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66화 (64/159)

66. 소년기(48) - #선언!

“어디 보자…….”

나는 차근차근 기억을 훑었다.

생활필수품이라고 한다면 뭐가 있을까.

지구에서 살았을 때 생활필수품을 떠올려보자면 그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다.

뿐만아니다.

거실이나 주방 욕실 등등.

각 장소에 따라 구비해야 할 물품들이 다르다.

근데, 따지고 보면 필수라고 보기에 애매한 물건들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단 말이지.

거기다 내가 가장 자주 썼던 생활필수품의 열에 아홉은 일회용이다.

이쑤시개나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지.”

일회용품이 쓰고 버리기는 참 쉽지만 정작 그것들을 만들고 유통하는 과정은 굉장히 어렵고 복잡했다.

하물며 이곳에는 공장은커녕 자동화 기계 하나 없다.

즉 손으로 일일이 만들어야만 한다는 건데…….

한 번 쓰고 버리는 이쑤시개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터.

일회용품은 일단 패스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일단 범위를 좁히는 게 좋겠지.”

엄마한테 가장 필요한 게 뭘까?

아빠한테 가장 필요한 건 또 뭘까?

그 밖에도 내가 아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떠올리면서 각각 필요하다 싶은 것들 혹은 필요해 보이는 것들을 적었다.

“음……. 이걸로 뭔가 부족하단 말이지.”

사실 마을 사람들한테 필요한 생활필수품 정도는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문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었다.

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모르는 만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뒤면 장터가 열린다.

그때 가서 설문 조사를 해보는 것도 괜찮겠는데.

그래, 자고로 모르면 직접 물어보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저, 스승님?”

한창 부품을 조립하던 스테인 씨가 날 불렀다.

스승이라는 호칭은 어디까지나 올룸스 씨의 압박을 벗어나겠답시고 던진 말이다.

나도 그걸 알기에 스승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도, 스테인 씨는 굳이 저 호칭을 고수했다.

게다가 말투 또한 한층 정중해졌다.

뭐, 본인이 편하다는데 별수 있나.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었다.

“왜요?”

“그 글자는 대체 뭡니까?”

스테인 씨가 양피지에 적힌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한글이요.”

이곳에도 글자가 있긴 한데, 나는 평소에 한국어를 자주 애용한다.

아무래도 30년을 넘게 써왔으니 한글이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곳의 문자는 지구에서도 고릿적에나 쓰이던 쐐기문자와 그 형태가 비슷하다.

빠르게 적는다고 날림으로 쓰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익숙함에 이어 축약이 쉽기에 이렇게 무언가를 적을 땐 한글을 애용하는 편이다.

“한글이라……. 혹시 인간들이 사용하는 언어입니까?”

“그건……. 뭐,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네요.”

나는 어물쩍 인정하고 넘겼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나밖엔 없지만, 이걸 일일이 설명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내 설명이 끝났음에도 스테인 씨는 양피지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했다.

“가르쳐 드릴까요?”

“그, 그래도 됩니까?”

“당장은 힘들 것 같고…….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따로 알려드릴게요.”

사실 언어 공부의 반 이상은 단순 암기였으니 교재라도 하나 만들어서 주면 되겠지.

“감사합니다, 스승님!”

“뭘요. 그나저나, 벌써 20대나 만들었네요.”

나는 공방의 한쪽에 가지런히 정렬된 냉장고를 보며 말했다.

얼마 전 올룸스 씨가 이곳에 방문했던 뒤로도 꾸준하게 냉장고를 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1대를 만드는 것도 벅찼으나, 이제는 나름 요령이 생겼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3대까지 뚝딱 만들어내더라.

“이 정도 속도면 스승님이 말씀했던 날까지는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한까지는 얼추 2주쯤 남았으려나.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 아니니까 무리는 하지 말고요.”

“예!”

“그리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집으로 가시는 겁니까?”

“네. 오늘 약속이 있거든요! 스테인 씨도 쉬엄쉬엄하세요!”

나는 스테인 씨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로 향했다.

* * *

금세 마을에 도착한 나는 곧장 약속장소로 향했다.

“엄마!”

“아, 넬 왔구나.”

그곳에는 엄마와 아빠도 함께였다.

더불어 내 주변에는 인파로 북적거렸는데, 딱 봐도 마을 사람들의 99%는 참석한 것 같았다.

오늘 이렇게 모두가 모이게 된 건 도리아 아주머니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전달사항이 있으니 모두 참석해 줄것을 부탁했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특히 도리아 아주머니는 나를 따로 찾아오셔서 꼭 참석해줬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셨다.

그도 그럴 게, 오늘 사람들에게 발표할 주제는 나와 관련이 있었으니까.

내 옆에서 도리아 아주머니를 지켜보던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요즘 도리아 아주머니께 좋은 일이라도 있나 봐요.”

엄마의 말에 아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어제도 잠깐 뵀는데, 평소랑은 조금 다르시더라고.”

“다르셨다고요?”

“응. 어제도 사냥꾼 회의가 있었거든. 당신도 알지? 크로든 형님 말이야.”

크로든 아저씨라면 마을에서도 가장 사냥술이 뛰어난 사람이자 사냥꾼들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아울러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는 도리아 아주머니와 정면으로 대치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어제도 크로든 형님은 도리아 아주머니의 의견에 반대했거든. 그날은 작정하고 오셨는지 언성까지 높이시더군.”

“그랬어요?”

“응. 옆에서 보고 있는데 내 등골이 다 서늘해지더라니까.”

하기야.

나도 크로든 아저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벌한 게 잘 벼려진 칼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크로든 아저씨와 눈도 못 마주치리라.

그나저나 크로든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 거로 봐선 오늘은 참석하지 않은 모양이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조금 밀렸는데, 어제는 완전히 다르시던데?”

“완전히 달랐다고요?”

“응. 평소라면 도리아 아주머니가 조금 밀리는데, 그날은 다르더라고. 도리아 아주머니가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뭐라고 하셨는데요?”

호기심이 동한 엄마의 질문에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닥치세요, 라고 하셨지. 나도 놀랐는데, 크로든 형님은 오죽했겠어? 형님이 당황하는 게 보이더라고.”

“네? 도리아 아주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엄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평소 도리아 아주머니의 언행이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매일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는 것도 피곤한 마당이다.

거기다 툭 하면 자신을 압박하고 나서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지금까지 꾹 참았던 게 용하다고 해야겠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도리아 아주머니가 자신의 의견을 말할 정도의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니까.

“응. 그렇게 말씀하셨어. 크로든 형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속이 시원하더라고.”

아빠는 그때 생각이 났는지 후후, 웃었다.

이윽고 도리아 아주머니와 촌장님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모두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네.”

촌장님과 도리아 아주머니가 가볍게 묵례하여 감사를 표했다.

“오늘 모두에게 모여달라고 부탁한 것은 몇 가지 전달하고 싶은 게 있어서라네.”

말을 마친 촌장님이 뒤로 물러났다. 이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표정이 딱딱한 게 상당히 긴장하신 듯했다.

이내 도리아 아주머니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아 살짝 고개를 주억였다. 이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살포시 미소를 짓더니, 마을 사람들을 쳐다봤다.

“근래에는 숲이 심상치가 않다는 건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상각해요. 마수가 줄어 사냥도 힘들고, 채집할 수 있는 작물도 많이 줄었죠.”

잠시 말을 멈춘 도리아 아주머니가 숲을 쳐다봤다.

“하루라도 빨리 이 상황이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한 남자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이렇게 틀어박혀 있을 게 아니라 사냥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쇳소리가 섞인 음성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크로든 아저씨였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온몸에는 사냥도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아까부터 모습이 안 보이길래 참석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구석에 숨어서 등장할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모양이다.

갑작스러운 크로든 아저씨의 난입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런 상황을 노렸던 걸까. 아주 찰나 간이었으나 크로든 아저씨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보였다.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이러다간 우리 모두 굶어 죽습니다. 촌장님도 그걸 잘 아실 거 아닙니까?”

크로든 아저씨의 시선이 촌장님께로 향했다.

지금 단상에서 발표하는 사람은 도리아 아주머니다. 그럼에도 촌장님을 쳐다본다는 것은 명백한 무시이자 도발이었다.

“촌장님, 말씀해보십쇼!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합니까? 촌장님은 우리가 미덥지 않습니까? 나, 크로든! 평생을 숲에서 살아왔고, 마수를 사냥했습니다!”

마치 꾸짖는 듯한 눈빛과 말투였다.

“크로든! 자네…….”

결국 참다못한 촌장님이 앞으로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이 더 빨랐다.

“크로든 씨의 말이 맞아요.”

“음?”

자신의 말에 동조하는 게 의외였던 걸까. 크로든 아저씨가 묘한 시선으로 도리아 아주머니를 쳐다봤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가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건 저도 동의해요.”

이에 크로든 아저씨가 눈을 빛내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바로 사냥……!”

“그래서 오늘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해요.”

크로든 아저씨는 자신의 말이 끊는 도리아 아주머니를 보며 얼굴을 구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은 이어졌다.

“우리는 앞으로 농사를 지을 겁니다.”

다소 파격적인 선언에 또다시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그중에서도 크로든 아저씨의 반응이 단연 컸다.

“농사를 짓는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왜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농사가 쉬운 줄 아십니까? 그리고 농사를 짓는다 쳐도,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기르겠다는 겁니까?”

“그럼 반대로 제가 물을게요. 대체 어디서 뭘 어떻게 기를지 안다면 저와 함께 농사를 지으시겠어요?”

도리아 아주머니의 도말에 크로든 아저씨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하! 좋소이다! 어디 한번 봅시다!”

보아하니 도리아 아주머니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좋아요. 직접 보여드리죠.”

도리아 아주머니가 태연한 얼굴로 촌장님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자 촌장님이 서둘러 손짓했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 들려있었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바구니를 가린 가죽을 치웠다.

바구니 안에는 여러 작물이 수북하게 들어있었다.

“저게 뭐지?”

“그러게요. 되게 작은 씨앗 같은데……. 저게 대체 뭘까요?”

아빠와 엄마가 바구니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단 두 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렇다.

저것은 얼마 전 우리가 밭에서 수확한 곡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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