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67화 (65/159)

67. 소년기(49) - #헤파이토와의 만남

“얼마 전 저는 이 작물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답니다.”

도리아 아주머니의 시선이 잠시 내게 머물렀다가 마을 사람들을 거쳤다.

“우리는 이 작물들로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크로든 씨, 저와 함께 농사를 지어주시겠어요?”

시선의 종착지는 크로든 아저씨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리자 크로든 아저씨가 크게 당황했다.

“그······.”

“크로든 씨가 우리 마을을 그 누구보다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걸 저는 알아요. 그러니까,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사냥을 나서려고 한 거겠죠?”

도리아 아주머니가 달래듯 말하자, 크로든 아저씨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졌습니다.”

결국 크로든 아저씨가 패배를 선언했다.

“좋습니다. 나, 크로든. 한 번 뱉은 말은 지킵니다. 농사든 뭐든 돕겠습니다.”

말을 마친 크로든 아저씨가 터벅터벅, 인파를 빠져나가서는 조금 떨어진 나무에 기대어 섰다.

팔짱을 낀 모습이 기분이 상한 사람 같았으나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패배를 선언했던 순간 그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처럼 개운해 보이는 미소였다.

역시 도리아 아주머니 말씀이 정답이었다.

크로든 아저씨도 우리 마을을 그 누구보다 걱정하고 아끼는 사람이다.

단지 표현의 방식이 조금 거칠었을 뿐이다.

애당초 마을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았겠지.

나아가 사냥도구를 다 챙겨왔다는 건 위험을 무릅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리라.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크로든 아저씨도 납득해준 것 같아서 다행이다.

“고마워요. 앞으로 크로든 씨의 역할이 클 테니, 잘 부탁드려요.”

도리아 아주머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조금 더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내 도리아 아주머니가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가지 더 전달하고 싶은 게 있어요. 앞으로 우리 마을에서는······.”

잠시 말을 멈춘 도리아 아주머니가 양손을 맞잡았다.

“파메르 님을 모시기로 했습니다.”

“헉!”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에 나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어머, 넬 갑자기 왜 그러니?”

엄마가 걱정스레 물으며 내 등을 어루만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파메르? 그건 누구입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아까보다 더욱더 환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모셔야 할 분이랍니다.”

지금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은 파메르를 국교로 삼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별생각 없이 던진 그 한마디가 이렇게 커지게 될 줄이야.

이래서 옛 성현들께서는 입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던 거겠지.

“파메르 님은 제가 작물을 찾을 수 있게끔 인도해주셨고, 소중한 인연을 만날 수 있게끔 다리를 놓아주셨어요.”

도리아 아주머니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시선에는 진심 어린 감사가 담겨있었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 파메르는 그냥 내가 마음대로 지어낸 이름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건 내가 땅에 묻히는 그날까지 아니, 어쩌면 죽고 난 뒤로도 잘 밀봉해서 가슴속에 묻어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애써 잡념을 떨쳐낸 나는 이어지는 도리아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농사도 농사지만 이제부터 말할 내용이 본방송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만난 인연을 함께 나누고 싶어요.”

인연을 나누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인연이란 록시와 루나를 말하는 거겠지.

아니나 다를까.

“아주 작고 귀여운 아이들이랍니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몸을 돌리더니 아까 바구니를 들고 왔던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도리아 아주머니가 다가오자 어깨를 움찔거렸다.

이윽고 도리아 아주머니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치웠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둘의 정체는 다름 아닌 록시와 루나였다.

“아!”

“저, 저건 뭐야?”

“인간······이 아니잖아?”

역시나 사람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신기함에 눈을 빛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놀라서 옆 사람을 냅다 껴안는 사람도 있었다.

“다들 진정하세요. 자, 두 사람 이쪽으로 와주겠니?”

도리아 아주머니의 말에 록시와 루나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섰다.

“안녕! 나는 록시다! 만나서 반갑다!”

역시 록시였다.

그녀는 언제 긴장했냐는 듯 힘차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루나입니다.”

이어서 루나 또한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귀엽다.”

“어쩜! 저 꼬리 좀 봐! 푹신해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도리아 아주머니가 손을 들어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이 두 아이는 인간이 아니랍니다. 비스테르라고 해요. 우리와 함께 산맥에서 살아가는 종족이에요. 앞으로는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친구가 되어줄 종족이기도 하지요.”

“록시 친구다! 잘 지낸다!”

록시의 외침에 몇몇 사람들이 웃었다.

“농사와 파메르 님. 그리고 우리에게 새롭게 생긴 친구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축제를 열기로 했답니다!”

* * *

며칠 뒤, 장터에 온 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즉석 설문조사를 펼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찾은 이는 레자드인 모쿠 씨였다.

늘 그렇듯 날 보자마자 달려온 모쿠 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나는 곧바로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케륵, 생활필수품?”

“네. 평소에 자주 쓰는 도구 같은 거요.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 라든가?”

“케륵······.”

내 말에 모쿠 씨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내 질문이 너무 어려웠나?

“조금 더 쉽게 얘기하자면······.”

나는 운을 떼면서 모쿠 씨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전신에는 짙은 녹색의 비늘로 덮여있었다.

얇고 뾰족한 손가락 끝에는 까만 손톱이 달려있었고, 기다란 입에는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외적인 특징은 이 정도였고······.

아, 그러고 보니 모쿠 씨는 늪지대에서 생활한다고 들었다.

“씻을 때 필요한 물건이라든가?”

“맞다! 케륵, 레자드는 늘 늪지대에서 살지. 케륵, 우리는 씻는 게 불편하다.”

“씻는 게 불편하다?”

“맞다. 케륵, 우리는 깨끗한 걸 좋아한다. 케륵, 하지만 비늘 사이에 낀 때는 잘 벗겨지질 않는다.”

모쿠 씨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비늘 사이사이에는 마른 진흙은 물론, 물때가 끼어있었다.

“씻는 게 불편하다······. 그럼 때밀이 수건이나 솔 같은 게 있으면 되겠고······.”

나는 모쿠 씨의 이야기를 양피지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또 뭐 있어요? 불편한 것도 괜찮아요.”

“케륵, 우리는 이빨이 약하다.”

“이빨도 약하고······. 또?”

나는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며 모쿠 씨에게 필요하다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기록했다.

“이 정도면 됐어요. 고마워요.”

“케륵, 고마운 건 나다. 이런 거라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아, 그리고!”

모쿠 씨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케륵, 아이넬을 초대하고 싶다.”

“초대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반문하자 모쿠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넬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 케륵, 우리 집에 초대해서 대접하고 싶다.”

“대접해주신다면야 저야 고맙죠! 아, 그렇지!”

내가 도리아 아주머니와 축제에 대해 얘기를 할 때, 다른 종족을 초대해도 되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록시와 루나를 만난 뒤인지라 도리아 아주머니는 흔쾌히 승낙하셨고, 그것이 록시와 루나의 소개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도리아 아주머니는 혹시 또 다른 종족을 만나게 되면 언제라도 좋으니 소개해 달라는 말도 하셨다.

이참에 아예 다른 종족들도 다 초대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말이지.

“사실 저희 마을에서 축제가 열리거든요.”

“케륵, 축제?”

“네! 이참에 축제에 참여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아, 꼭 참여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너무 부담가질 건 없어요.”

“케륵, 섭섭한 말 마라. 아이넬의 마을에서 열리는 축제라면 당연히 간다! 케륵, 축제는 언제 열리나?”

모쿠 씨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는 투로 말했다.

“늦어도 한 달 안에는 열릴 것 같아요. 그럼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드릴게요.”

“케륵, 혹시 가족을 데리고 가도 괜찮나?”

“그럼요! 가족이든, 친구든 다 데려오셔도 돼요.”

“알겠다. 그럼 날짜가 정해지면 케륵, 알려줘라!”

“알겠습니다!”

모쿠 씨와 헤어진 뒤로도 나는 장터를 돌아다니며 설문조사를 이어나갔다.

더불어 축제에 대해서도 얘기했는데, 고맙게도 모두들 축제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 *

부지런하게 장터를 돌고 찾은 곳은 역시나 스테인 씨의 공방이었다.

“음?”

지금이면 늘 공방에서 도구를 만들고 있어야 할 스테인 씨가 바깥을 서성이고 있었다.

연신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적잖이 긴장한 듯한 모습이었다.

“스테인 씨는 거기서 뭐 하고 있어요?”

“아, 스승님!”

내가 말을 걸자 스테인 씨가 냉큼 달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 그게······. 오셨습니다!”

“오셨다니요? 누가요?”

“그, 그게······. 헤파이토 님이 오셨습니다!”

“헤파이토 님이라면······. 그 대장인이라는 분이요?”

“그, 그렇습니다! 거기다 베니트 님도 함께 오셨습니다!”

베니트라는 사람은 또 누구지?

표정만 봐서는 되게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을 줄은 몰랐네.

“그럼 오늘은 공방에 못 들르겠네요.”

도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손님이 찾아온 것 같으니 내일이나 다시 와야겠다.

“예? 아! 그게 아닙니다. 오늘 두 분이 오신 이유는 스승님 때문입니다!”

“네? 저요?”

“예! 스승님을 만나고 싶다고 아침부터 기다리셨습니다!”

나를 만나려고 왔다고?

“아아.”

올룸스 씨가 일전에 헤파이토 씨한테 마도구에 대해서 말해도 괜찮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지.

그럼 이번에 날 찾아온 건 마도구 때문인 모양이다.

“그럼 지금 안에 계신 거예요?”

“예!”

“가죠.”

나를 만나러 아침부터 기다렸다는데, 그냥 돌아가면 예의가 아니겠지.

나는 스테인 씨와 함께 응접실에 도착하자 왁자지껄한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크하! 이거 정말 물건이로군!”

“그러게요. 이렇게 차가운 술이라니······. 이 냉장고라는 게 참으로 탐나는데요?”

“올룸스, 자네 말이야. 이 좋은 걸 혼자 독차지하려고 했던 겐가!”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허어? 아까 내가 냉장고를 가져도 되겠냐고 물으니, 정색하지 않았는가!”

“그, 크흠. 그 냉장고는 아이넬 씨가 제게 준 것 아닙니까? 선물로 받은 것을 드리는 건 두 분께 큰 실례이니, 제가 사용해야지요!”

다들 거나하게 취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픽 웃으며 응접실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응접실에는 텅 빈 술통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날 기다렸다던 헤파이토 씨와 베니트 씨는 아예 바닥에 올룸스 씨는 아예 냉장고를 껴안은 채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아침부터 날 기다렸다더니, 인제 보니 술판을 벌이고 있었구만.

“음? 아, 오셨군요!”

입구와 가까운 쪽에 있던 올룸스 씨가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음? 아, 그대가 아이넬인가?”

“예.”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하네. 나는 헤파이토라고 한다네.”

“저는 베니트라고 해요.”

“예,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그나저나, 저를 기다리셨다고 하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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