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소년기(14) - #이제 이건 제 겁니다.
“당연하죠!”
모로 가로 서울로만 가면 된다고 했다. 마법을 발현하는 방식이 어떻든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할까.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의욕을 불태우기에는 충분했다.
“한창 의욕이 끓어올랐는데,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진을 이용한 마법은······.”
“데바들 사이에서도 질색하는 마법 중 하나지. 다룰 줄 아는 데바도 몇 없어.”
“어, 왜요?”
“왜냐고? 익히기가 매우, 매우, 매우,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롭거든.”
나야 아직 마법의 마 자도 모르는지라, 레비아 선생님의 말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래도 매우라는 단어를 거듭 말하는 걸 보면 엄청나게 어려운 모양이다.
뭐, 나한테는 남는 게 시간이다.
까짓 어려우면 될 때까지 붙잡고 늘어지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배울 생각이겠지?”
“넵!”
“후후, 그럴 줄 알았다. 자, 그럼 숙제부터 내주도록 하지.”
“숙제요?”
난데없는 암기숙제에 반문했지만, 정작 레비아 선생님이 방구석에 놓인 커다란 상자를 뒤져 무언가를 꺼내더니 내게 건넸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책이었다.
얼마 전에 금속 봤을 때도 놀라 자빠질 것 같았는데, 설마하니 책까지 볼 수 있을 줄이야.
엉겁결에 양팔을 벌려 커다란 책을 받아 들었다.
“꽤 무겁지?”
“엄청 무거워요!”
농담이 아니라 책이 어찌나 크고 두꺼웠는지, 양팔을 둘러 끌어안는 게 고작이었다.
“그게 앞으로 네가 외워야 할 언어다. 마법의 언어 또는 룬어라고도 부르지.”
“오오오.”
마법과 관련된 전문용어에 다시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일단 기본적인 룬어들은 따로 번역을 해놨으니까 외우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거야. 자, 그럼 그것부터 외우고 와.”
“네? 그냥 외우면 되는 거예요?”
레비아 선생님은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았다.
“자, 다시 시작해볼까?”
“허어, 이놈이 질리지도 않는구나. 오냐, 좋다. 방금 전과 같은 요행은 없을 테니 각오하는 게 좋을 게야.”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은 다시금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오목을 두기 시작했다.
“······.”
데커드 할아버지도 그렇고, 레비아 선생님도 그렇고, 진짜 못 말릴 사람들이네.
근데, 레비아 선생님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암기력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요.
나는 오목에 몰입하는 두 사람을 뒤로하고 집을 나섰다.
행여 넘어질까 조심조심 마당으로 나와 작업대 위에 책을 내려놨다.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푸후우우우!”
다급하게 손을 휘저어 먼지를 날려보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했던 거야?
먼지도 먼지지만, 책에서 풍기는 쿰쿰한 냄새만 맡아보더라도 꽤나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책의 상태는 말끔한 것이 특수한 가공 내지 마법으로 보존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걸 그대로 진품명품에 들고 나간다면 난리가 나겠지. 물론 마법서라는 걸 모를 테니, 그 점을 차치하더라도 귀중한 골동품 대접을 받았으리라.
그래봐야 지금은 마법 초심자인 나의 교재로 전락했지만 말이야.
“그나저나 양피지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책의 재질은 내가 흔히 알고 써왔던 종이가 아니었다.
책의 겉면은 물론, 모든 페이지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살짝 책의 표면에 적힌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죽 특유의 질감과 함께 오돌토돌한 요철이 만져졌다.
필기구 대용으로 쓰이는 염료로 글씨를 적은 게 아니라 날카로운 무언가로 파내듯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가죽으로 만든 책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기는 또 처음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음?”
가장 위에는 유달리 하얀 양피지가 끼워져있었다.
작은 글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는데, 딱 봐도 최근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아하, 내가 읽을 분량만 따로 번역을 하신 거구나.”
어쩐지.
무작정 책을 던져주고 외우라기에 조금 걱정했었는데, 내가 외워야 할 분량을 따로 준비해주신 모양이다.
“어디 보자.”
나는 잠시 책을 치워두고 레비아 선생님이 적어준 양피지를 읽었다.
서두에는 마나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큐우!
“자자, 공부하는 데 방해하면 안 되지? 이따 놀아줄 테니까, 지금은 반디랑 놀고 있어.”
호롱!
나는 칭얼거리는 큐우를 반디에게 맡겨두고, 본격적인 마법 공부에 돌입했다.
* * *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햄릿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레비아는 하릴없이 바둑돌만 만지작거리며 눈앞에 둔 바둑판을 노려봤다.
‘이런 젠장! 대체 여기서 뭘 어떻게 둬야 하는 거지?’
레비아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자, 이를 지켜보던 데커드가 비웃음을 날렸다.
“클클클, 놈. 그리 시간을 끈다고 마땅한 수가 떠오를 것 같으냐?”
데커드의 놀림에 레비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저런 알량한 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애써 데커드의 말을 무시했지만, 자꾸만 그의 비웃음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현재 전적은 22승 84패 12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밀리는 게 사실이다.’
나아가 한 가지 핑계를 더 대자면 데커드는 이미 오목을 많이 뒀던 사람이다. 반면에 레비아는 불과 며칠전에 오목을 접한 초심자였다. 즉 둘 사이에 실력 차이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레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이 대결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모든 것이 걸렸어.’
한동안 바둑판을 응시하던 레비아가 손을 뻗었다.
마치 바위를 손에 쥔 듯,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지는 바둑돌이 바둑판을 때렸다.
탁!
“호오, 수비를 하겠다는 겐가. 클클클, 얄팍한 수로군.”
데커드가 재차 비웃음을 날리더니, 바둑판에 검은돌을 올렸다.
“제, 젠장!”
장고 끝에 악수라고 했던가. 온갖 괄시와 멸시를 받아가며 장고를 뒀건만, 데커드는 너무나도 손쉽게 자신의 수를 파훼했다. 아니, 파훼한 것을 넘어 아예 모든 가능성을 닫아버렸다.
‘또······ 진 건가.’
레비아가 힐끗 테이블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평소 아끼던 술이 놓여있었다.
‘젠장. 저걸 어떻게 구한 건데.’
그렇다.
레비아가 이토록 대결에 집중했던 것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술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데커드 또한 애지중지하던 술을 걸었다.
즉 이 대결은 단순한 자존심을 넘어 보물이 걸려있는 것이다.
‘답이 없다.’
아무리 봐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레비아가 고개를 숙였다.
“졌······.”
그때였다.
“저 왔어요!”
아이넬의 등장에 레비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까 아이넬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대결이 무효가 됐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자존심은 상하지만, 술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레비아가 기대 어린 눈으로 아이넬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저, 이거 다 했어요!”
“그, 그래? 이거 참 아쉽게 됐군. 데커드 이번 대결은 무효······.”
“흥! 웃기는 소리! 어디서 감히 수작을 부리려는 게냐? 아이넬, 기다리거라. 지금 이 대결을 끝내는 게 먼저다!”
데커드가 서둘러 말리려는 찰나였다.
돌연 아이넬이 뚱한 표정을 짓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에휴, 누구를 탓하겠어요.”
뒤이어 영문을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아이넬이 그대로 흰돌 하나를 집었다.
뜬금없는 아이넬의 행동에 레비아가 서둘러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아이넬의 행동이 더 빨랐다.
탁!
“자요, 데커드 할아버지 차례에요!”
“뭐, 뭐? 설마 네, 네가 두려는 게냐?”
“네. 빨리 두세요!”
“노, 놈! 이건 반칙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크게 당황하는 데커드의 모습에 레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런 그의 상념도 잠시였다.
“레비아 선생님, 이거 제가 대신 둬도 돼요?”
“어, 어? 그, 그래라.”
얼떨결에 선수교체에 응했고, 아이넬이 헤실헤실 웃었다.
“됐죠?”
“끄응. 좋다. 내 오늘은 기필코!”
뒤이어 무언가 결심한 듯한 데커드가 다음 수를 뒀다. 그와 동시에 또 다시 아이넬이 흰돌을 던지듯 두었다.
“클클클. 놈, 이번에는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게다.”
데커드가 승리를 예견한 듯 웃었다.
이에 레비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렴. 지금 바둑판 위에 놓인 돌은 자신이 직접 두었다. 따라서 데커드가 얼마나 유리한 상황인지, 또 자신이 얼마나 우매하게 뒀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넬은 데커드의 도발에도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할아버지 그거 아세요?”
“흠? 뭘 말이냐?”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어요.”
“최고의 방어는 공격······.”
레비아는 아이넬이 한 말을 그대로 중얼거렸다.
가끔씩 아이넬은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근데, 또 그 이야기를 곱씹어보면 현기가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예전에 한 번 마주쳤던 현자처럼 진리를 꿰뚫어보는 듯한 지혜를 담고 있었다.
“흥! 어디 한번 둬보자꾸나!”
탁.
······탁.
탁.
·········탁.
탁.
············탁.
탁.
··················.
찰나간에 수차례의 공격과 방어가 이어졌다. 어째서일까.
분명히 데커드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데커드의 표정이 굳어갔거니와, 점점 더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고작 12수나 뒀을까.
아직까지도 데커드가 유리한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레비아 뒀을 때 1:9 정도로 불리했다면 지금은 얼추 3:7쯤 되어보였다.
데커드가 유리한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었으나, 어쩐지 아이넬이라면 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줄잇기가 이렇게 흥미진진한 놀이였나?’
레비아는 바둑판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어느새 땀으로 흥건해진 손을 닦았다.
이내 아이넬이 흰돌을 두었다.
‘아! 저기에 두면······.’
레비아가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넬이 둔 위치 때문이었다. 하물며 지금까지 아이넬은 엄청난 실력을 보여줬다. 마치 모든 수를 꿰뚫어보듯, 적재적소에 뒀으며 그 어떠한 군더더기도 없었다.
반면에 지금 아이넬이 둔 곳은 애매했다.
심하게 말해서 잡았던 승리를 스스로 내던지는 행위처럼 보였다.
“클클클.”
데커드 또한 아이넬의 실수라고 생각했는지, 작게 웃었다.
더불어 방금 전의 그 수로 자신감을 얻었는지, 데커드의 손놀림에 여유가 생겼다.
탁.
탁.
다시금 두 사람의 공방이 이어졌다.
‘또 저런 쓸데없는 곳에 돌을······. 후우, 이건 졌구나.’
단 한 번의 악수로 말미암아 기세가 뒤집혔건만, 아이넬은 또 다시 우를 범했다.
이제는 끝이다.
자신이 보기에는 모든 수가 막혀버렸다.
레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쳐다봤다.
그동안 아끼고 또 아꼈던 술이건만, 이제는 데커드의 배 속으로 들어가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마실 걸.’
그때였다.
“할아버지, 그거 아세요?”
“음?”
“아까 제가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잖아요.”
“그래. 기억하고 있다. 그게 뭐 어쩄다는 게냐?”
“깜빡하고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어서요.”
“음?”
“방심은 금물!”
말을 마친 아이넬이 씨익, 웃으며 흰돌을 올리며 외쳤다.
“자, 제가 이겼죠?”
“뭐?”
“뭐?”
두 사람이 동시에 아이넬을 쳐다봤다.
“쌍삼이잖아요.”
“싸, 쌍삼?”
“쌍삼······?”
데커드와 레비아가 동시에 바둑판을 쳐다봤다.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둑판의 모서리였다.
그곳에 흰돌 5개가 X자 모양으로 겹쳐져 있었다.
“이제 이 술은 제 겁니다.”
아이넬이 해맑게 웃더니 주섬주섬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챙겼다.
“······.”
“······.”
“아, 그리고 레비아 선생님이 말씀하신 거 다 외웠어요.”
아이넬의 말에 레비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 그걸 벌써 다 외웠단 말이야?”
“네! 그러니까, 빨리 다음 것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