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78화 (76/159)

78. 소년기(60) - #루나의 부탁

냉장고의 설명을 마친 나는 다른 도구들도 하나씩 소개했다.

“이건 냄비고요. 이건 프라이팬이라는 건데요!”

“냄비랑 프라이팬?”

도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명칭이 생소하기 때문이겠지.

“네. 요리할 때 쓰는 거예요!”

“그렇구나! 아, 이건 가위랑 집게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준비한 도구들 중에는 가위나 집게, 호미 같은 것들도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재료와 형태였다.

예전에는 다 마수의 뼈로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금속으로 만들었고 디자인도 조금 더 편하게 바뀌었다.

그 외에도 새롭게 만든 도구의 설명까지 끝냈다. 차분하게 내 설명을 듣던 도리아 아주머니가 레비아 선생님을 쳐다봤다.

“근데······. 이걸 전부 다 준다는 건가요?”

이에 레비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파메르 님의 축복이 담긴 도구들이 널리 이롭게 쓰이는 것. 그것이 파메르 님의 기쁨이고, 이를 돕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청산유수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레비아 선생님은 자신의 역할에 완전히 적응을 하셨는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애드립을 던졌다.

이야, 나도 모르게 기립박수를 칠 뻔했네.

“오오오······.”

도리아 아주머니 또한 레비아 선생님의 말씀에 감동은 받은 듯했다.

“쯧쯧.”

한편 데커드 할아버지는 레비아 선생님의 연기가 썩 마음에 들진 않았는지, 가볍게 혀를 찼다.

레비아 선생님이 멋쩍게 웃더니 짧게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 도구를 나눠주는 건 도리아 씨에게 맡기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제가요?”

“예. 아무래도 제가 하는 것보다는 도리아 씨가 나서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레비아 선생님이 마을에 정착했다고는 한들, 아직은 외부인에 가깝다.

거기다 그는 파메르의 신도라는 역할을 맡았다.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한다고 하면 적절할까.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금 어려운 상대로 여겨질 수밖엔 없는 위치라고 볼 수 있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거니와, 이에 대한 대비책은 준비해 뒀기에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네, 알겠어요.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말씀해주세요.”

레비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고맙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용무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에 도리아 아주머니가 나섰다.

“혹시 전달할 내용이 있으신 분 계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헤파이토 씨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소.”

“제안이요?”

“음. 다름이 아니라, 마을 말이오.”

“예.”

“괜찮다면 마을에 집을 좀 지어도 되겠소?”

결정을 내렸구나.

사실 헤파이토 씨가 이런 말을 하리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며칠 전 나를 찾아와 진지하게 상담을 요청했다.

요는 이러했다.

듀로프는 예로부터 딱 하나, 무구만 만들었다.

그게 당연했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았어야 했다.

이는 헤파이토 씨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헤파이토 씨의 가치관을 뒤흔든 사람이 있었으니, 그게 나였단다.

지금까지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의구심이 싹텄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늘 무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듀로프의 머릿속 깊숙이 박혀 있는 그 하나의 명제가 혹시 잘못된 건 아닐까, 라는 의심이 생겨난 것이다.

하물며 헤파이토 씨는 대장인이다.

모든 듀로프를 이끄는 우두머리였으니 그가 휘청이면 듀로프 전체가 휘청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를 알기에 차마 누구한테 말을 하기도 뭣했으리라.

그랬기에 헤파이토 씨는 듀로프가 아닌 내게 상담을 요청했던 거고.

근데, 말이 상담이지 실상은 나를 만난 이후로 심경이 복잡했다며 온갖 한탄을 쏟아낸 게 전부였고, 나는 그저 묵묵하게 들으며 고개만 끄덕여줬을 뿐이다.

자고로 마음속에 쌓아두면 병이 되기 마련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속에 있던 말을 털어낸 헤파이토 씨는 한결 개운한 얼굴로 돌아섰었지.

보아하니 헤파이토 씨는 단순히 무구만 만들었던 관습을 버리기로 결심한 모양이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진 모르겠지만, 헤파이토 씨라면 좋은 방향으로 이끌겠지.

이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나와 눈이 마주친 헤파이토 씨가 씨익 웃었다.

“집이요?”

도리아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소. 나는 요 근래에 베니트와 마을을 돌아다니곤 한다오. 얼마 전에도 알코른 씨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갔었다오. 보아하니 집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더군. 그래서 내 보수라도 해줄까 했소만, 이참에 다시 짓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이오.”

“그 말씀은······.”

“아, 혹시나 말하는 건데, 내가 그대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오. 단지, 우리 듀로프는 말이오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면 엉덩이에 뿔이 돋거든.”

혹여나 도리아 아주머니의 기분이 상할까, 걱정한 헤파이토 씨가 멋쩍게 웃었다.

“그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그리 생각해준다니 다행이오. 그래서 말이오. 기왕 이곳에 얹혀사는 거 그대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오.”

“저는 환영이랍니다. 헤파이토 씨가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요.”

도리아 아주머니가 흔쾌히 답하자 헤파이토 씨가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 도리아 씨라면 그리 말해줄 줄 알았지. 좋소! 이보게, 올룸스!”

“예, 예!?”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욱여넣기 바쁘던 올룸스 씨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네는 즉시 하티르로 돌아가 모든 듀로프를 이곳으로 소집하게.”

“소, 소집 말입니까?”

올룸스 씨의 반문에 헤파이토 씨가 척 고개를 들었다.

“그래, 이제 듀로프도 바뀌어야 할 때가 온 게지. 스테인. 그 아이의 생각이 맞았던 게야. 그래, 우리는 너무 고리타분했지.”

“예?”

난데없이 자기 아들이 언급되자 올룸스 씨가 눈을 끔뻑였다.

헤파이토 씨가 올룸스 씨의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아무것도 아닐세. 아무튼, 자네에게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옙!”

올룸스 씨가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대장간으로 향했다.

모든 듀로프를 소집한다라.

이건 집을 짓는 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마을 전체를 재개발하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것 같았지만, 마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건 틀림없었다.

* * *

회의를 끝내고 데커드 할아버지의 오두막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저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루나?”

“응.”

“오늘은 좀 늦었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내 말에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응. 잠깐 이쪽으로 와.”

루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그녀를 따라 간 곳은 마을에서 벗어난 숲이었다.

걸음을 멈춘 루나가 숲을 향해 외쳤다.

“나와.”

나오라는 건······ 누굴 데리고 온 건가?

아니나 다를까.

숲이 흔들리더니 웬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총 4명이었는데, 앞에 선 세 명은 머리에 큼지막한 뿔이 달려있었다.

거기다 얇고 뾰족한 귀와 늘씬하면서도 날렵해 보이는 몸이 특징이었는데, 어딘가 사슴을 연상케 했다.

잠깐만.

짐승을 닮은 종족이라면······.

“비스테르?”

“응. 비스테르야. 카제르 부족.”

“역시, 비스테르구나. 근데, 저기 한 명은 비스테르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가장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을 가리켰다.

앞선 세 사람과는 달리 몹시도 왜소한 체구의 사람이었다.

옅은 녹색 빛을 띠는 피부에, 주먹코가 유독 도드라진 사람이었다.

더불어 지금까지 만난 종족 중에서 우리, 그러니까 인간이랑 가장 비슷하게 생겼다.

“고브야.”

“고브? 저 사람이 고브야?”

이름이 악동이라서 뭔가 장난기 가득한 악마의 모습을 떠올렸었는데, 의외로 되게 평범한 인상이었다.

“저, 아, 안녕하십니까. 저, 저는 카제르 부족의 청년 카제르입니다.”

세 카제르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내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걸 보니 꽤 긴장한 것 같았다.

“아이넬이라고 합니다.”

“바, 반갑습니다.”

“네, 반가워요.”

“고, 고브다.”

고브 또한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카제르 부족과 거리를 두고 있는 걸 보니 원래부터 알던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치자 루나가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응?”

“또 있어.”

“또?”

“응. 나와!”

루나가 재차 숲을 향해 말하자, 재차 숲이 흔들리더니 무언가가 훅, 튀어나왔다.

“호랑이?”

처음 딱 보자마자 떠오른 건 다름 아닌 호랑이였다.

그것도 평범한 호랑이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맹수.

검치호랑이랑 똑 닮아있었다.

게다가 그 몸집이 어찌나 거대했는지 내 앞에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샤베르티가.”

샤베르티가라면, 산맥에서도 단연 최상위 포식자라고 알려진 무시무시한 마수였다.

난데없는 샤베르티가의 등장에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루나가 샤베르티가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앉아.”

컹!

그러자 샤베르티가는 잘 훈련된 강아지처럼 바닥에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았다.

녀석의 재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돌아.”

휘릭!

“뛰어.”

폴짝!

“굴러.”

데구르르르!

흡사 자신의 무해함을 알아달라는 듯, 샤베르티가는 꼬리를 흔들며 열심히 재롱을 떨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픽, 웃어버렸다.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내 질문에 루나가 어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사냥을 하려는데 고브를 발견했고, 루나는 그 고브를 도와주려고 했고.”

“응.”

“그 고브를 쫓고 있던 추격자가 같은 비스테르라는 걸 알았고.”

“응.”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샤베르티가가 나타났고.”

“응.”

“나한테 데리고 왔다는 거지?”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본인이 맞는다고 하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

“음······. 그래서 나한테 데려온 이유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루나가 청년 카제르의 목을 가리켰다.

“목걸이.”

“저 목걸이를 풀어달라는 거야?”

“응.”

사실 목걸이를 빼주는 것 정도야 누워서 식은 죽 먹기다.

다만, 저게 평범한 목걸이라면 말이지.

나는 청년 카제르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응시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는지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눈에는 저 목걸이가 평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목걸이에서는 무언가 시커먼 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어쩐지 마나랑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다.

“저거 풀려고 하면 죽는대.”

역시나.

뒤이어 나온 루나의 대답은 내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예. 이 목걸이를 억지로 풀려고 하면 목을 조, 조릅니다.”

풀려고 하면 목을 조르는 목걸이란 말이지.

나는 청년 카제르에게 다가갔다.

“잠깐 봐도 괜찮을까요?”

“예, 예! 무, 물론입니다!”

청년 카제르가 조심스럽게 자세를 낮췄다.

“음······.”

재질은 금속인 것 같고.

이음새가 있긴 했으나, 자력으로는 풀지 못하게끔 녹여버린 흔적이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호오, 이것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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