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56화 (154/159)

156. 소년기(138) - #정령왕은 내 친구!

드디어 나왔구나.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용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타는 용이라니······.

“멋있네.”

빈말이 아니라 이 상황만 아니라면 같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 정도로 멋들어진 생김새였다.

거기다 그 크기도 어찌나 거대했는지, 빌딩을 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듣기로는 라그나라는 정령은 단순한 정령이 아니라고 나르비 씨가 말했었지.

일례로 정령의 왕이라 일컫는 반디를 보면 알 수 있듯, 정령들 사이에는 격이라는 게 존재한다.

나아가 힘이 약한 정령이라도 오랜 세월을 살다 보면 조금씩 강해지며 최종적으로는 승화라는 걸 겪는다나.

게임으로 치면 레벨업을 하다가 보다 상위의 직업으로 전직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페아로스에서 행해지며, 현재 아티로스에 있는 정령들은 승화를 하지 못한다.

다만 과거.

아티로스와 페아로스가 단절되기 이전에 승화했던 정령들이 있으며, 그중 하나가 라그나라고 들었다.

따라서 라그나는 아티로스에 현존하는 정령 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이다.

문제는 지금의 라그나는 다른 정령들의 힘을 흡수하면서 훨씬 더 강해졌다는 거지.

아, 감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지.

나는 재빨리 지상을 박차 뒤로 물러났다.

콰아아아아아!

훌쩍, 내가 디디고 서 있던 자리가 검붉은 화염으로 뒤덮였다.

“와우.”

검붉은 불길이 지상을 휩쓰는 게 꼭 레드와인을 쏟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성격이 급하네.”

이렇다 할 통성명도 없이 무작정 불을 뿜어내다니 말이야.

애당초 정령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작정 싸워야 한다는 게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무엇보다.

섣불리 공격할 수가 없겠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현재 라그나의 몸에 흡수된 정령들 때문이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을지언정 라그나의 몸에는 수많은 정령들이 뭉쳐있다는 게 감각됐다.

그들은 아직 소멸당하지 않았으며 라그나의 몸속에 갇혀있는 것이다.

즉 이대로 라그나를 공격하게 된다면?

내가 구해야 할 정령들이 도리어 소멸당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콰아아아아아!

“웃차! 그러니까,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라그나의 몸에 갇힌 정령들을 무사히 빼내고, 또 폭주한 라그나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나는 라그나가 뿜어대는 불길을 피하는 한편, 녀석을 꼼꼼하게 살피며 방법을 강구했다.

내가 너무 수월하게 피해내자 이게 또 라그나의 심기를 거슬렀던 걸까.

“웃차!”

라그나는 아예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날 압박했다.

쿠우우우우웅!

그래 봐야 녀석의 움직임으로는 날 잡을 수 없었다.

“으음······.”

정작 대미지를 입은 쪽은 따로 있었다.

“이거, 에프렐들이 보면 난리나겠네.”

울창한 초목으로 생기 넘치는 숲은 금세 라그나의 검붉은 불길에 휩싸였고, 곳곳에는 깊고 커다란 구멍이 파였다.

나름 자연을 존중한다는 에프렐이 본다면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리라.

이거 나더러 복구하라고 소송이라도 거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그렇게 라그나의 무차별적이면서도 일방적인 공격을 피하며, 방법을 찾던 중이었다.

마침내 내 감각에 데모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잡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라그나의 몸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기생충을 연상케했다.

“저게 원인이구나!”

좋아.

저게 뭔지는 몰라도 라그나가 저렇게 된 원인이라는 건 확실했다.

이동을 멈춘 나는 그대로 백색 마나를 끌어올렸다. 뒤이어 내 몸은 백색 갑옷으로 뒤덮였다.

데모스와 접전을 펼칠 때 사용했던 마그테리움의 갑옷이었다.

좋아.

이거라면 안전하지.

쿠구구구구구구!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달려드는 라그나를 보며 살짝 무릎을 굽혔다.

금방이라도 날 집어삼킬 듯 주둥이를 벌린 라그나를 보며 오른손에 흑색 검을 생성시켰다.

금세 거대한 주둥이가 바로 코앞까지 당도했다.

집중하자.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라그나를 주시했다.

이윽고 쩍 벌어진 주둥이에 내 몸이 삼켜지기 직전이었다.

“지금!”

나는 그대로 오른손을 내질렀다.

파악!

흑색 검이 라그나의 몸을 파고들었다.

흑색 검이 기생충에 닿으려는 찰나.

돌연 기생충이 꿈틀거리더니 잽싸게 물러났다.

어쭈!

순식간에 몸 깊숙한 곳으로 도망친 기생충에 닿기에는 지나치게 짧았으나, 상관없었다.

까짓 길이는 늘이면 그만이니까!

“어딜 도망가!”

내 외침과 동시에 흑색 검이 쭈우우욱, 늘어나며 라그나의 중심부를 지났고, 마침내 기생충을 꿰뚫었다.

콰아아앙!

라그나가 내 몸을 집어삼킨 것과 거의 동시였다.

“휴우······ 아슬아슬했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그나저나, 여긴 좀 더운데.”

졸지에 라그나의 입속에 갇힌 나는 반사적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퉁!

하지만 마그테리움의 갑옷을 걸친 내 손은 헬멧에 튕겨져 나갔다.

역시나 불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입속은 몹시도 더웠다.

“이야, 마그테리움 갑옷을 입었는데도 이 정도라니.”

만약 맨몸이었다면 아이스크림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도 남았으리라.

“일단 나가······응?”

라그나의 입에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반디?”

얼떨결에 갑옷에 갇혔던 반디가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움직임이 몹시도 격한 게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갑옷의 형태를 변형시켜 반디를 바깥으로 내보냈다.

호롱!

돌연 반디가 라그나의 몸속으로 진입했다.

“응? 야야, 너 어디 가?”

이런 내 물음에도 반디는 그저 빠른 속도로 나아갈 뿐이었다.

보아하니 상당히 급해 보이는 것이, 라그나의 몸속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어쩔 수 없나.

마음 같아서야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반디를 이대로 두고 나갈 순 없는 노릇.

나는 반디의 기척을 따라 라그나의 몸속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나는 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반디를 발견했다.

“반디?”

호롱!

마침 잘 왔다는 듯, 반디가 내게 신호를 보냈다.

“뭔데 그래?”

나는 반디의 곁으로 향했다.

“어? 이거······.”

그곳에는 아주 자그마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미약했다.

“설마, 이게 라그나야?”

호롱!

반디가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그랬구나.

역시 라그나는 데모스의 힘과 다른 정령들을 흡수했기에 검붉은색이었던 거였어.

“반디, 잠깐만.”

정령의 왕답게 라그나를 구하려는 반디를 뒤로 물렸다.

“그러니까······. 맹약을 맺는 방법이······.”

엘리니아 씨에게 들었던 내용을 상기한 나는 천천히 녹색 마나를 뿜어냈다.

이윽고 내 몸에서 나온 녹색 마나가 불꽃에 닿았다.

“어라?”

이상하네.

어째서인지 불꽃에 닿은 내 녹색 마나가 그대로 튕겨 나갔다.

분명히 엘리니아 씨에게 듣기로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들었는데?

그 후로도 나는 몇 차례 더 시도를 했으나 역시나 맹약은 맺어지지 않았다.

“아아.”

알겠다.

보아하니 라그나가 나와의 맹약을 거부하는 거구나.

“혹시 이거 때문인가?”

나는 오른손으로 쥐고 있는 흑색 검을 힐끗 쳐다봤다.

자고로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다.

라그나의 몸에 있는 기생충을 없애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인지라 흑색 검을 거두지 않은 것이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흑색 검을 없앤 뒤 다시금 녹색 마나를 뿜어냈다.

아니나 다를까.

몇 번의 시도에도 줄곧 튕겨 나오던 녹색 마나가 불꽃 안으로 스며들었다.

안 그래도 라그나의 몸속에 갇힌 정령들을 어떻게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때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내 머릿속을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눈을 꿈뻑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불꽃을 쳐다봤다.

이런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낯선 목소리가 재차 머릿속을 울렸다.

-그대는 누구기에 고귀하신 분과 함께 있는 거지?

“라그나 씨예요?”

-그렇다. 나의 이름은 라그나. 다시 묻겠다, 그대는 누구인가?

어라?

정령은 대화를 못 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지금까지 만난 정령만 수백이지만, 이렇게 사람의 말을 하는 정령은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정령의 왕이라는 반디조차도 사람 말을 하지 못하니까.

하기야.

라그나는 일반적인 정령이 아니라고 했으니, 말을 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겠지.

“저는 아이넬이라고 해요. 그리고 얘는 반디.”

-반디······? 정령의 왕과 무슨 관계지?

“친군데요?”

내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라그나가 잠시 침묵했다.

-······정령의 왕의 친구······십니까?

그리고 어째서인지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캬, 이게 권력의 맛이라는 건가.

상위 정령이라고 한들 그보다 높은 존재인 정령의 왕의 친구라고 하니 바로 존댓말이 튀어나오는구만.

“쿡쿡.”

-왜 웃는 겁······니까?

“아뇨, 그냥요. 아무튼,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말씀하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지금 라그나 씨의 몸에 흡수된 정령들을 풀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건······.

“그건?”

-저를 소멸시키면 해결됩니다.

잠깐만.

“소멸이요?”

-예. 제 존재를 소멸시킨다면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힘도 사라질 겁니다.

어쩐지 자조적인 말투였다.

혹시······.

“라그나 씨는 지금까지의 일을 다 기억하죠?”

내 질문에 라그나 씨가 침묵했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기억하죠?”

-예. 모든 것은 아니고······어느 정도는 기억합니다.

그렇구나.

“그래서 소멸당하기를 원하는 거고?”

-······예.

라그나 씨가 맥없이 답했다.

왠지 불꽃도 한층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거 고민상담부터 해야겠는데?

“툭 터놓고 얘기해봅시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

-이대로······. 두고볼 수 없었습니다.

“두고 볼 수 없었다? 뭘요?”

-아티로스와 페아로스가 단절된 뒤로 정령들은 그저 에프렐의 도구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거기다 말을 듣지 않는 정령들은 맹약을 파기했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네, 그건 저도 알아요.”

-알고 계셨습니까?

“네. 그래서요?”

-드라고스 산맥을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어떤 물건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물건에는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다는 걸 깨달은 저는 그 안에 담긴 힘을 흡수했습니다.

“혹시 물건이라는 게······. 시커먼 돌이었던 건 아니죠?”

-예? 마, 맞습니다.

“그리고 그 힘을 얻어서 에프렐이랑 한바탕하려다가, 도리어 이렇게 됐고요.”

-······예.

그럴 것 같더라니.

더군다나 이런 일은 이미 예전에도 한 번 있었다.

스카른 씨의 아버지였다.

그는 마봉석으로 인해 강력한 힘을 손에 넣는 대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제야 알겠네.

단언컨대, 라그나 씨가 소멸을 언급한 건 죄책감 때문이겠지.

하기야.

이렇듯 반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라그나 씨가 가장 상위의 존재였다.

달리 말해서 모든 정령들을 통치했으며, 정점에 서 있던 이가 바로 라그나 씨다.

이렇듯 정령을 지키기 위해서 힘을 얻으려고 했던 그가 도리어 그들을 흡수해서 힘을 불렸으니 면목이 없으리라.

“먼저 라그나 씨가 말했던 그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갇힌 정령들은 다 돌아왔어요.”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그렇게 아시고. 일단 그들은 무사히 아티로스로 돌아왔어요.”

-······.

“그리고 모든 정령들은 에프렐과 맹약이 깨졌어요. 쉽게 말해서 앞으로 정령들은 일개 도구가 아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그,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에요. 제 말은 몰라도 반디의 말은 믿을 수 있지 않아요?”

내 말에 불꽃이 작게 떨었다.

“아무튼, 라그나 씨가 걱정하는 것들은 전부 해결됐어요. 그러니까, 얼른 정령들을 구할 방법이나 알려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는 투로 말하자 라그나 씨가 다급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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