉽게 풀리네. 별일 없지?”
“네. 참, 안에 청룡대주께서 와 계세요.”
“한상진이? 협상단에 끼지 말라 했더니 삐졌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한번 들어가 보세요.”
“그래. 수고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박세아의 말대로 한상진이 와 있었다.
태정을 보자마자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하는 그.
“주군, 오셨습니까.”
“그래, 밥은 먹었냐?”
“두 그릇 먹었습니다.”
“잘했어. 온 지 꽤 됐다던데, 섭섭해서 온 거야? 협상단 빼 버렸다고. 근데 그자리는…….”
“아닙니다. 그런 것 가지고 섭섭해하면 그게 어디 장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부탁드릴 게 있어서 왔습니다.”
“부탁? 편하게 해 봐.”
“저… 당분간 폐관 수련에 들어갈까 합니다.”
“폐관 수련?”
“예. 이번에 김용진과의 비무로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강호에 강자들이 많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이지 그자는 대단하더군요. 마치 하늘 위의 하늘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형님을 제대로 보필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에 이르기까지 수련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허락을 구하고자 면상을 들이밀었습니다.”
한상진의 말에 태정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무슨 염치까지야. 나도 사실 같은 생각이야. 이번에 깨달은 게 많아. 그래, 그럼 어디서 하려고?”
“레드에서 썩어 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등급을 말해 봐, 근처에 하나 마련해 줄 테니까.”
“하해와 같은 아량에 속하 감읍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연락은 돼야 하니, 며칠에 한 번씩은 나와서 전화는 꼭 확인해. 넌 이제 혼자의 몸이 아니니까.”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출퇴근할 겁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게 무슨 폐관 수련이냐며 묻고 싶었지만, 그는 그냥 수긍을 하기로 했다.
같이하자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디란 말인가.
한상진이 돌아간 뒤 태정은 매매 플랫폼에 접속해 최대한 인근 지역으로 6등급 레드 게이트 2개를 매입했다.
5등급은 이미 해 봤으니, 한 단계 더 급을 높여야 할 때.
어차피 보스 빼고는 밥이었던 게 사실이었기에, 굳이 5등급을 다시 갈 필요는 없었다.
‘그럼 나도 준비를 해 볼까.’
* * *
“시, 신호가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디스플레이 중 좌측 중단.
코드명 아포칼립스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있던 주신관의 말이었다.
그 말에 반응을 한 것은 함께 넘어온 72좌 중 하나.
북극성의 카시오페아였다.
“사라지다니? 해독이 끝났다는 건가.”
“아닙니다. 경고만 사라지고 따로 들어온 데이터는 없습니다.”
“그럼 정상이란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분명 1급 위험신호였는데. 어떻게 아무 조치도 없이 정상으로 돌아올 수가 있는 거지? 주 데이터도 살펴봤나?”
“전부 살펴봤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제 혼자 오류가 났다는 말이야?”
“그것까진 저도…….”
그의 보고에 카시오페아는 창백한 미간을 찌푸렸다.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이 뚫린 것으로도 모자라, 가드가 자체적으로 오류를 일으켰다?
이건 신의 상식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존재는 기껏해야 자신을 포함 72좌와 그 위에 선 태왕이 전부.
그마저도 성도의 핵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대부분의 권한이 박탈됐고, 개입을 하려면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 동의란 것은 단순 말로서 하는 동의가 아니었다.
신들만이 가진 성언이란 고유의 힘이 필요한데, 이것은 몸을 이루고 있는 주체나 다름없기 때문에 신들이라면 내어 주길 극히 꺼려 하는 것이었다.
즉, 이걸 사용한다는 것은 소멸의 위기 또는 성도에 거대한 위협이 닥쳤을 때나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소중한 것을 한 명도 아닌 72명 전원이 내놓아야 하는 것이니, 애초에 이 시스템에 개입을 할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제 살을 깎아 이득도 없는 일을 벌인단 말인가.
“저… 일단 다른 분들께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리면? 뭐 달라지는 게 있나?”
“예?”
“내가 탑주로 있는 이상 이곳에 문제가 있어선 안 돼. 그게 설령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말이야. 그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것들이 날 얼마나 비웃겠나. 일단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조금 더 지켜보도록 하지. 무슨 일이있으면 바로 알리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시스템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카시오페아는 다시 차를 즐기려다 멈칫하며 잔을 내려놨다.
불현듯 어떤 한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문제를 일으켰던.
그가 가장 싫어하는 존재기도 했다.
‘설마 그놈이 또…….’
불안한 생각에 미간을 좁히기도 잠시.
이내 피식 웃으며 그가 잔을 들어 올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놈은 끝난 지 옛날이건만.”
* * *
백륜산.
레드 게이트 6급 던전의 정식 명칭이었다.
여기서부터가 진정한 찐 고수들의 사냥터.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들어가면 딱 산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이를 서울에 옮겨 놓으면 용산부터 종로, 동대문과 마포를 모두 뒤덮을 정도로 굉장히 큰 규모를 자랑했다.
적정 레벨은 최소 901.
당연히 등급은 S+부터 시작이 된다.
뿐만 아니라 추천 파티 또한 2개 파티가 기본으로, 이곳에서 솔플을 한다는 건 국내 상위 랭킹에 들어간다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한동안 자료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태정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딱히 내가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거의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단순 자료만 보고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그것은 금사자에서 있었던 전투의 영향이 컸다.
태정보다 한 수 정도 위였던 총대장의 레벨이 900 중후반대.
몬스터와의 일대일 싸움에선 대부분 헌터가 우위에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문제는 가용 가능한 무기가 얼마나 되냐는 것.
태정이 이번 던전에서 쓸 수 있는 무기는 한정되어 있었다.
던전에선 봉인이 되어 사용할 수 없는 순항 핵미사일을 제외하면 대충 4개 정도.
최근에 얻은 소이탄과 기체의 주력 무기라 할 수 있는 천룡, 아이언 스피어 그리고 전략폭격기 정도였다.
모두 파괴력 4만 이상이거나 근접해 있는 무기들.
그 외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마 이레이저의 출력을 높여 쓰면 한 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까.
나머지는 2만 이하의, 딱히 의미가 없는 장비들이었다.
“폭격은 한 번밖에 쓰지 못할 거고. 소이탄도 12시간이면 하루에 한 번 정도. 결국 천룡이랑 아이언 스피어가 주력이 돼야 한다는 건데. 이거 딜이 제대로 들어갈지 모르겠네.”
다음 날.
아침 일찍 옥상에 올라 블라스터를 전개한 태정은 길드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막 속도를 높이려는데, 저 아래 지상에서 누군가 빠른 속도로 앞을 치고 나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한상진. 7시도 안 됐는데 벌써 나가나? 하긴 저도 충격이 심했겠지. 그렇게 맥없이 당했으니… 그나저나 내가 준 자료나 제대로 읽고 가는지 모르겠네. 워낙 단순한 인사라.”
따라가서 조언이라도 할까 하던 그는 이내 마음을 접고 고도를 높여 속도를 붙였다.
그라면 알아서 잘할 것이라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누굴 봐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한상진만 해도 자신보다는 레벨이 높으니까.
그걸 생각하니 다시금 각오가 다져지는 태정이었다.
‘오늘 무조건 A등급까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