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소년기(128) - #차원의 틈
역시나 노인은 내가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나르비 씨한테 들었어요. 아, 나르비 씨 아시죠?”
“알고 있네. 그 작은 친구를 말하는 게지? 참으로 활기찬 친구더군.”
“네. 맞아요. 아, 그럼 제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니에요?”
생각해보면 노인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다.
애당초 내 부탁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가 나르비 씨와 나의 대화를 들었다는 이야기니까.
“허허헛, 자네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겐가?”
“뭐라고 생각하긴요! 신이시잖아요!”
처음에야 저승사자가 아닐까, 생각했었지.
이제는 눈앞의 노인이 말로만 듣던 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태평하단 말이지.
신을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말을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신이라······. 그래, 자네의 눈으로 본다면 신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 허나, 자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전지전능한 건 아니라네. 그저 오랜 세월을 살았기에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을 뿐이야.”
오래 살아서 될 수 있다니.
“에이, 그럼 누구나 다 신이 될 수 있겠네요!”
“그럼, 누구나 될 수 있지.”
“어······. 그, 그래요?”
나는 그냥 농담 삼아서 말한 건데, 이렇게 진지하게 답변을 해주시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물론 아무나 다 되는 건 아니라네. 그래도 자격만 갖춘다면 못 할 게 있겠는가? 어떤가, 자네도 생각이 있으면 추천해줄까?”
노인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그런 막중한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흐음? 내가 보기엔 자네야말로 이 자리에 적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그래, 나중에 생각이 바뀌거든 말해주게나. 내 자네라면 기꺼이 추천해줄 수 있지.”
“추천이라니······.”
지구에서는 곧잘 이런 말을 하곤 한다.
혈연, 지연, 학연이야말로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말이다.
대체 누구한테 추천하겠다는 건진 모르겠지만, 따지고 보면 이것도 소위 낙하산 인사가 아닐까.
하물며 그냥 회사에 취직하는 것도 아니고 신이라는 자리를 덜컥 내어주겠다니······.
한편으로는 노인이 날 무척이나 좋게 봐주는 것 같아서 감사하기도 하고, 적잖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 그 부탁이라는 걸 들어볼까?”
“음······. 그러니까, 맹약이 깨지고 차원의 틈에 갇힌 정령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듣자 하니 차원의 틈에 갇힌다고 한들 정령이 소멸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이전에도 말했듯,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하지만 지금 정령들이 갇힌 곳은 차마 이승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장소다.
특히 나는 이곳으로 오기 위해서 몇 번이고 차원의 틈을 열어봤다.
그리고 내가 직접 그 안을 들여다보고 또 직접 들어가 본 결과.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빛은 고사하고 인간이 지는 오감 자체가 차단되어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더불어 나르비 씨도 이를 알고 있었고, 그들을 구출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작은 친구의 말이 맞네.”
“네?”
“차원의 틈은 말 그대로 틈이라네. 그곳에 던져지면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해. 그곳을 관리하는 자의 악취미지.”
잠깐만.
“그곳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요?”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내가 깜짝 놀라며 묻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래전에 만난 적이 있다네. 아주 고약한 녀석이지. 차원의 틈은 그 녀석이 관리하고 있다네. 크렐루스라는 녀석이지.”
크렐루스.
심연 혹은 영원한 적막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그 크렐루스라는 신이 존재하는 이상 정령들은 언제까지고 그곳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거잖아요?”
“그렇지.”
끔찍하네.
크렐루스라는 신은 왜 그런 짓을 하는 걸까.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차라리 죽었으면 죽었지, 그런 곳에서 영원히 갇혀있는다는 건 너무 끔찍할 거 같아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소멸당하는 쪽을 택하리라.
그래서다.
정령들이 그곳에서 고통받는 걸 알면서도 두고 볼 순 없었다.
그래, 크렐루스고 나발이고.
이미 가기로 한 이상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는다.
괜한 잡념을 떨쳐낸 나는 노인과 시선을 맞췄다.
“많은 건 안 바라요. 그냥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나마 나에게는 데모스의 기억이 있어서 그들이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갇혀 있다는 걸 알 뿐이지, 정작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흐음? 위치만 알면 된다는 겐가?”
내 부탁이 의외였던 걸까.
연신 수염을 쓸며 내 이야기를 듣던 노인이 멈칫하며 반문했다.
내가 아예 그들을 구출해달라고 부탁할 줄 알았나 보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양심이 있죠!”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백 단이라고 자부한다.
아까 이로나스 씨를 비롯한 영웅들만 하더라도 그렇다.
노인은 사도라는, 명목을 먼저 밝히고 난 뒤에서야 영웅들을 부활시켰다.
무엇보다.
노인은 추천이라는 말을 언급했다.
즉 노인과 동등한 혹은 그보다 높은 존재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나의 입장이 있듯, 노인에게는 노인의 입장이 있었으니 될 수 있으면 내가 많이 움직이고 싶었다.
그게 마음도 훨씬 편했고.
“위치만 알면 돼요!”
그도 그럴 게, 나는 차원의 틈을 열 수 있다.
즉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만 알 수 있다면 충분히 구출할 수 있었다.
내 설명을 들은 노인이 수염을 쓸었다.
“위치를 알려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긍정적인 답변에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하지만 자네가 그들을 직접 찾아간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라네. 자칫 자네에게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어. 각오는 한 겐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절 보셨으니까 아시잖아요. 저는 마음의 짐을 남기는 게 싫어요. 되든, 안되든 일단 해보는 거죠.”
거기다 나야 언제 어느 때고 차원의 틈을 열 수 있으니, 행여나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곧장 아티로스나 아크니악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허허헛. 역시 이대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인자한 미소를 띤 채 날 응시하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꽃 한 송이가 올려져 있었다.
언뜻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초롱꽃이랑 똑 닮아있었다.
“받게나.”
엉겁결에 초롱꽃을 받아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뭐예요?”
“그 꽃이 자네가 가야 할 길을 안내해 줄걸세.”
“아!”
그럼 이 꽃만 있으면 정령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거구나.
“노파심에 말하지만, 자네가 가려는 곳은 위험하다네. 부디 조심하게나.”
“네! 조심할게요!”
나는 노인의 걱정에 활짝 웃었다.
그 후로도 나는 노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와 주의 사항을 들었다.
“자, 그럼 가보게나.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그들을 무사히 구하길 바라네.”
“고맙습니다.”
노인이 건넨 꽃을 소중하게 감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또 올게요! 아, 그리고 다음에 마을에 오시면 같이 식사라도 해요! 소개하고 싶은 친구들이 많거든요.”
“허허헛, 알겠네. 내 마을에 가면 꼭 한번 들르지.”
“그럼 가볼게요!”
힘차게 인사한 나는 곧장 차원의 틈을 열고는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으으으, 역시 께름칙하다니까.”
차원의 틈에서 숨을 쉬거나 말을 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다만 몸은 아니었다.
마치 중력이 없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냥 공중에 두둥실 떠 있는 감각이었다.
꿈틀꿈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뒤를 돌아봤다.
서서히 틈이 닫히더니 금세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로써 유일했던 빛마저 사라지고, 완전한 암흑에 갇혔다.
적막한 공간에 덩그러니 남은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좀 꺼내둘 걸 그랬나.
이런 내 불편을 알아차렸다는 듯, 반디가 내 품에서 빠져나와 휴대용 마등의 역할을 해줬다.
“고마워.”
나는 반디의 빛을 조명 삼아 휴대용 마등을 꺼냈다.
스위치를 누르자 조명이 켜지며 주변을 밝혔다.
“휴, 좀 낫네.”
그래 봐야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빛이 있음으로 인해 마음에 안정감이 생겼다.
그나저나 여기에도 관리하는 신이 있다고 했었지.
그럼 되도록 은밀하게 다니는 게 좋겠지.
나라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차원의 틈으로 갈 순 없는 노릇.
본래 나는 아크니악에 탄 채로 차원의 틈에 들어가려고 했다.
근데, 막상 그러기에는 아크니악의 동체가 지나치게 크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떠올린 게 비행기였다.
실제 비행기에 비하면 장난감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작은 크기였지만, 성능은 보통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수 km를 돌파하는 아르젠 씨조차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말 다 했지.
“아쉽지만, 비행기는 잠깐 보류해야겠네.”
나는 꽃을 바라봤다.
“어디로 가면 돼?”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인지, 꽃이 한 지점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저쪽이란 말이지.”
방향을 확인한 나는 셀리오스 씨에게 받은 반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내 적당한 크기로 부푼 비눗방울에 몸을 실은 나는 꽃이 일러준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 * *
내가 차원의 틈에 들어온 지 얼마나 흘렀을까.
오감이 마비된 탓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체감상 3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으음, 시간이야 상관은 없긴 한데······.”
노인에게 주의 사항을 들어보니, 이곳의 시간개념은 다르다고 한다.
정정한다.
아예 시간이라는 게 없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이곳에서 평생을 지낸다고 한들, 아티로스에 돌아가면 아주 찰나의 시간조차 지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그랬기에 이곳에 갇히면 영원히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되는 거고.
“무슨 시간과 정신의 방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가던 중이었다.
투우웅!
“윽! 뭐, 뭐야?”
돌연 날 태운 비눗방울이 거세게 요동쳤다.
마치 무언가에 충돌한 듯한 감각이었다.
난데없는 사태에 긴장한 나는 재빨리 휴대용 마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
그러나 으레 그렇듯, 어둠만이 가득할 뿐.
이렇다 할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분명히 방금 부딪혔는데?
혹시나 싶어 아주 천천히 비눗방울을 이동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토옹!
앞으로 나아가던 비눗방울이 재차 무언가에 부딪히며 살짝 뒤로 밀려났다.
돌아갈 수 있을까 싶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해봤지만, 역시나 앞으로 나아갈 순 없었다.
“설마하니 막다른 길이 나올 줄이야.”
이걸 어쩐다.
분명히 초롱꽃은 이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는데, 이래서는 나아갈 수가 없으니 갑갑했다.
그때였다.
무심코 고개를 치켜든 나는 눈을 꿈뻑였다.
“저게 뭐지?”
느낌상 아주 먼 위치였는데, 그곳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특히나 그 빛은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으며, 어째선지 점점 내게 가까워지는 듯했다.
멀거니 서서 점점 가까워지는 빛을 응시하던 중이었다.
“어째 눈을 깜빡이는 것······.”
무심코 중얼거리던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게 있었다.
차원의 틈을 관리하는 신.
“크렐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