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96화 (94/159)

96. 소년기(78) - #용기

“아이넬 형아?”

날쌘 다리의 호칭에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으응! 형아라고 부르면 안 돼?”

“안 되긴!”

그러고 보면 나는 형이라는 호칭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구나.

“형아라고 불러도 돼.”

“응! 아이넬 형아!”

힘차게 답하는 날쌘 다리를 보고 있자니, 귀여운 남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응, 그래서 왜?”

내가 웃으며 묻자 돌연 날쌘 다리가 슬쩍 자세를 낮췄다.

“형아는······. 신님이 보낸 사람이야?”

마치 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인지, 날쌘 다리가 몹시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엉? 신이 보낸 사람?”

순간 도리아 아주머니가 오신 줄 알았네.

나에게 신에 대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도리아 아주머니 딱 한 분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자 날쌘 다리가 더욱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들었어.”

“들었다니? 뭘?”

“으으으음······.”

내 말에 날쌘 다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

보아하니 기억을 더듬는 것 같은데, 좀처럼 생각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세······.”

“세?”

“세이······.”

“세이?”

“으으음······. 무, 무슨 르였어.”

르로 끝나는 말이 한두 개도 아니고 말이야.

무작정 무슨 르라고 해도······.

아, 잠깐만.

맨 앞 글자가 세, 두 번째가 이.

끝이 르.

거기다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문 모를 말.

이 세 가지를 종합해봤을 때 딱 하나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세이비오르······는 아니겠지?”

혹시나 싶어 묻자, 날쌘 다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맞아! 그거! 세이비오르!”

잠깐만.

세이비오르라면 불과 며칠 전 위즈 씨를 통해 들었던 그 단어였다.

안 그래도 나는 위즈 씨한테 세이비오르가 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근데, 정작 위즈 씨가 말하길 자신들을 구원하는 존재라고만 말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마 위즈 씨도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게 비스테르의 전설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그래서 세이비오르가 왜?”

“응. 세이비오르가 나타날 수 있다고 했어!”

그녀 또한 언젠가는 세이비오르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을 했었지.

“누가 그런 말을 했어?”

“가면 쓴 사람이!”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으나, 막상 날쌘 다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잠깐만. 가면을 쓴 사람이라고?”

혹시 가슴 흉터 씨한테 가면을 줬던 그 의문의 인물을 말하는 걸까?

“응. 나, 그 사람이 하는 말 들었어. 막, 세이비오르가 나타나기 전에 모든 걸 끝내야 한다고 했어!”

“세이비오르가 나타나기 전에 끝낸다······.”

뭘 끝내야 하는 거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보나마나 가면의 남자가 끝내야 한다는 건 데모스라는 녀석의 봉인을 푸는 거겠지.

그랬기에 마봉석을 찾아다녔을 거고.

“그럼 너는 그 가면의 남자를 본 적이 있는 거야?”

“응. 본 적 있어. 가면의 남자 많았어. 엄청 많았어!”

날쌘 다리는 당시 본 숫자를 표현하고 싶었는지, 양팔로 크게 원을 그렸다.

“엄청 많았구나.”

“응! 엄청, 엄청 많았어!”

연신 엄청 많다는 표현을 쓸 정도면 세 자리 숫자는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음······.

날쌘 다리한테 들을 줄은 몰랐지만, 가면의 남자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따지고 보면 당연하다.

과연 혼자서 비스테르를 모아서 가두는 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일까?

제아무리 데모스의 힘이 강하고, 이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들 단 한 사람이 나서서 하기에는 지나치게 스케일이 크다.

물론 하자면 할 수는 있겠지만,

“딱 거기까지겠지.”

나는 데모스의 봉인을 어떻게 푸는지 모른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일 터.

만약 쉬운 일이었다면 진작 봉인이 풀렸을 테니까.

즉 개인이 아닌 조직.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범죄 조직처럼 많은 이들이 동원됐으리라고 쉬이 추측해낼 수 있었다.

애당초 내가 마봉석을 보관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놈들이 얼마나 큰 조직이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속해있는지는 몰라도 끝까지 마봉석을 찾아다닌다면 언젠가는 찾아낼 테니까.

“가면의 남자를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잘 모르겠어. 미안해 형아.”

날쌘 다리가 풀 죽은 얼굴로 말했다.

“미안하긴. 괜찮아.”

나는 날쌘 다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드라고스 산맥은 엄청나게 넓고, 그 흔한 지도 한 장 없다.

기억력이 컴퓨터급이라고 자부하는 나만 하더라도 아직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는 실정이다.

게다가 날쌘 다리는 사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던 시점이었으니, 위치를 기억해 둘 여건도 없었으리라.

“아!”

“응?”

“거기, 되게 추웠어!”

“추웠다고?”

“응. 되게 추웠어. 그리고 막 하얀 게 쌓여있었어.”

“추운 기후에, 쌓여있는 하얀 거라면. 눈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고개를 돌려 산맥 쪽을 쳐다봤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여러 봉우리.

그중에서 딱 하나, 설탕가루를 뿌린 것처럼 새하얀 봉우리가 있었다.

드라고스의 날개라 불리는 지역.

“윙그롬.”

날쌘 다리가 가면의 남자들을 봤다는 곳이 윙그롬이었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가보고 싶었지만, 저 드넓은 지역을 다 뒤지자니 하루 이틀로 끝나질 않을 것 같았다.

일단 기억해두자.

“그것 말고도 기억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알려줄래?”

“응! 알았어!”

힘차게 대답하는 날쌘 다리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착하네.”

“히히!”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날쌘 다리의 질문에 대답을 안했구나.

“아까 신이 보낸 사람이냐고 물었었지?”

“응!”

“음······.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아이넬 형아, 몰라?”

“응.”

따지고 보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건 노인이다. 아직 그 노인이 신인지 뭔지 모르는 이상 확답을 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조금 애매했으니, 모른다는 말이 정답이겠지.

“우웅, 모르는구나······.”

“나중에 알게 되면 알려줄게. 그나저나, 매번 날쌘 다리라고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네.”

“응? 내 이름?”

“응. 조금 긴 것 같아서.”

“으응. 맞아. 내 이름도, 형아 이름도 길다.”

“그럼 별칭이라도 지어 볼까?”

“별칭?”

“응. 날쌘 다리가 이름이니까, 이걸 조금 더 쉽게 부를 수 있게 별칭을 짓는 거야.”

아무렴.

비스테르야 애당초 이름이 없었으니까, 내가 지어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반면에 날쌘 다리라는 이름은 형인 가슴 흉터 씨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부르기가 조금 불편하다고 이름을 바꾸라고 할 순 없었으니, 이참에 별칭을 하나 짓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별칭. 좋아!”

“음······.”

나는 날쌘 다리를 눈에 담았다.

가슴 흉터 씨에 비해서 무척이나 작고 왜소한 몸이었고, 굉장힌 순해 보이는 인상이다.

어쩐지 지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소인족이 떠오른단 말이지.

그때 얼핏 본 게 맞다면 피그마이오이였던 거로 기억한다.

“그대로 부르기엔 기니까······. 음, 줄여서 피오?”

“피오?”

“응. 피오 어때?”

“피오. 피오. 좋아!”

날쌘 다리는 피오라는 별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활짝 웃었다.

“아, 형아도 지어주고 싶은데.”

“가슴 흉터 씨?”

“응.”

가슴 흉터 씨라면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가슴에 난 커다란 흉터가 가장 큰 특징이다.

“형아는 가슴에 있는 상처를 좋아해!”

“그래?”

“응!”

사실 나는 가슴 흉터 씨의 가슴에 왜 그렇게 큰 상처가 났는지 알고 있다.

듣자 하니 어릴 적 격렬한 전투 중에 생긴 상처라나.

그것도 피오를 노리고 달려들었던 크래그 보어를 물리치던 중 생긴 상처라고 했다.

정작 당사자인 피오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말이야.

더욱이 크래그 보어는 나도 본 적이 있는데, 그 몸집이 어마어마하다.

특히 주둥이 옆에 난 뿔이 단연 위협적이었다. 만약 크래그 보어가 들이받는다면 큼지막한 바람구멍이 뚫리리라.

그런 무시무시한 마수를 상대로 싸운 것도 모자라 이겼다지. 덕분에 가슴에 큰 흉터가 남았지만, 그는 그 상처에 큰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스카른?”

“스카른······.”

그렇게 피오와 도란도란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저 멀리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야기 끝났나 보네. 자, 가볼까?”

“응!”

나는 피오와 함께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때요? 이야기는 많이 했어요?”

위즈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슴 흉터 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번에 아이넬 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죠.”

잠시 말을 멈춘 위즈 씨가 내 옆에 서 있는 피오를 쳐다봤다.

“용서를 구하는 것에도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용서를 하는 사람에게도 응당 용기가 필요하다고요.”

그랬지.

자고로 인간은 사회의 동물이라고들 말한다.

달리 말해서 늘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살아간다는 의미였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하고 쿵짝이 맞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이야 다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지만, 내가 어릴 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고 해야 할까.

그도 그럴 게, 나는 어릴 적 사고를 당해 부모님을 잃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사고라는 게 당하고 싶어서 당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아무런 전조도 없이 들이닥친다.

하지만 당시의 어렸던 나는 그 사고를 낸 사람은 물론, 돌아가신 부모님을 원망했다.

그냥 세상에 나 홀로 남겨졌다는 현실에 모든 것이 싫었다. 그래서 사고를 당한 후로는 타인과 접촉을 꺼려 했다.

애당초 내가 조부모님을 따라 시골로 향했던 것부터가 도피의 일종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시골에 처음 갔을 때도 늘 방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을 않았다.

근데, 은둔생활도 하루 이틀이다.

상처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회복력이 다를지언정, 아무리 큰 상처라고 할지언정 언젠가는 아무는 것이다.

내 가슴에 뚫렸던 구멍 역시도 조금씩 메워졌으며,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만감도 차츰 정리가 됐다.

뒤늦게야 불현 듯 죄책감이 찾아오더라.

속으로 늘 원망하고 저주했던 부모님. 그리고 방에만 처박혀 있는 손자를 걱정하는 조부모님.

비록 철부지 어린아이였지만, 그때의 내가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을 때.

조부모님은 스스럼없이, 그 어떠한 어색함도 없이 잘 나왔노라고 날 보듬어주셨다.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용서였다.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용기를 냈다.

돌아가신 엄마와 아빠. 내 옆을 지켜주셨던 할머니 할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다.

그때 나는 용서를 하고, 또 구한다는 행위에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아울러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비단 용서만이 아니다.

고맙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밖에 나가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오는 그 말.

거의 습관처럼 나오는 말들이 정작 가족한테는 왜 그리 어렵고 어색한지.

그나마 지금의 내가 어린아이였기에 할 수 있는 거지.

아직까지도 엄마랑 아빠한테 애정표현하는 게 진짜 어색하다.

그래도 해야지.

옛날에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라는 모 CF의 CM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지.

살다가 죽어보고, 또 환생해보니까 알겠더라.

사람은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

자신의 귀로 똑똑히 듣지 않는 이상 모른다.

경험자로써 단언컨대,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른다.

그랬기에 더욱더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게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저는······. 가슴 흉터 씨를 용서하고 싶어요.”

위즈 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까 창문 밖에 매달려 잘 때부터 알아봤지만, 위즈 씨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 * *

“어디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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