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소년기(69) - #우리는 가족!
내 외침에 비스테르들이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여러분께 꼭 물어봐야 할 게 있어요.”
나는 흙바닥에 뒹구는 달걀귀신을 가리켰다.
“저, 저자는!”
“아······.”
“그,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
역시나 비스테르들은 달걀귀신을 보자마자 대경실색했다.
아무렴.
나한테야 그냥 하얀 가면을 쓴 이상한 사람 내지 분장한 달걀귀신이지만, 비스테르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저승사자와도 같으리라.
“침착하세요.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하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보란 듯 달걀귀신의 허벅지를 자근자근 지르밟았다.
그럼에도 잠에서 깨지 않자 비스테르들이 황망한 눈으로 나와 달걀귀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 뭐야?”
“그러게. 왜 가만히 있지?”
“주, 죽은 건 아닌데? 숨 쉬고 있어!”
효과는 확실했다.
내가 아무리 밟아도 미동조차 하지 않자 황당해하는 한편,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 그래! 다들 조용히! 아이넬 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안전합니다!”
갑작스러운 혼란에 여성 먼키도 나서서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그녀 또한 놀란 듯했지만, 리더라는 자각이 있어서인지 먼저 나서서 분위기를 수습했다.
나와 여성 먼키의 외침에 비스테르들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나는 여성 먼키에게 감사의 눈짓을 보냈다.
조용해진 장내를 훑어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이윽고 비스테르들을 이목을 한곳으로 모은 나는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께 묻고 싶어요. 이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 질문에 선뜻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 그건 아이넬 님이 결정하시면······.”
아주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는 이가 있었지만, 저건 선택이 아니었다.
“제가 묻고 싶은 건 여러분의 진심이에요.”
나는 달걀귀신을 가리켰다.
“두려운 것도 알고, 무섭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도망치면 안 됩니다. 이자에게 피해를 입은 건 제가 아닌 여러분이잖아요. 그러니까, 선택은 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에요.”
그래.
나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그 마음은 이해할 수 있다.
나만 하더라도 그랬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 생기거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에 휘말리면 가장 먼저 주변 사람부터 찾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책임.
내가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모든 짐은 오롯이 내가 짊어지고 감당해야 한다는 중압감.
나이를 먹고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고 한들 이러한 책임의 무게는 두려우며, 또한 자유로울 순 없었다.
특히 비스테르는 예부터 저주에 묶여 숨어 살아야만 했다.
즉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신의 선택권을 잃어버린 채 살아온 셈. 어떻게 보면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미지의 영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러분은 이제 자유의 몸이에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모든 비스테르들과 눈을 맞췄다. 그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편, 여전히 주저하고 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유에는 커다란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고요. 지금 여기서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곧 여러분 스스로가 자유를 버리는 꼴이 됩니다.”
첫술에 배가 부를 순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그 첫술마저 뜨지 않는다면 시작되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변하는 것 또한 없다.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았던 침묵을 깬 이가 있었다.
소녀 레서드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주목에 민망했던지 소녀 레서드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내 용기를 낸 소녀 레서드가 고개를 팟, 들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저는!”
용기를 낸 소녀 레서드가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의외였다.
옛말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던가.
달리 말해서 사람은 자기가 겪은 일이 가장 힘든 법이고, 자기가 겪은 일이 가장 괴로운 법이기도 했다.
툭 터놓고 말해서 나는 비스테르들이 겪은 일을 잘 모른다.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모르고, 얼마나 괴로운 생활을 이어나갔는지 모른다.
그랬기에 나는 그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정정한다.
이해한다는 말을 한다는 것부터가 오지랖이며, 오만이다.
하지만 공감은 가능하다.
만약에 나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은 해보면 되는 것이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누군가에게 속아서 목걸이를 차고 자유를 잃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매일을 버텨야만 한다.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지만, 그건 살고 싶기에 생겨나는 감정일 뿐.
당장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마침내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고,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달걀귀신이 이렇듯 무방비상태로 있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 또한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지만, 한때의 추억이랍시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없으리라는 건 확실했다.
소녀 레서드의 외침에 용기를 얻은 걸까.
다른 비스테르들도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우리는······. 우리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맞아요! 우리가 저자를 주, 죽인다면······. 그, 그건 저자와 똑같아지는 거라고 생각해요!”
참 바보처럼 순진한 사람들이라니까.
“아이넬 님.”
뭉클한 가슴을 달래고 있자니, 여성 먼키가 날 불렀다.
“네.”
“아이넬 님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저는 아이넬 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제 의견이요.”
“네.”
내 의견이라.
“저라도 죽이진 않을 것 같네요.”
“이유를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나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앞서 말했듯 나는 뺨을 맞았다고 반대쪽 뺨을 내밀 정도로 관대한 사람도, 소위 보살이라는 불리는 이들처럼 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치졸하고, 옹졸하고, 고집 세고, 자기만 아는 과거의 나다.
지금의 나는 아이넬이며,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남기고 싶지 않아서요.”
“남긴다는 건 어떤······.”
“후회요.”
저 달걀귀신을 죽인다면, 지금 당장은 후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에는 어떨까.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게 사람이다.
타오르는 복수심을 잠재우고자 본능에 날 맡긴다면 그 끝에 남는 것은 후회가 아닐까.
나아가 지금의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다는 걱정도 동반하고 있었다.
“후회······ 알겠습니다.”
여성 먼키가 슬쩍 물러나며, “역시 아이넬 님은 세이비오르 님이······.”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 세이비오르라는 게 뭘 뜻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겠지.
“여러분의 선택은 잘 알겠습니다. 달걀 아니, 이자도 함께 데려가도록 하죠!”
* * *
“저, 저 사람들은 다 뭐람?”
“어디서 저렇게 많이 온 거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을은 난리가 났다.
뭐, 한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무려 66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마을로 들이닥쳤으니 당황할 만도 하겠지.
“록시랑 루나랑 같은 종족 아니야?”
“그런 거 같은데? 그······ 비스테르 맞지?”
“응? 잠깐만, 저기 아이넬 아니야? 루나도 있는데?”
“맞네. 아이넬이라면 레비아 선생님의 제자라면서? 그럼 저 사람들도 우리 마을에서 사는 건가?”
이렇듯 이종족에 대한 면역이 생겼거니와 나와 루나가 함께였기에 별다른 혼란은 생기지 않았다.
도리어 소란스러워진 쪽은 비스테르 무리였다.
“저, 저거 봐! 저 사람이 아이넬 님이 말한 인간이지?”
“저기, 저기! 저게 집이라는 거야?”
“우와아······. 여기 되게 넓다!”
그들은 평생을 동굴과 좁디좁은 공터에서 지냈다.
말 그대로 새장 안에 갇힌 새처럼 갇혀 살았으며, 그만큼 행동반경도 적었다.
어떻게 보면 저렇게 멀쩡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겠지.
서로가 서로를 신기해하는 모습에 픽, 웃고 있자니 저 멀리서 우다다다다,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대장! 대장!”
록시였다.
그녀는 거의 날 듯 달려오더니 그대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용케 알았네?”
“응! 대장이 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걸 안 게 아니라, 올 것 같아서 기다렸다니.
진짜 록시의 감은 장난이 아니라니까.
“아, 뒤에 친구들 왔어.”
“친구!”
내 말에 록시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빼꼼 뒤를 쳐다봤다.
“우와아, 친구 엄청 많다!”
“응. 친구야. 저기 루나도 있으니까, 가서 인사해야지?”
“응!”
록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비스테르 무리로 향했다.
새롭게 나타난 동족에 모두가 놀랐다.
그중에서도 단연 놀란 이는 여성 먼키였다.
“포, 폭시 부족인가요?”
여성 먼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록시를 쳐다봤다.
전에 루나에게 듣기로 폭시 부족은 비스테르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라고 했었지 아마.
그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니었는지, 다들 록시를 보는 시선이 남달랐다.
나한테는 그냥 귀엽지만 때로는 덤벙거려서 내 속을 타게 만드는, 소위 동생 같은 존재인데 말이야.
이는 루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록시처럼 손이 많이 가지도, 막 와서 애교를 부리진 않지만 늘 내 곁에서 자리를 지켜주는 누나 같은 느낌이다. 성향도 성격도 취향도 제각각이지만, 두 사람 모두 내게는 가족 같은 아니, 어엿한 가족이었고.
“응! 나 폭시 부족이다! 록시다! 반갑다!”
록시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여 냉큼 손을 내밀었다.
“손······?”
“악수! 손잡고 흔든다!”
록시가 여성 먼키의 손을 잡고는 위아래로 흔들었다.
“친구! 같이 농사한다!”
보자마자 농사라니.
누가 들으면 오자마자 노동부터 시키느냐고 하겠지만, 록시에게 있어서 농사는 곧 놀이였다.
그것도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여겼으니, 록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난감을 함께 공유하겠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하기야.
그러고 보면 우리 마을의 가구 수는 많지 않다.
거기다 각자 해야 할 일도 있는지라 농사에 투입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물며 축제까지 함께 준비해야 했으니 모두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다른 무엇도 마을의 재건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서 다들 기쁘게 참여하고 있지만, 일손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만약 비스테르가 마을의 일원이 된다면, 활기도 배가 될 뿐만 아니라 조금 더 여유롭게 준비할 수 있으리라.
“뭐,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록시, 도리아 아주머니는 어디에 있어?”
“도리아 아주머니, 밭에 있다!”
“그래? 아, 그럼 비스테르들 마을 회관으로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
“응!”
“고마워. 그럼, 먼저 가 있어!”
* * *
“크흠, 그렇게 된 겁니다.”
길고도 길었던 설명을 끝낸 레비아 선생님이 슬쩍 날 쳐다봤다.
완벽합니다.
나는 잘했다는 의미로 엄치를 척, 들어 올렸다.
“어쩜······. 그럼, 그동안 저 아이들은 갇혀서 지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이렇게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레비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내가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다만 나는 데모스에 관한 건 숨겼다. 아무래도 당장 밝히기에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지라 나중에 정리해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름 각색한 이야기를 들려준 나는 몇 가지 부탁을 드렸고, 레비아 선생님은 너무나도 흔쾌히 수락하셨다.
나와 레비아 선생님이 눈빛을 주고받는 것과는 별개로 도리아 아주머니는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셨다.
“너무······. 너무 잘하셨습니다. 정말······.”
도리아 아주머니가 한곳에 모인 비스테르에게로 향했다.
“이제, 이곳은 여러분의 마을이고, 집이랍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됐다.
이것으로 비스테르는 공식적으로 우리 마을의 가족이 되었다.
자, 이제 다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