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소년기(125) - #흡수
알게 모르게 쌓인 울분을 토할 겸 데모스의 속을 벅벅 긁어주려던 차였다.
갑작스럽게 내 몸속을 휘젓는 강대한 기운에 허둥지둥 주변을 살펴봤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뭐, 뭐야 이거?”
내 주변에 어마어마한 양의 백색 마나가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꾸준하게 내게 흡수되던 백색 마나가 빨대라면, 지금 내게 흡수되는 백색 마나의 양은 가히 소방호스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하물며 내 주변을 두른 양이 어찌나 많았는지, 정말로 새하얀 파도가 날 집어삼키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랬던 거지?
아니, 언제부터고 나발이고.
왜 갑자기, 그것도 어디에서 이렇게나 많은 백색 마나가 생겨난 거지?
물론 백색 마나가 이렇게나 많아졌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사태에 당황스러웠다.
“뭐냐?”
내가 갑자기 말을 멈추자 그게 이상했던 것인지, 데모스가 물었다.
“어······. 계획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냐고?”
나는 바닥에 템페스트를 내려놓고는 데모스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합!”
뒤이어 크게 기합을 터뜨리며, 전신으로 스며드는 백색 마나를 뿜어냈다.
푸화아아아악!
내 몸에서 뿜어진 백색 마나가 그대로 데모스를 향해 몰아쳤다.
아울러 시커먼 낫으로 인해 밤처럼 어두웠던 아크니악의 내부가 환하게 밝아졌다.
“크아아아아아!”
갑작스러운 사태에 미처 피할 겨를도 없었던 데모스는 그대로 백색 마나의 파도에 휩쓸렸다.
한동안 넘실거리며 아크니악 내부를 휘몰아치던 백색 마나가 서서히 물러갔다.
나는 바닥에 맥없이 쓰러져 있는 데모스를 힐끗 쳐다봤다.
“크으으으으으으······.”
녀석은 백색 마나의 파도에 큰 타격을 입었는지, 몸을 일으켜 세우긴커녕 가까스로 숨만 쉬고 있었다.
그래도 마왕의 자존심이라는 게 남아있는지, 녀석은 어떻게든 고개를 내려 날 쳐다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힘겨웠는지 시뻘건 눈동자만 힘껏 내렸다.
흰자가 잔뜩 드러난 게 흡사 개그맨이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노옴······.”
거참.
진짜 저 녀석도 대단하긴 하네.
이로나스 씨의 기억에 따르면, 백색 마나야말로 데모스를 물리칠 수 있다.
정확히는 인간이 데모스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해야겠지.
그래도 효과는 꽤 뛰어난지라 소위 데모스 전용 살충제라고도 볼 수 있는 게 백색 마나다.
그리고 데모스는 이런 살충제를 뒤집어쓰다 못해 아예 그 속에 푹 잠겼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는 건 알 수 있을지언정, 소멸은 당하지 않았다.
“이래서는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구만.”
게다가 아크니악을 이용해서 데모스를 아주 머나먼 곳으로 추방시킬 계획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었을 뿐이다.
본래는 녀석을 소멸시킬 예정이었다.
근데, 내가 본래 지니고 있던 백색 마나의 양과 지금 데모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계획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저벅저벅, 걸어 데모스의 앞으로 향했다.
약 먹은 개구리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는 데모스를 응시하던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내자.”
진심을 담아 한마디를 내뱉은 나는 다시금 백색 마나를 뿜어냈다.
데모스는 이런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었다.
하기야.
명색이 마왕이다.
과거 아티로스에 침공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인간이란 그저 밟으면 꽥, 죽는 벌레와도 같았을 터.
반면에 지금은 그 인간에게 호되게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소멸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니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가 없겠지.
녀석의 대꾸를 무시하며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놈······. 내가······ 소멸당한다고 끝······ 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씹어 뱉듯 말하는 데모스를 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랬지.
당장 데모스를 소멸시킨다고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데모스가 아티로스로 넘어오기 전에 있었던 곳.
“다케스티아를 얘기하는 거지?”
“그걸······. 네놈, 그걸 어디서 들었지?”
“어디서 듣긴, 여기저기서 주워들었지. 흐음······.”
쉽게 말해서 또 다른 데모스가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다는 의미였다.
음······.
내가 멈칫하자 데모스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크흐흐흐······.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 다. 내가 소멸당한다면······. 다케스티아에서도 알게 될······ 큭! 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다케스티아가 열리······ 겠지.”
잠깐만.
“그러니까, 네 녀석이 소멸당하면 다케스티아의 누군가가 이를 알아차리고 아티로스와의 연결된 문을 연다는 이야기지?”
“큭······. 머리 하나는 잘 돌아가는······ 놈이로군. 그래, 내가 소멸당하면 그 즉시 아티로스는 끝장이다!”
“그건 좀 곤란한 이야기네.”
과연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어쩌면 소멸을 면하기 위해서 되도 않는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다.
자고로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던가.
나에게는 데모스와 다케스티아에 대한 정보가 없다. 무작정 거짓부렁으로 치부하기에는 적잖은 위험부담이 있는 것이다.
“흐음······”
고민 되네.
내가 데모스를 소멸시키려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데모스가 위험하기 때문이다. 지구의 사고방식으로 치자면, 핵무기쯤 되려나.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뿐이지, 자칫 작동한다면 그 즉시 세계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데모스의 추종자다.
그들이 아직까지도 대륙 곳곳에 산재해있으며, 은밀하게 활동하는 이유는 데모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데모스를 소멸시키고, 이를 추종자들이 알게 된다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걸 부활시킬 순 없는 노릇.
자연스럽게 데모스를 부활시키겠다는 목적은 사라지게 되고, 덩달아 추종자들도 자취를 감추게 되겠지.
이러나저러나 데모스라는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야만 했다.
“흐흐흐흐······. 갈등되는 거군. 그래······. 네놈이 날 소멸시킨다면······. 더 큰 위험을 불러오는 꼴이지. 크크크크······.”
내 침묵이 길어질수록 데모스의 혀도 점점 길어졌다.
“놈······. 네 녀석이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그래······. 이럴 게 아니라 나와 손을 잡는······ 건 어떠냐? 내가 아티로스······ 를 손에 넣는다면, 네게 세상의 반을 주마!”
세상의 반이라니.
진짜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마왕이 할 법한, 아주 진부한 대사였다.
“세상의 반을 받아서 뭐 하나. 됐고, 입 좀 다물고 있어 봐. 자꾸 그렇게 까불다가 한 대 맞는 수가 있으니까.”
“놈······. 힘이 온전했다면 한입에 삼켜질 놈이······!”
데모스의 말에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응? 방금 뭐라고 했냐?”
“세상의 반······ 말이냐? 크크크. 흥미가 동했나······?”
“아니, 그런 쓰잘데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방금 한입에 삼켜질 놈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내가 진지한 얼굴로 반문하자, 데모스가 얼떨결에 긍정했다.
“맞네. 그게 답이었네!”
유레카를 외치며, 알몸으로 거리를 활보했던 아르키데메스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에 나는 때 아닌 물개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무슨 소리지?”
나는 손가락으로 데모스를 가리켰다가, 다시금 날 가리켰다.
“내가 널 삼키는 거지.”
“뭐?”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간단하거니와 이미 나에게는 이로나스 씨의 영혼을 흡수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때의 경험을 통해 영혼을 흡수하는 방법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이로나스 씨와 데모스의 영혼은 다르다.
그러나 둘 다 영혼이었으니 흡수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지금 나를······. 나를 흡수하겠다는 이야기냐?”
데모스는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몹시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심지어 아까의 그 당당하고도 오만했던 태도는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흡사 맹수를 만난 짐승처럼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맞아. 네가 말했지? 네가 소멸당하면 다케스티아에서 이를 눈치채고, 또 다른 데모스를 보낸다고 말이야.”
“······.”
“솔직히 그 말을 들으니까 멍하긴 했어. 나는 그저 너를 소멸시키면 끝이라고 생각했거든. 뭐, 지금도 네 말이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고.”
“······.”
나는 천천히 데모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은 엉덩이를 질질 끌며 어떻게든 내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그래 봐야 녀석은 독 안에 든 쥐였다.
나는 손을 뻗어 데모스의 머리를 콱, 움켜잡았다.
본래 녀석은 영혼이라서 잡히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나는 진작부터 백색 마나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영혼인 녀석을 잡는 것이 가능했다.
“그, 그만······. 하지 마! 제, 제발······. 부탁이다. 나를······. 나를 이대로······.”
“그런 말을 하려거든, 먼저 실천부터 했어야지.”
내가 아무리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한들,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비록 데모스가 아티로스에 침략했을 당시를 살았던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녀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수많은 종족들은 터전을 잃은 채 떠돌아다녀야만 했다.
어디 그것뿐일까.
데모스로 인해 각 종족들이 쌓아온 문화와 기술까지 모조리 없애버렸다.
어떻게 보면 하나의 세계를 송두리째 파괴시켜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내, 내가 잘못했다. 이대로 놓아준다면, 다시는······. 다시는 아티로스로 오지 않겠다!”
나는 고래고래 악을 써댔는 데모스를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사람이나 마왕이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똑같구나.
나는 녀석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이로나스 씨의 영혼을 흡수할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후우우우우우.
그와 동시에 아주 서서히 데모스의 영혼이 내게로 흡수되는 게 감각됐다.
더불어 진공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듯, 녀석의 영혼이 내게로 스며드는 게 눈에 보였다.
“크으으으으······. 놈······. 노오오오옴!”
어떻게든 내게서 벗어나겠답시고 발버둥을 쳤다. 심지어 마지막 남은 힘까지 쥐어 짜내며, 나에게 시커먼 낫을 날렸다.
하지만 지금 내 주변에 넘실거리는 백색 마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내게 채 닿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데모스의 영혼이 내게로 흡수되었고, 덩달아 녀석의 모습 또한 흐릿해져 갔다.
뿐만 아니었다.
데모스의 영혼이 내게로 흡수될수록, 그가 지니고 있던 기억 또한 덩달아 내 머릿속에 새겨졌다.
그중에는 데모스가 대륙을 침략했던 당시의 참혹했던 기억들도 있었다.
“젠장······.”
보기에 썩 유쾌하지 않은 장면들을 볼 때면 저도 모르게 뒷목이 뻣뻣해졌다.
다행스러운 건 안 좋은 기억 외에도 내가 반드시 알아야 할 기억들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데모스의 영혼이 투명해지는가 싶더니, 끝끝내 나에게 흡수를 당했다.
“휴우.”
기진맥진.
마침내 데모스라는, 거대한 산 하나를 허물어트리는 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우······.”
갑작스럽게 너무 많은 양의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서인지, 머리도 지끈거렸다.
뻣뻣하게 굳은 뒷목과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한편, 내 몸에 돌아다니는 검은 마나를 살폈다.
“이게 데모스가 지닌 힘이구나.”
혹시나 백색 마나와 충돌하진 않을까, 걱정했으나 내 체질 덕분인지 검은 마나도 별다른 무리 없이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이로써 내 몸에는 청색 마나, 백색 마나, 녹색 마나, 흑색 마나까지 총 네 가지의 마나가 자리를 잡았다.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할 겸 흑색 마나를 관조하던 중이었다.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