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소년기(52) - #헤파이토 씨의 선물!
“으하하! 맞소이다! 술이란 영원한 동반자와 같은 것이지!”
“하하하! 암, 그렇고말고요! 술은 인생이라, 이 말입니다! 자, 한잔 받으시죠! 이거, 원래 아무도 안 주는 건데 내 오늘은 특별히 꺼내왔습니다!”
인사불성의 지척까지 도달한 알코른 아저씨가 술병을 기울였다.
쪼로록, 갈색빛 액체가 찰랑거리며 잔을 채웠다.
듣자 하니 알코른 아저씨가 꼭꼭 숨겨 놨던 비장의 술이라나.
정성과 좋은 재료를 담았다는 걸 증명하듯 그 향이 무척이나 진했다.
본래라면 알코른 아저씨는 밭에 오지 않는다.
애당초 농사일을 돕지는 않거니와 따로 준비하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축제에 쓰일 술이었다.
아무래도 축제하면 또 술이 빠질 수 없었거니와, 알코른 아저씨가 자신이 그동안 빚은 술을 내놓겠다고 흔쾌히 나선 것이다.
그동안 매일 술을 빚으며 부인한테 구박만 받았던 알코른 아저씨였지만, 그날만큼은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지.
그런 그가 저토록 텐션이 높고, 또 굳이 이곳까지 와서 술잔을 기울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헤파이토 씨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거나하게 취한 헤파이토 씨가 술잔을 기울여 갈색빛 액체를 입에 털어 넣었다.
“크하! 좋군, 좋아!”
친화력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끼리끼리 논다고 해야 할지.
결과적으로 헤파이토 씨는 금세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다. 베니트 씨도 차분하게 앉아 대화를 나누며 나름의 친목을 다졌다.
그중에서도 내 시선을 가장 잡아끌었던 것은 스테인 씨였다.
그는 반짝이는 머리를 쉼 없이 닦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한 여자가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이름이 로란스였지 아마.
차분한 인상이 특징이었는데, 세라 누나와 꽤 친한 사이로 알고 있었다.
보아하니 스테인 씨에게 흥미가 동한 것 같았다.
반면에 스테인 씨는 긴장한 티가 역력한 게 누가 봐도 숙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뭐, 매일 공방에 틀어박혀 망치만 두들겼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겠지.
이제 슬슬 새참도 다 먹었네.
사람들도 슬슬 밭으로 향하는 것 같으니, 우리도 다음 코스로 이동해볼까.
“자, 우리도 정리하고 다음 장소로 갈까요?”
“음? 아, 벌써 가는 겐가?”
헤파이토 씨는 적잖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아쉽군요. 아, 혹시 괜찮으면 언제든 우리 집으로 오십쇼! 헤파이토 씨가 오신다면야 그동안 아껴놨던 술들을 싹 꺼내옵죠.”
알코른 아저씨도 오랜만에 만난 술친구와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그 말 잊지 않겠소! 껄껄, 좋소이다. 내 내일이라도 찾아가겠소이다!”
알코른 아저씨의 초대에 흔쾌히 응한 헤파이토 씨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세 듀로프와 함께 뒷정리를 마친 뒤, 다시금 마을 관광에 나섰다.
* * *
“와, 진짜 엄청나네요.”
나는 눈앞에 세워진 건물을 보며 감탄했다.
그는 관광을 끝낸 그 날 저녁부터 곧바로 집 공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틀 차에 접어드는 오늘 이렇듯 집을 완성했다.
나는 집을 살펴봤다.
집은 직사각형의 상자가 옆으로 누운 형태였다.
벽의 재질은 바위를 깎아 만든 벽돌이었으며, 위에는 굴뚝까지 달려있었다.
마당에는 헤파이토 씨 전용 작업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작업대 옆에 있는 화로였다.
언뜻 일반적인 화로처럼 보이지만, 저 안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불길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유는 저 화로 안에는 드라고스의 피가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설명을 듣자 하니 드라고스의 피는 굳지 않는다나.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이 약해지는 건 맞지만 적어도 몇 달은 열기를 유지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자칫 잘못 다뤘다가는 순식간에 화마에 뒤덮일 수 있으니 각별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당장 올룸스 씨가 챙겨온 드라고스의 피도 미리 꺼내서 식혀둔 거였다.
사실 처음 드라고스의 피를 봤을 땐 평범한 마그마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지구의 것과 닮았다고 그 특성까지 똑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단 말이지.
집과 작업대, 그리고 화로.
정말 딱 필요한 것만 배치한 것이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가 딱 어울리는 집이었다.
아니지.
정정한다.
집이라기보다는 대장간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매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술만 마시기에 괜찮나 싶었는데, 역시나 헤파이토 씨는 대장인이었다.
“하핫, 그런 말 말게나. 이렇게 돌을 깎아서 쌓는다는 건 자네가 알려준 거잖나? 게다가 우르시오르의 진액을 이용한 접착제라니. 보면 볼수록 놀라운 친구야.”
헤파이토 씨가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확실히 저 집을 설계하는데 내 아이디어가 많이 들어가긴 했지.
대장인인 헤파이토 씨가 집을 짓는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나도 머지않아 집을 지을 예정이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꼬맹이 시절에 두꺼비집을 지어본 게 고작이다.
그마저도 손재주가 없어서 중간에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물론 전생의 나와 현생의 나는 차원이 다르다.
피지컬이면 피지컬, 머리면 머리.
거의 386 컴퓨터와 인공지능 알파고, 수레와 슈퍼 카 정도의 차이다.
아무리 그래도 무작정 집을 지으려니 여러모로 막막했던 게 사실이다.
하물며 앞으로 몇 년을 살아야 할 집인데, 행여나 어릴 적 만든 두꺼비집처럼 무너지기라도 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었으니까.
이참에 나는 검증을 받고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얘기했고, 이를 듣던 헤파이토 씨는 자신의 집에 접목시켰다.
“에이, 뭘요. 이걸 직접 지으신 건 헤파이토 씨잖아요.”
“껄껄, 그렇게 따지면 그대의 도구가 없었으면 지을 수 없었겠지. 안 그런가?”
헤파이토 씨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그대는 대장장이 일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는가?”
“대장장이 일이요?”
“음. 그 팔씨름이라고 했던가? 듀로프 사이에서도 힘이 세다는 올룸스를 이겼다고 하던데?”
“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껄껄, 올룸스가 다짜고짜 팔씨름이라면서 스테인과 겨루는 걸 봤다네.”
헤파이토 씨가 슬쩍 먼 곳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올룸스 씨와 스테인 씨가 열심히 물건들을 나르고 있었다.
당시 올룸스 씨는 가능한 늦게 오고 싶어 했던 것 같았는데, 막상 양심에 찔렸는지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다만 들고 온 짐이 어찌나 많았는지, 로토를 타고 대여섯 번은 왕복해야만 했다.
특히 한쪽에는 그동안 스테인 씨가 제작한 냉장고가 잔뜩 쌓여있었다.
저걸 여기까지 다 옮기는데 로토가 고생을 많이 했지.
나중에 특별식이라도 좀 챙겨줘야겠어.
“올룸스를 힘으로 이길 정도라면 망치 정도야 쉬이 다룰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떤가?”
“저야 가르쳐주신다면 감사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대장인의 가르침이다.
지구로 치면 세계 제일의 권위자가 직접 찾아와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알려주겠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였으니, 배우지 않는 게 손해였다.
나아가 대장장이의 일을 다룰 수 있다면 당장 우리가 쓰는 식기 도구부터 시작해,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도 전부 금속으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 밖에도 DIY에도 아주 큰 도움이 될 터.
이는 석기시대가 막을 내리고 철기시대로 접어드는 것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껄껄, 그대의 성정이라면 내 제안을 수락할 줄 알았지. 올룸스! 그걸 갖다주겠나?”
헤파이토 씨의 외침에 무어라 구시렁거리던 올룸스 씨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허겁지겁 나무 케이스를 들고 왔다.
“여기 있습니다.”
“고맙네. 자, 이걸 받게나.”
“어우!”
반사적으로 나무 케이스를 건네받은 나는 깜짝 놀랐다.
케이스의 재질이 나무거니와 부피도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그 무게가 엄청났던 것이다.
어쩐지 올룸스 씨도 양손으로 들고 오더라니.
“이게 뭔가요?”
“열어보게나.”
나는 조심스레 나무 케이스를 열었다.
“어, 이거!”
헤파이토 씨가 준 것은 다름 아닌 망치였다.
머리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커다란 게 토르가 썼다는 묠니르를 연상케 하는 생김새였다.
게다가 색깔도 영롱한 푸른빛을 띠는 게 일반적으로 쓰이는 강철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으로 감싼 손잡이를 꽉 쥐었다.
마치 내 손에 맞게 제작된 것처럼 착 감겼다.
“어······?”
돌연 손끝에서 느껴지는 오묘한 감각에 망치를 쳐다봤다.
뭐야, 이 망치······마나를 흡수하잖아?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어째선지 망치가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내 몸에 있는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빨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흡수와 방출을 반복했다.
쉽게 말해서 마나가 순환하는 느낌이었다. 더불어 나와 망치의 사이에 마나로 된 선이 이어진 듯한 감각을 동반했다.
이런 내 놀람과는 별개로 헤파이토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가 아끼는 것들 중 하나라네. 그 귀하다는 아다만트로 만든 망치지. 그대가 사용하기에 좋을 것 같아서 올룸스한테 부탁했다네.”
“아다만트요?”
드라고스의 눈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 진짜 눈은 아니겠지만,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기괴함을 동반한 이름이었다.
혹시 이 망치가 마나를 흡수하는 건 아다만트가 가진 특성 때문인 걸까?
“음. 듀로프조차 쉽게 다루지 못하는 금속이라네. 아마, 단단하기로는 손가락 안에 들 거야. 그걸 만드는 데 10년이나 걸렸거든.”
“10년이요?”
아니, 망치 하나를 제작하는 데 10년이나 걸린다고?
“후후, 아다만트를 부드럽게 만들려면 드라고스의 피에 8년을 담가야 하거든. 만약 시기를 놓친다면 또다시 8년을 기다려야만 하지. 거기다 골고루 열이 받게끔 매일 한 번씩은 뒤집어줘야 해.”
와, 그럼 이 망치를 만드는데 진짜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겠네.
“이런 걸 주셔도 되는 거예요?”
무려 10년이다. 강산이 변할 세월을 투자한 끝에서야 제작한 망치다.
굳이 대장장이가 아닌 그 누구의 시선으로 보아도 보물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었다.
대대손손 물려줘도 될 만한 보물을 나한테 선뜻 줘도 되는 건가?
“장인이 된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게나.”
“고맙습니다. 평생의 가보로 생각할게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 그럼 망치를 휘두르는 방법부터 배워보겠는가?”
“그럼요!”
어제는 내가 쟁기의 사용법을 가르쳤는데, 오늘은 내가 망치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이런 게 바로 윈윈이라는 거겠지.
헤파이토 씨가 화로로 향하더니 아까 넣어놨던 주괴를 꺼내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괴를 모루에 얹었다.
헤파이토 씨도 백문이불여일견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는지, 군말 없이 망치를 집어 들었다.
이내 헤파이토 씨가 망치를 내리쳤다.
꿈틀거리는 근육에서 뿜어지는 힘에 망치가 빠른 속도로 쇄도했다.
콰아앙!
“윽!”
코앞에서 수류탄이 폭발한 듯, 어마어마한 굉음에 나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헤파이토 씨의 자세와 모루에 고정된 채 떨어지지 않았다.
헤파이토 씨가 내리쳤던 망치를 치웠다.
“와······.”
딱 한 번이다.
한 번의 망치질에 그 단단한 주괴가 납작해졌다. 저래선 강철이 아니라 찰흙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소리만큼이나 그 파괴력도 엄청났다.
“크흠, 내 오랜만에 망치를 잡았더니 힘이 많이 들어간 모양이군.”
헤파이토 씨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듀로프가 오랜만에 망치를 잡았다니.
차라리 록시가 간헐적 단식하겠다는 말을 믿겠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눈치 하면 또 나다.
어디까지나 보여주기 위한 망치질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짐짓 모른 척 박수를 쳤다.
“와, 진짜 엄청나네요!”
아니나 다를까.
이런 내 과도한 리액션에 헤파이토 씨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안 그런척해도 기뻐하는 게 눈에 보인단 말이지.
어쩐지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이 떠오른다.
“커험, 뭐 이런 걸 가지고. 자, 한번 해보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