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소년기(39) - #아니, 이걸 반디가?
엉겁결에 록시를 따라간 나는 멍하니 밭을 쳐다봤다.
“어?”
분명히 나와 록시가 씨앗을 뿌린 지 길어봐야 3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씨앗이 삐쭉삐쭉하다!”
“그러게.”
록시의 말대로였다.
밭에는 새싹들이 삐쭉삐쭉 올라와 있었다. 그 높이는 얼추 내 복숭아뼈에 닿을 정도였다.
싱그럽다고 해야 할까.
전문가는 아닐지라도 새싹들이 생기를 잔뜩 머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신기하네.”
솔직히 나는 씨앗들이 금세 자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애당초 제대로 된 농사법도 아니었거니와 실험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빠른 속도로 그것도 건강하게 자라난 새싹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러지?”
혹시 이곳의 씨앗은 지구랑은 다르게 빠르게 자라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지나치게 빠른 거 같은데.
조심스레 새싹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밭의 어느 한 지점에서 은은한 녹색 빛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저건······ 반디?”
아니나 다를까.
호롱!
내 목소리를 들은 반디가 슬그머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설마, 새싹이 이렇게 빨리 자란 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의문형이었지만, 내심 확신할 수 있었다.
아무렴.
나도 틈틈이 숲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채집하고 다닌다.
이곳이 다른 세계고, 이제껏 보지 못한 식물들이 많았지만, 그건 품종이 다를 뿐이지. 식물이라는 점에서는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이 씨앗들이 이렇게나 빨리 발아하게 된 것은 어떠한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었지 그 원인은 알 수가 없었는데······ 이제 보니 반디가 무언가를 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반디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어딘가 힘이 없어 보인달까.
“혹시 이걸 자라게 해서 그런 거야?”
호롱!
반디가 느릿느릿 원을 그렸다.
역시나 이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 힘을 쓴 모양이다.
설마하니 반디한테 이런 엄청난 능력이 있을 줄이야.
얼마 후면 반디와 알게 된 지도 9년 차에 접어드는데 모르고 있었네.
하기야, 내가 직접적으로 씨앗을 심은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주지 못했다고 봐야겠지.
더불어 반디의 상태를 보아하니 씨앗을 틔우기 위해서 많은 힘을 소모한 것 같았다.
“고마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반디의 능력이 엄청나다는 건 확실하다. 아예 수확을 시기를 앞당겨버리니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꿈과도 같은 능력이리라.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씨앗을 빨리 틔우는 것보다 반디가 훨씬 더 중요하다.
만약 이 힘을 사용함으로 인해 반디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그거야말로 본말전도였다.
나는 지쳐 보이는 반디를 조심스레 안아 머리에 얹었다.
“대장!”
조금 떨어져 새싹을 살펴보고 있던 록시가 우다다, 달려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씨앗이 더 삐쭉삐쭉 해졌다!”
나는 웃으며 록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큰일······이긴 한데,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걱정 안 해도 된다?”
“응. 이 씨앗들은 록시가 잘 보살펴서 무럭무럭 자란 거야.”
“무럭무럭 자랐다! 록시 매일 인사했다!”
그러고 보면 록시는 씨앗을 심은 후로 늘 이곳에 찾아오곤 했었지.
내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늘 텃밭에서 자리를 지키며 씨앗들을 지켜봤다. 물론 반디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지만, 록시의 보살핌도 주요했으리라. 게다가 씨앗이 변화를 이렇게 빨리 눈치챌 수 있었던 것 또한 록시의 부지런함 덕분이었고.
* * *
“흐아아아!”
루나가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완연한 밤임을 증명하듯 노오란 달이 떠올라 지상을 비추고 있었다.
루나가 오두막을 힐끗 쳐다봤다.
“클클클! 놈, 이번에는 내 승리가 확실하다.”
“아직 승부는 끝난 게 아니라고, 친구.”
“흥, 승부가 끝나지 않아? 방어하기 급급한 주제에 말은 잘하는구나.”
“이보게, 데커드. 자네는 아이넬이 했던 말을 잊었나?”
“흠?”
“방심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라는 거야!”
“헛!”
은은한 불로 밝혀진 공터에서는 데커드와 레비아의 내기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다만 지금 하는 게임은 오목이 아니었다.
얼마 전에 아이넬이 새로운 놀이라면서 뭔가를 가져왔다.
다름 아닌 장기였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을 먹으면 질리기 마련이다. 게다가 하루에 반나절을 오목만 두고 있으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 지경일 터.
두 사람은 아이넬이 새로 준비한 놀이도구를 보자마자 눈에 불을 켜며 달려들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처음 오목을 접했을 때처럼 밤새 장기를 두기 시작했다.
굵직한 나뭇가지 위에 누워 두 사람이 장기를 두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저게 뭐가 재미있다는 걸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 굉장히 신나 보였지만, 정작 루나가 보기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놀이였다.
이내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둔 루나가 몸을 일으키더니, 숲으로 향했다.
달빛조차 가려진 숲속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오늘은 뭘 잡을까.’
루나가 특유의 샛노란 눈동자를 빛내며 숲을 응시한다.
뾰족 솟은 귀가 움찔거리며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사냥감들을 찾아냈다.
최근 루나에게 생긴 취미는 사냥이었다.
따지고 보면 캣시 부족에게 있어서 루나는 사냥이 곧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두 비스테르가 지내던 은신처 주변에는 이렇다 할 사냥감이 없었거니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본능을 억눌러왔다.
그러나 아이넬을 따라온 이후로는 바뀌었다.
아직 자신을 속박하는 저주가 풀렸는지도 모를지언정 두려움은 많이 옅어진 것이다.
‘찾았다.’
숨을 죽인 채 사냥감을 탐색하던 루나가 재빨리 몸을 날렸다. 빠른 속도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숲을 달려가던 중이었다.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한 루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이다.’
후드로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인간임이 확실했다.
‘인간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루나가 알기로 인간은 숲에 잘 돌아다니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처럼 늦은 시간이라면 아예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의 정체는 도리아였다.
모두가 잠들었어야 할 시각에 그녀가 숲으로 나온 이유는 하나였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해.’
도리아는 촌장 대리로써 마을을 지키고 사람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그녀는 과거 떠돌이 생활을 경험했다.
밥을 굶는 것은 일상이었고, 늘 차가운 이슬비를 맞으며 잠을 자야만 했다.
비록 어린 시절에 잠깐 겪었을 뿐이지만 그때 고생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무엇보다.
도리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있었다.
‘마을을 지켜야 해.’
매일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한 장소에 정착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도리아 또한 어린 나이임에도 사람들을 도와 나무를 자르고 집을 지었다.
힘들고 고된 일이지만 그 누구도 궂은소리 하나 없이 맡은 일을 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터전과 앞으로 지내게 될 집을 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리며 웃었다.
그렇게 하나, 둘 집이 생겨나고 길이 생겨나더니 어느샌가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마을이 생겨났다.
‘우리의 마을을 잃을 순 없어.’
힘들게 얻은 자신들의 안식처를 잃는 것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숲을 떠도는 것도 원치 않았다.
‘어쩌면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
이는 도리아만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으며 뚜렷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랬기에 도리아는 조금 더 지켜보자는 견해를 고수해왔다.
문제는 이런 도리아의 입장에 반대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난다면, 자신의 만류조차 통하지 않으리라.
“하아, 하아······.”
도리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끊임없이 걸음을 옮겼다.
새벽 특유의 쌀쌀한 밤공기에 어깨가 움츠러들고, 입에서는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마침내 도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 있었다.
도리아가 결계 너머를 응시했다.
“······.”
늘 채집을 하면서 왔던 장소이자, 늘 봤던 풍경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도 스산했다.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결계를 넘어가는 그 순간부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부디 마을 사람들에게 무궁한 안전과 번영의 축복을.’
진심 어린 기도를 마지막으로 입술을 질끈 깨문 도리아가 결계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늘 그렇듯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온 나는 공터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건 다 뭐야?”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마수의 사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심지어 우는 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만든다는 크래그 보어까지 있었다.
“식량이야.”
“어, 루나구나. 잠깐만, 식량이라고?”
“응. 어제 많이 잡았다.”
루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건 많이 잡은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데.”
진짜 농담이 아니라 우리 마을 사람들 전체가 모여서 배 터지게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나저나 매일 이렇게 식량을 구해오는 걸 보면 루나도 참 부지런하다니까.
“고생했어.”
나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웃!”
아직 내 손길이 어색했는지 루나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목을 움츠렸다.
“대장이다! 대장! 록시도!”
“그래, 그래.”
나는 양손으로 두 비스테르를 쓰다듬어줬다.
“자, 그럼 밭부터 확인해볼까?”
“응! 씨앗 더 많이 자랐다!”
나는 록시와 함께 밭으로 향했다.
“이야, 록시랑 거의 비슷하겠는데.”
반디가 부린 요술의 효과가 아직도 남아있었는지 씨앗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심지어 몇몇 작물에서는 열매까지 달려 있었다.
나는 가장 외곽에 자란 밭으로 향했다.
얇은 줄기 위에는 애벌레처럼 생긴 열매가 달려있는 게 이 정도면 거의 다 자란 것 같았다.
조심스레 만져보자 딱딱하면서도 둥그런 알맹이가 잡혔다.
어쩐지.
어딘가 생김새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딱 봐도 콩인 것 같았다.
“콩이라니 진짜 잘됐다.”
뮐도 좋지만 콩도 진짜 그 용도가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대가 되는 건 바로 장이었다.
된장, 간장, 고추장 등등.
맛도 맛이지만 한식이든 중식이든 양식이든 가릴 것 없이 다 사용할 수 있거니와, 환생한 뒤로 심심해하던 내 미뢰에 자극을 주기에 딱 좋은 재료들이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장을 담그는 걸 도운 적이 있어서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이 정도의 속도면 며칠 내로 수확을 할 수도 있겠는데.”
“수확? 수확이 뭐야?”
“음, 수확이라는 건 이제 다 자라서 먹을 때가 됐다는 거야.”
“우와아!”
먹는다는 말에 록시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기뻐했다.
“이제 남은 건 다음 단계인데.”
일단 마을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이 농사라는,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문명을 어떻게 전파하느냐가 문제였다.
“그 방법이 최고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