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소년기(126) - #내가 있어야 할 곳
흑색 마나에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흑색 마나 안에 또 다른 무언가 다른 기운이 섞여 있다는 게 느껴진 것이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며, 최소 5가지 이상의 기운들이 흑색 마나 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특이한 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마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차분하게 기운들을 살펴보던 중이었다.
“이건······.”
그중에서 유독 내 신경을 잡아끄는 기운이 하나 있었다.
“이로나스 씨?”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이로나스 씨의 기운이었다.
“영혼의 파편이잖아?”
확실하다.
흑색 마나 안에 섞여 있는 건 단순한 백색 마나가 아닌 이로나스 씨의 영혼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으로 흡수된 데모스의 기억 중 일부가 떠올랐다.
“아아.”
그러니까, 과거 이로나스 씨가 데모스를 봉인할 때 자신의 영혼을 사용했던 거구나.
이로나스 씨는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는 데모스를 봉인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아예 영혼마저 모조리 쏟아부은 것이다.
비단 이로나스 씨의 영혼만이 아니었다.
데모스의 기억에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데모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자신의 영혼마저 건 영웅들이었으며, 그 일부가 데모스의 영혼에 흡수된 상태로 있었던 것이다.
“일단 이대로 두는 건 위험하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흑색 마나를 흐트러트리며, 그 안에 있던 영웅들의 기운을 바깥으로 유도했다.
이윽고 이로나스 씨의 영혼을 비롯하여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영웅들이 내 손바닥을 뚫고 나왔다.
“와우.”
하얀색, 노란색, 붉은색, 주황색, 등등.
그 색깔도 느낌도 가지각색의 기운들이 마치 보석처럼 반짝이며 내 손바닥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영혼의 파편을 백색 마나로 감싸 마그테리움으로 변환시켰다.
그러자 마치 보석처럼 변하며 내 손바닥 위에 토토토톡, 떨어졌다.
“조금만 더 참아주세요.”
그들이 들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나는 작은 목소리로나마 양해를 구한 뒤 영혼의 파편들을 품속에 갈무리했다.
“끄응······. 이제 슬슬 가긴 해야겠네.”
아무래도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다가는 누군가가 눈치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채 풀리지 않은 근육을 주무르던 나는 곧장 게이트를 열어 마을로 돌아갔다.
* * *
“······이게 무슨 일이지?”
마을로 돌아온 나는 난데없이 펼쳐진 장면에 입을 떡 벌렸다.
지금은 얼추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제아무리 축제 기간이라고 한들, 조금은 열기가 가라앉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마을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중에서도 단연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곳이 있었다.
다름 아닌 신전이었다.
아울러 지금도 내게 흡수되는 백색 마나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길어 봐야 서너 시간 남짓.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오셨습니까.”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상황에 내가 당황하고 있자, 용케도 날 찾아온 아르젠 씨가 어깨에 앉았다.
“아르젠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기도요?”
이 시간에 기도를 올린다고?
“누구한테요?”
아, 이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건가.
애당초 우리 마을에서는 파메르를 모시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아르젠 씨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름이 튀어나왔다.
“알렌이라고 합니다.”
“······.”
아르젠 씨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나는 멈칫했다.
“알렌이요?”
“예. 파메르의 사도 중 한 명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파메르의 사도 중 한 명인 알렌을 위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렇습니다.”
“내참······.”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방금 전 아르젠 씨가 언급한 알렌이라는 단어.
단언컨대, 이건 파메르의 사도도 뭣도 아니다.
정정한다.
애당초 이곳에 존재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업무를 볼 때 쓰던 닉네임이었으니까!
“잠깐만.”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생각해보면 이상하다.
알렌.
저건 내 닉네임이 맞다.
그러나 정작 아는 사람은 나 말고는 없었다.
더군다나 전생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
그것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모르는 게 당연한, 지극히 지극히 개인적인 정보인 것이다.
그럼 대체······.
불현듯 내 머릿속을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노인.
내가 처음 노인을 만났을 때, 그는 내가 전생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떤 사람이었는지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하물며 얼마 전에는 축제에서 직접 마주친 전적도 있었고.
맞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노인이 무언가를 한 모양이다.
애당초 그게 아니라면 이러한 전개가 벌어질 수가 없었으니까.
“하여간······.”
뭐, 덕분에 아크니악을 잃지 않았을뿐더러 무척이나 중요한 것들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참으로 좋긴 한데······.
괜스레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대상이 나였거니와, 뜬금없이 파메르의 사도 중 하나라는 호칭까지 얻었으니 괜스레 낯이 뜨거워지는 감각이었다.
“······에이, 모르겠다.”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이미 일은 벌어졌거니와, 내가 뭐 손을 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내심 신전을 한번 들르는 게 좋을까, 라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냉큼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한테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마주 볼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배나 채워야지.”
나는 열이 오르는 머리를 마구마구 긁으며, 푸드 코트가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대장! 대장!”
“으응?”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이 목소리는······록시인가?
아니나 다를까.
문이 활짝 열리더니 록시가 후다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속도를 줄이긴커녕 그대로 뛰어오르더니 내 위로 몸을 날렸다.
퍼억!
“윽!”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록시에게 깔린 나는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어우야······.”
물론 내 몸이 워낙 튼튼한 데다가 록시의 무게가 가벼운지라 별다른 충격은 없지만, 나는 괜스레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려던 차였다.
“대자아앙!”
흐리멍덩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록시의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힘을 쭉 뺐다.
이제 보니 록시는 울고 있었다.
“그래, 그래.”
나는 가볍게 록시의 등을 토닥였다.
사실 어제 푸드 코트를 돌아다니며 간단하게 요기를 채운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록시와 루나가 있어야 할 방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일까.
유난히도 적막하게 느껴진 나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기다 내가 없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던 나는 축제 현장을 찍어둔 녹화영상을 틀었다.
홀로 침대에 앉아 영상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중, 모든 사건의 시작점에 록시와 도리아 아주머니가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분명히 나는 록시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자리를 비울 당시의 록시는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들어있었다.
근데, 신기하게도 내가 데모스와 만났을 시점에 잠에서 깨어난 것도 모자라 바로 신전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감이 좋은 걸 넘어서 진짜로 신기가 있는 게 아닐까, 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 정도였다.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내가 자리를 비웠을 당시 도리아 아주머니에게도 무언가 특이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분명히 그녀는 늘 그렇듯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보는 내가 다 놀랄 정도로 갑작스럽게 말이다.
하지만 얼마 후 도리아 아주머니가 눈을 뜨더니, 돌연 그 자리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내심 궁금했던 나는 볼륨을 최대로 키웠고, 나는 이내 후회했다.
“알렌 님······. 파메르 님의 사도 중 한 분.”
도리아 아주머니가 내 닉네임을 언급한 것이다.
이 모든 사건에는 노인이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도리아 아주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찰나, 록시와 루나가 신전에 도착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이, 위즈 씨를 비롯한 모든 비스테르들이 속속들이 신전으로 도착했다.
비단 비스테르만이 아니었다.
본래라면 축제 한복판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어야 할 헤파이토 씨는 모든 듀로프를 끌고 신전에 도착했다.
아울러 내일 공연을 위해 숙면을 취해야 할 셀리오스 씨 또한 아브륄의 사람들을 대동하여 신전으로 도착했다.
그 외에도 내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 하나, 둘 신전으로 모였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도리아 아주머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신전으로 모인 모두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이내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난데없이 시작된 새벽기도는 아침까지 쭉 이어졌고, 그걸 지켜보던 나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과 콧물을 쏟아내는 록시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대장 안 가?”
록시의 말에 가슴 한편이 뜨끔거렸다.
진짜 얘는 다 아는 건가?
사실 나는 데모스와의 일전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해야 녀석을 소멸시킬 수 있을지, 정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처음으로 맞이하는 전투라는 것도 있었지만, 내가 상대하는 자는 무려 마왕이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마왕을 상대하면서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건 욕심이 아닐까?
그래서 내가 떠올린 경우의 수에서도 가장 최악.
그러니까, 무사히 살아올 수 없는 전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니, 염두에 두고 말고 할 게 아니라 목숨을 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상황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뿐더러, 결과적으로는 데모스의 영혼까지 흡수했지만 말이야.
새삼 깨닫는 거지만,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니까.
“그럼! 내가 가긴 어딜 가.”
내가 록시를 달래고 있던 중이었다.
록시가 닫지 않아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몇몇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넬, 아직도 자고 있었던 거야?”
“흐음? 우리를 불러놓고 자고 있었던 게냐? 쯧, 고얀 것!”
“여기가 넬의 방이군요!”
“허헛, 어떤가? 내가 이 집을 만드는 데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알겠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와······. 방이 되게 넓네요! 앗, 저기 나르비가 좋아하는 쿠키가 있어요!”
“어디, 어디! 아! 진짜다! 엘리니아, 저기 냉장고도 있는데?”
레비아 선생님, 데커드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셀리오스 씨, 헤파이토 씨, 위즈 씨, 엘리니아 씨, 나르비 씨까지.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에야 모이기 힘든 이들이 내 방으로 들이닥친 것이다.
“어라? 아침 일찍부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레비아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 일이긴. 설마하니, 잊은 거냐?”
“네?”
“오늘 다 같이 놀러 가자고 한 건 누구였더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다 같이 모여서 축제를 즐기자고 했었었지.
워낙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보니까, 깜빡 잊고 있었다.
내가 당황하자 레비아 선생님이 픽 웃었다.
“하여간. 우리는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준비하고 내려와. 자, 넬 준비하게 록시도 같이 가자.”
“으응!”
록시가 아쉽다는 듯 내게서 떨어졌다.
“그럼 천천히 준비하고 와.”
“네!”
내가 힘차게 대답하자 레비아 선생님이 내 어깨를 토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이내 모두가 방을 나가고 홀로 남은 나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었다.
그래, 내가 가긴 어딜 가겠나.
이곳이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