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소년기(35) - #록시의 마음
그도 그럴게, 록시에게 있어 대장이란 단순히 상하관계를 나눌 때나 쓰이는 호칭이 아니다.
록시가 성장하기까지 돌봐줘야 할 보호자이자, 길잡이였으며, 평생을 따라야 할 우두머리다.
마치 아기 새가 어미 새를 기다리듯, 우두머리를 따르는 것은 비스테르의 습성임과 동시에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능과도 같았다.
그래서다.
아직은 어린 록시에게 대장만큼 중요한 것은 없었다.
반면에 대장은 조금 달랐다.
대장의 주변에는 항시 사람이 넘쳤고, 대장 또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으응······.”
그중에서도 가장 록시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것은 스테인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록시는 두 사람의 대화를 온전하게 이해할 순 없었으나 딱 하나 뇌리에 박힌 단어가 있었다.
“재료라고 했다. 록시 들었다.”
스테인이라는 인물은 대장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주기로 했고, 대장은 기뻐했다.
비단 스테인이 아니라 대장은 늘 버릇처럼 재료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재료. 재료. 재료······.”
과연 그 재료라는 것이 무엇인지, 록시가 홀로 끙끙거리던 중이었다.
“음? 록시 아니야?”
돌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시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 레비아 선생님이다!”
록시의 말에 레비아가 픽 웃었다.
사실 록시는 선생님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저 아이넬이 레비아 선생님이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었다.
“그나저나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거야? 아이넬은 어쩌고?”
레비아의 질문에 록시의 귀가 추우욱, 쳐졌다.
“대장 마을에 갔다. 금방 온다고 했다. 그래서 록시 기다리고 있었다.”
“하핫! 그래서 혼자 있었던 거구나. 하여간, 아이넬이 그렇게도 좋은 거야?”
“대장이 제일 좋다!”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반응이엇다.
“그래그래. 그건 그렇고, 아이넬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 계속 있으려고?”
“으음······.”
록시가 침음을 흘리자 레비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기운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뭐,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록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대체 무슨 고민인데?”
“록시도 대장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아이넬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뜬금없는 말에 레비아가 반문했다.
“응!”
록시가 힘차게 대답했다.
“하핫. 기특하네. 흐음, 아이넬이 기뻐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잠시 고민하던 레비아가 멋쩍게 웃었다.
“이런, 나도 잘 모르겠네.”
“레비아 선생님 몰라?”
“뭐, 아이넬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알아서 하는 녀석이니까. 자기가 원하는 것 정도는 금방 손에 넣을 수 있겠지.”
정정한다.
아이넬이라면 원하는 걸 만들어서라도 가져올 인물이라는 게 레비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으응?”
록시가 고개를 갸웃하자 레비아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아이넬은 록시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할걸?”
“록시가 옆에 있으면 기뻐한다?”
“응. 아이넬은 록시를 엄청 좋아하거든.”
“진짜?”
레비아의 격려에 축 처져있던 록시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럼!”
레비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나 이내 록시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응?”
“도움? 주고 싶다. 록시 매일 받는다. 록시도 주고 싶다.”
록시의 진심 어린 혼잣말에 레비아가 뺨을 긁었다.
“음······. 아이넬이 기뻐할 만한 거라면 역시 특이한 거겠지.”
“특이한 거?”
“응. 록시는 아이넬이랑 같이 장터에 갔었지?”
“응! 갔었다!”
“그때 록시가 본 아이넬은 어땠어? 되게 바쁘지 않았어?”
“바빴다! 막 걸어다녔다. 사람들이랑 인사하고, 맛있는 거 먹었다.”
“그리고?”
“구경했다. 대장이 막 우와, 우와, 했다.”
“그렇지? 아이넬은 호기심이 많거든. 그러니까, 자기가 못 봤던 걸 보면 되게 좋아하거든.”
“못 본 거 찾으면, 대장 기뻐해?”
“기뻐할 걸?”
다른 건 몰라도 호기심에 죽고 호기심에 사는 아이넬이라면 충분히 기뻐하고도 남으리라.
“그럼, 록시 찾는다! 특이한 거 찾아서, 대장 기쁘게 한다!”
“어, 록시!
레비아가 무어라 말리기도 전이었다.
록시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다다다다, 숲을 향해 뛰었다.
록시가 무작정 숲으로 들어와 숲으로 들어온 지 어언 2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록시는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뒤지며 특이한 걸 찾아다녔다.
하지만 여기에는 맹점이 있었다.
“특이한 거. 모르겠다.”
록시는 특이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게 특이하고 어떤 게 평범한 것인지 당최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순 없었다. 록시는 어떻게 해서든 대장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는 듯, 록시의 귀가 뾰족 솟았다.
“특이한 거 모른다. 그럼 다 가져간다!”
한편 이런 록시를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루나였다.
록시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사실 루나는 록시가 레비아를 만나기 이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명색이 친구다. 루나는 이미 록시에게 고민이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레비아와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아무래도 록시 혼자 뒀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남몰래 쫓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저걸 다 뽑아서 가져가려는 거야?’
어떻게 보면 참으로 록시다운 행동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휴우.”
루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폴짝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진짜로 그걸 다 가져갈 생각이야?”
눈에 보이는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담던 록시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아! 루나다! 이거 다 가져간다! 대장 줄 거다!”
“······.”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 마디를 삼킨 루나가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록시가 그랬듯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린 풀과 꽃을 줍기 시작했다.
“어, 루나도 대장한테 줄 거야?”
“그런 거 아니니까, 줍기나 해. 잠깐, 그건 그냥 잡초니까 버리고!”
* * *
마을에서 볼일을 마친 나는 곧바로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어?”
어쩐지 주변이 조용하다. 하물며 내가 오면 늘 마중부터 나오던 록시도 보이지 않았다.
“아, 선생님!”
“음? 아, 아이넬 왔구나. 그래, 볼일은 다 봤고?”
“네. 이제 간단하게 마무리 작업만 하면 끝나요. 근데, 록시랑 루나는요?”
“아아, 둘? 글쎄. 아까 뭐 찾을 게 있다면서 숲으로 가던데?”
“그래요?”
뭘 찾으러 갔다는 거지?
뭐, 오히려 잘됐네.
나는 두 비스테르가 오기 전까지 마무리 작업을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나.”
약 1시간에 걸쳐 작업에 몰두한 나는 마침내 완성된 결과물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늦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내 입에서 언급되기가 무섭게 록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장!”
“어, 왔······ 엉?”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록시가 아닌 웬 덩어리였다.
자세히 보니 온갖 풀들을 뭉쳐놓은 게 꼭 마리모를 연상케 했다.
“대장! 안 보인다!”
“록시야?”
“록시 여기 있다! 대장 안 보······앗!”
뒤뚱뒤뚱. 내 쪽으로 다가오던 마리모가 벌러덩 넘어졌다. 그와 동시에 뭉쳐 있던 풀이 사방으로 흩날리며 그 속에 파묻혀 있던 록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서둘러 록시를 부축했다.
“괜찮아?”
몸에 붙은 온갖 풀과 꽃잎을 털며 묻자 록시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아! 록시 괜찮다! 아픈 거 없다!”
“다행이네. 근데, 대체 이건 다 뭐야?”
나는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풀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대장한테 줄 거다!”
“나한테?”
“응! 록시 맨날 받았다! 그러니까, 록시도 대장한테 주고 싶다!”
“나한테?”
“응! 레비아 선생님이 말했다. 대장은 특이한 거 좋다 한다. 근데 록시······ 특이한 거 모른다. 그래서 다 가져왔다.”
“아!”
그랬구나.
아까 록시와 루나가 숲으로 갔다고 레비아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그럼 이제껏 나한테 줄 것들을 모아왔다는 거야?
조막만 한 손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모았을 걸 떠올리니 코끝이 시큰해졌다.
“헤헤! 대장 기뻐?”
“그럼! 당연히 기쁘지!”
나는 록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고마워.”
“헤헤.”
“록시가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까, 나도 줘야겠네.”
“선물?”
나는 방금 전 마무리 작업을 끝낸 것을 가져왔다.
“루나도 이쪽으로 와볼래?”
내가 부르자 나무 위에 앉아있던 루나가 폴짝, 뛰어내렸다.
나는 두 비스테르에게 특별히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이건 뭐야?
“앞으로 록시랑 루나가 입을 옷이야.”
“옷?”
그렇다.
오늘 내가 만든 건 록시와 루나에게 입힐 옷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두 비스테르는 내 옷을 입고 생활했는데, 그마저도 옷이 조금 커서 불편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나저나 옷도 아무나 만드는 게 아니라니까. 옷을 만드는 건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들어보니 보통 일이 아니더라.
본래는 장터로 가기 전이 완성시킬 계획이었는데, 완성은커녕 이 두벌의 옷을 만드는데 일수로는 5일. 시간으로는 얼추 18시간은 걸린 것 같았다.
“자, 가서 입고 와.”
“응!”
“응.”
나는 두 비스테르가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수북하게 쌓인 풀을 살펴봤다.
“진짜 많이도 가져왔네.”
가져온 것도 가져온 건데, 이걸 들고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게 더 용했다.
호오, 록시랑 루나도 채집에 재능이 있나 보네. 비록 잡초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긴 했지만, 드문드문 제법 구하기 힘든 약초나 허브들도 섞여있었다.
“뭐, 전부 다 잡초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두 비스테르가 오로지 나를 위해 숲으로 갔고, 이 많은 것들을 짊어지고 왔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기에는 차고 넘쳤다.
“후후후.”
아이는 고사하고 결혼조차 못 해본 내가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지금 내 마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귀여운 딸들을 둔 아빠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나 홀로 웃고 있자니, 록시와 루나가 돌아왔다.
“이야, 잘 어울리네!”
나는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내가 만든 옷은 지구에서 자주 입는 티셔츠와 바지를 그대로 따서 만들었다.
언뜻 현대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었는데, 근데 또 그 재질이 가죽이라서 그런지 이질적인 느낌은커녕 두 아이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이대로 사진을 찍으면 화보가 따로 없겠는데.
“어때?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어?
“응! 편하다! 록시 꼬리도 편하다!”
록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대답했다.
“응. 편해.”
혹시 사이즈가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잘 맞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다행이네. 자, 마지막으로 이걸 걸치면······.”
나는 두 사람에게 각각 라빗트의 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걸쳐줬다.
“완벽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