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5화 (15/159)

15. 유년기(14) - #유행어

“흥흥흥.”

여느 때와 다름 없이 평화로운 오후였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먹고, 가볍게 마을을 산책을 나섰다. 산책이라고는 하지만 늘 그렇듯 아이넬 표 지게를 짊어진 상태였다. 위에는 데커드 할아버지께 갖다 드릴 간단한 음식들이 있었다.

“좋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다. 일 년 중 대부분이 안개에 싸여 있는 산맥도 오늘따라 잘 보였다.

“저기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늘 궁금한 건데, 산맥은 조금 특이했다.

일례로 지구에도 유명한 산맥들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알프스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 명승도 몇 번 가본 적이 없어서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늘 텔레비전에 나오는지라 그 생김새나 환경이 어떤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두 산맥의 특징을 꼽자면 단연 색깔이 아닐까 싶다.

알프스 산맥은 그야말로 녹색 바다처럼 우거진 숲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더불어 양치기와 함께 널따란 들판도 함께 연상되곤 한다.

반대로 히말라야는 만년설에 뒤덮여 사시사철 새하얗고, 어딘가 묵직하면서도 위압감을 뿜어낸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곧잘 공포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했고.

이렇듯 계절이나 지역에 따라 산맥의 환경도 모양도 제각각이다.

반면에 우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맥은 상당히 특이했다.

마치 알프스와 히말라야를 합쳐 놓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뿐만 아니다.

오늘처럼 유난히 날씨가 좋은 날이면 볼 수 있는 게 있다.

“하루 종일 폭우가 쏟아지는 것도 신기한데 그 옆에는 불을 뿜는 화산이라니······. 거참,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그렇다.

산맥은 각 구역 별로 나눠져 있었으며, 각각 다른 날씨와 환경으로 이뤄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저렇게 만든 것처럼 딱딱 구간이 나눠져 있었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

“대체 저게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이미 환생을 경험했고, 지금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아가 숲에는 참으로 다양한 마수가 있고, 무시무시한 마물이 살아간다. 게다가 마법 혹은 그와 비슷한 것도 떡 하니 존재한다.

놀이동산처럼 꾸미고 만든 환상의 나라가 아니라, 진짜배기 판타스틱 월드가 바로 이곳이었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는 진작 허물어진 건 당연지사요. 보는 눈과 마음도 많이 트인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래도 산맥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광경은 쉽사리 납득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긴 하네.”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한번 가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 눈으로만 봐도 그 거리와 높이가 어마어마하다.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무작정 등반하다가는 십중팔구로 불귀의 객이 되리라.

뭐, 산맥이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닐 테니 지금은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 쯤으로 남겨두는 것도 좋겠지.

“1대 이세계 불가사의라고 부르면 되려나.”

아, 불가사의라고 하니 모험심이 마구마구 샘솟는단 말이지.

근데, 불가사의니 뭐니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막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것만큼 맥이 풀리는 것도 없긴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시기가 가장 흥미로운 법이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저 산맥만큼은 진짜 불가사의 그 자체라서 더더욱 내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자극시켰다.

나는 짐짓 만화 속 주인공처럼 손을 들어 산맥을 가리켰다.

“거기 딱 기다려라, 언젠가는 진실을 밝히러 갈 테니까.”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에 괜스레 민망해져, 헛기침을 한 나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오늘은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이 찾아올지 기대하며 걷던 중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으레 그렇듯 인사를 건네려던 차였다.

“차하!”

“자하!”

뜬근없이 들려온 사람들의 외침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온몸이 휘청거렸다.

“차하? 자하? 서, 설마······.”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런 내 예상이 맞았다는 듯, 날 발견한 자하른 아저씨가 냉큼 손을 흔들었다.

“아하!”

그러자 옆에 있던 차론 아저씨가 끼어들었다.

“이럴 땐 아하가 아니라, 넬하라고 해야지!”

“어, 그런가? 그냥 이름 앞 글자만 따는 게 아니었어? 그럼 아하가 맞잖아.”

“그렇게 따지면 이름이 비슷할 때 헷갈리잖아?”

나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진지한 토론까지 벌이는 두 사람을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거 괜찮은 건가.”

나도 유행어를 자주 중얼거렸던 사람 중 하나다. 내가 외우려고 한 게 아니라 계속 듣다 보니 저절로 외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중에는 큰 의미는 없이 그저 입에 착착 감기는 말들 말들이 대다수였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유행어를 모르면 혼자 바보 취급 당하는 경우도 있어서 달달 외우는 사람들도 있었지.

한편으로는 유행어를 퍼트린 사람은 어떤 심정일까,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자, 갖다달라고 한 거 이거 맞지?”

“아, 그거 맞아! 땡큐! 아, 어제 밤에 왕건이 하나 캤는데, 이따가 저녁 같이 콜?”

“콜!”

“야야야! 대박!”

근처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대화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땡큐에 콜에 대박에 아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사실 내가 만든 말도 아니고, 그냥 평소에도 잘 쓰던 말이라 지나가는 투로 툭 뱉은 말에 불과했다.

그냥 습관처럼 나왔을 뿐인데, 그게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간 것도 모자라 일상 생활중에도 곧잘 쓰이니 신기하다고 해야 할까.

하물며 저건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나 메신저를 통해서나 주고 받던 말이다.

즉 이곳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에서 생겨난, 그마저도 신조어였으니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보나마나 파멜라가 범인이겠지.”

아무렴. 내가 아무데서나 저런 말을 쓰진 않는다.

고작 해봐야 파멜라 테트, 르네와 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한 번씩 뱉는 게 전부였다. 그마저도 감탄사처럼 짤막한 단어가 가장 많았다.

이렇듯 흘려넘겨도 될 말을 유행시키는데 가장 큰 일조를 한 사람이라면······. 역시나 파멜라가 아닐까, 라는 지극히고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르네 일지도.”

따지고 보면 내 말에 가장 집중하고, 또 가장 열심히 곱씹는 건 르네였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마따나 르네도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에이, 뭐 괜찮겠지.”

저런 간단한 유행어 정도야 크게 나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유행어 중에는 나쁜 의미도 있으니 조심은 해야겠지.”

행여나 내 입에서 이상한 단어가 튀어나온다면 이 또한 곧이곧대로 전해질 테니, 조금 더 주의하는 편히 좋겠다.

나는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몇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잡초로 우거져 너저분했던 마당은 제법 깔끔해진 상태였다. 더불어 마당의 한편에는 10평 남짓한 공터가 있었다.

두꺼운 거목을 적당한 길이로 자른 후 옆면을 깎아내 만든 테이블. 제멋대로 뻗어나간 나무 뿌리를 그대로 살려서 디자인한 의자.

데커드 할아버지에게 받은 도구가 깔끔하게 진열된 선반 등등.

저 공터야말로 나만의 작업공간이었다.

나는 지게를 주차시켜놓고 위에 얹어 놓은 바구니를 꺼냈다. 갓 구운 캬무챠에서 따끈따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외에도 먹음직스러운 열매도 함께 들어있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는데도 괜스레 입가에 침이 고인다.

나는 오두막으로 가서 데커드 할아버지를 불렀다.

“응? 조용하네.”

이제 보니 오두막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어쩐지 처음 데커드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는 진짜 죽은 사람인 줄 알고 식겁했었는데 말이야.

시시콜콜한 상념을 뒤로하고 문을 열었다.

“어? 안 계시네.”

아침 일찍부터 어딜 가셨는지, 데커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 옆을 확인했다. 역시나 있어야 할 도구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은 숲에 가셨다는 이야긴데.

“금방 오시겠지.”

테이블 위에 간식 바구니를 내려놓고는 곧장 내 작업실로 향했다. 널찍한 작업대 위에는 한창 제작중이던 물건이 놓여있었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직사각형이었고 넓이가 약 40cm쯤 되었다.

사각사각. 사포대신 숫돌을 이용해 열심히 갈았다. 조금씩 튀어나온 부분이 갈려나가며 매끄러워졌다.

이리저리 돌려보며 전체적은 모양새를 점검했다.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지.”

처음 만든 것치고는 크기도 모양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다음으로 작업대에 있던 통을 가져왔다. 안에는 시커먼 액체가 들어있었다.

이 또한 며칠 전부터 만들어놓은 액체로, 다름 아닌 천연염료였다.

사실 다른 것보다 가장 어려웠던 게 바로 이 염료였다. 지구에서야 문방구만 가더라도 쉽게 물감을 구할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직접 만들어야만 했으니까.

그나마 다큐멘터리를 통해 천연염료를 만드는 방법을 본적이 있었다.

“문제는 어떤 풀이 어떤 색깔을 내는지 모른다는 거지.”

그중에서도 단연 어려운 게 검은색이었다.

자고로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던가. 이는 데커드 할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조언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통을 가볍게 흔들었다.

액체가 찰랑이면서 바그락, 바그락, 단단한 물체가 부대끼는 소리가 났다.

“잘 됐을라나.”

나뭇가지를 젓가락처럼 써서 안에 있는 물체를 하나를 꺼냈다.

공깃돌을 만들 때처럼 마수의 이빨만 따로 모아서 둥글게 깎았다. 밤새 절여둔 덕분인지 처음의 하얀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검은 광택이 감돌았다.

“킁킁. 냄새는 별로긴 하네. 뭐, 색깔만 잘 나오면 됐지.”

나는 염료에 담가놨던 이빨들을 꺼내 그늘에 널었다.

액체만 남은 통을 작업대로 가져왔다.

“집중하자.”

나는 끝이 뾰족한 송곳니에 염료를 묻혔다. 행여 튈까 조심스레 털어내고는 기다란 자를 대고 직선을 그었다.

같은 방식으로 가로 19줄, 세로 19줄을 그었다. 어느새 나무판에는 일정한 크기 네모가 촘촘하게 새겨졌다.

이제 남은 작업은 단 하나였다.

“휴우. 오늘 안에 완성할 순 있겠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풀숲에 드러누웠다.

“크, 좋다. 놀고싶을 때 놀고, 먹고싶을 때 먹고, 눕고싶을 때 눕고. 이게 인생이고, 힐링이지.”

“흥, 꼭 세상 다 산 늙은이 같구나.”

“어, 할아버지 오셨어요?”

어느새 데커드 할아버지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네 녀석은 질리지도 않는구나.”

데커드 할아버지가 내 작업대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했다.

하기야. 이곳은 데커드 할아버지 집앞이다. 뭐, 지구처럼 땅문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엄연한 데커드 할아버지의 구역이었다.

근데, 매일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아예 작업공간까지 마련했으니 황당하리라.

근데, 말을 저렇게 해도 작업대를 만드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데커드 할아버지였다.

“그래서 대체 이건 뭘 만드는 게냐?”

“그거여? 비밀이에여.”

“흥, 보나마나 쓸데없는 걸 만들었겠지.”

데커드 할아버지가 핀잔을 던지더니 등에 짊어지고 있던 아이넬표 지게와 아이넬표 호미를 내려놨다. 심지어 할아버지의 허리춤에는 내가 심심해서 만들었던 머그컵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데커드 할아버지가 쓰는 도구 중 대다수는 메이드 바이 아이넬이었다.

전형적인 언행불일치에 웃음이 나왔다.

어디의 얼리어답터처럼 신상만 보면 하나씩 챙기시는 분께서 그런 말씀을 하셔도 전혀 믿음이 가질 않다고요.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흥.”

데커드 할아버지가 코웃음을 치더니, 내 앞에 무언가를 던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